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트위터와 블로그, 그리고 내러티브의 죽음에서 이어짐
11. SNS의 역설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SNS는 매체의 문턱을 낮췄다. 여전히 (협의의) 블로그가 뭔가 줄거리를 갖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거리가 있는, 비교적 소수의 지적 엘리트에게 친화적인 매체였다면, SNS, 특히 트위터와 같은 캐주얼한 스트리밍 미디어는
'단 한 줄'로 고전적인 내러티브가 지배하는 질서를 일순간 파괴하고, 해체했다. 한 줄은 나도 쓸 수 있으니까. 스마트폰으로 사진 한방 찍어서 올리는 건 나도 할 수 있으니까.
12. 하지만 트위터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목도했던 풍경은 만인 미디어로서의 다채롭고, 다양한 빛깔과 향기의 풍경이 아니라 소수에 대한 이목 집중현상이다. 만인이 참여할 수 있는 미디어임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네임드' 집중현상은 오히려 강화된다. 여기에
이고잉이 탁월하게 지적한 '진영의 비즈니스'화는 가속하고, 맞팔이라는 병맛 문화로 인한 노이즈는 미친듯 증가한다. 그래서 나는 초기 트위터의 매력을 상당 부분 이미 잃어버렸다.
13. 최근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생각하는 현상은 '유명인'의 몰락(?)으로 부를 수 있는 현상이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트위터가 행하는 것 같은 '위대한 복수'(니체)랄까. 가령 공지영 '의자놀이' 사건을 생각해보자. 나는 공지영이라는 꽤 훌륭한 작가(로 평가되는 어떤 유명인)가 트위터라는 새로운 매체에 투영될 때 드러나는 그 한심한 모습에 이미 오래 전에 '아웃 오브 안중'한 상태였지만, 최근의 사태(!)는 뭐랄까, 묘한 쓸쓸함까지 안겨주고 있달까. 여기에 진중권이 구원투수로 함께 망가져가는 모습을 보자니, 누군가 탁월하게 묘사한 바, 이게 대한민국 "진보 일진"의 일진스러움인가... 아주 슬픈 생각마저 들었다. (이번 사태를 훌륭하게 정리한
뗏목지기의
트윗 르뽀르따주)
14. 위대한 복수. 위대한 성취를 이룬 어떤 사람은 그 위대한 성취 때문에 언젠가는 망가지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 위대한 성취로 만들어진 그 사람에 대한 표상을 실제의 그가 계속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즉, 과거의 위대한 내가 오늘의 평범한 혹은 비천한 또는 욕망에서 허우적거리는 나에게 복수한다. 트위터의 즉각적인 대화 시스템은 대화의 맥락과 결을 거세시킴으로써, 즉 극단적으로 대화를 즉물화시킴으로써 자기의 즉각적인 감각적 본능만으로 그 대화를 조직하는 속성을 갖는다. 특히 1:1이 아니라 1:10, 1:20, 1:100... 이렇게 소수에게 집중되는 대화 메카니즘 속에서 소위 주목받는 유명인의 반응은 수동적인 공격성으로 표출되기 쉽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다.
15. 그럼에도 공지영, 진중권의 트위터에서 표출된 그들의 '일진스러움'에 대해선 일말의 연민도 생기지 않는다. 그네들 진보일진들의 행패를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트위터라는 이 가상이며, 환상인 민주주의적 광장은 진보 일진들이 심심하면 용돈 삥뜯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악몽이 모여 있는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여기서 다시 지적하지만, 트위터라는 '민주주의적 광장' 그 자체가 환상이며, 환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그게 지옥인 것보다는, 환상이더라도, 푸른 잔디인 것이 낫지 않겠나. 물론 방구나 뽕이나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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