그리스도교는 기억 위에 세워진 종교이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억이 그 기반이다. 그리스도의 삶이 그랬듯이, 그래서 결국 처형으로 마감되었듯이,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은 늘 “위험한 기억”(dangerous memory)이다. 그 기억은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고통받는 사람과 연대하다가 스러진 인간에 대한 기억이기 때문에, 가해자들에게는 그 사건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 성삼일 - 다시 들춰본 생각 (주낙현, 2009.4.10) 중에서
시간이 상처와 아픔을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기억으로 만들 때 그 시간은 치유의 어머니 같다. 더불어 시간이 우리의 안락함 아래 켜켜이 쌓여진 죽음들, 그 고통의 기억들을 지워버릴 때 그 시간은 마치 존재의 반대말 같다. 시간은 상처를 치유하고, 동시에 고통의 기억도 지운다. 고통의 기억이 지워질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는 근거를 지워버렸으니까. 항상 소망은 고통 속에서만 생겨났으니까. 이제 텅빈, 시간 없는 공간만 남는다.
삶과 죽음, 시작과 종말 '사이'에 시간이 있다. 그 사이에 있는 시간은 살아있는 자에게만, 존재하는 자에게만 흐르는 시간이다. 보이지 않는, 무수히 많은 달콤하고 투명한 죽음을 우리는 실천하고 있고, 거기에 둘러쌓여 있다. 어떤 철학자는 "기독교의 위대성-가치있는 모든 종교의 위대함-은 중간윤리(interim ethics)1 에 있다"2고 말했다. 종교는 예정된 축복을 위한 행복의 약속이 아니라, 종말을 준비하는 실존의 인간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질문하는 것이어야 한다.
한 자살한 대통령의 죽음에 서럽게 오열하고, 분노했던 어떤 노인이 죽었다. 그는 고통과 그 고통이 만들어내는 소망의 연대를 위해 자기 생애 대부분을 바쳤다.... 그리고 이제 한 성공한 사내가 소망을 욕망으로 만들었고, 욕망을 종교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욕망이라는 종교는 중간윤리에 대한 고민을 쓰레기통에 쳐박았다. 사람들은 그 사내를 욕했지만, 그 욕망에 대해선 침묵했다. 내심 그 욕망에 환호했다. 그리고 이제 그 사내의 종교는 고통에 대한 기억을 망각으로 가두는 주술이 되었다. 우리는 이미 죽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 매일 살아있는 것처럼, 시간 없는 공간 속을 부유한다.
Foot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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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창으로 순간 이동!"중간윤리"라는 번역이 좀 애매하네요. 중간이 마치 middle을 말하는 것 같아서... interim이라면 임시-, 일시-, 과도- 라는 정도가 괜찮을 듯한데... 왜 중간을 택했는지 모르겠네요. 잘 읽고 갑니다.
설명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네요.
과도기적인 의미를 좀더 부각시키는 표현이었다면 더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논평 고맙습니다. : )
본질의 두려움..이 느껴졌고 그렇기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 밖에 없는.......
그저 습관같은 단상일 뿐인데요..
공감해주시니 반갑고, 고맙습니다. : )
머리와 가슴에 혼돈이라는, 무게를 가늠하기 어려운 돌덩어리를 품고 계시는 듯..
혼돈속에 살면서 혼돈에 무감각하게 산다면 인간은 껍데기로만
살다가 그 껩떼기를 벗는 순간 가늠하기 어려운 두려움에
진정한 생명력을 잃어버리지 않을까요??
진지한 논평과 공감에 감사드립니다.
주신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추.
지금은 위장에 결핍을 품고 있어서 배가 좀 출출하네요...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