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대한 텍스트는 거듭 읽히고, 끝없이 해석되며, 쉼없이 다시 탄생한다.
* 프랑소와 트뤼포의 유명한 일화.
열 살의 트뤼포. 땡땡이 치고 영화를 본다. 집에 돌아온 트뤼포, 숙모 손에 이끌려 다시 영화 보러 나선다. 그런데 숙모와 함께 봐야했던 영화가 하필이면 땡땡이 치고 낮에 봤던 바로 그 영화. 난감해진 트뤼포. 하지만 차마 땡땡이쳤다 말할 수 없었던 트뤼포. 그렇게 트뤼포는 그 운명의 영화, 마르셀 카르네의 <밤의 방문객>을 다시 보게 된다. 그리고 영화광은 같은 영화를 다시 홀린 듯 보는, 볼 수 있는 그 순간 태어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트뤼포, 드디어 영화광이 된거다.
그리고 어른이 된 트뤼포의 멋진 격언.
* 어제 새벽 우연히 [친절한 금자씨]를 다시 봤다.
이번이 정확히 몇 번째인지는 모르겠다. 다섯 번 째나 혹은 여섯 번 째... 인 것 같다. 어떤 케이블 채널에서 뜬금없이, 정말 뜬금없이 [친절한 금자씨]는 방영중이었고, 나는 마침 우연히도 TV를 켰던 거다. 중간부터, 금자 새끼 손가락이 붕대로 감긴 그 뒤부터 다시 봤다. 이 영화는 정말 걸작이다. 나는 이 영화가 이토록 걸작인줄 예전엔, 네다섯 번을 보면서도, 미처 몰랐다.
* 마르쿠제는 거듭해서 예술과 실천, 예술과 정치적 잠재력, 꿈과 현실은 중재된 매개에 의해,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예술이 갖는 정치적 잠재력은 그 미학적인 형식 속에서만 구현될 수 있다. 그 형식이 내용이 됨으로써 구현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마르쿠제의 어투를 빌자면, 노골적인 교훈극인 [화려한 휴가]보다는 [친절한 금자씨] 혹은 [지구를 지켜라] 속에 현실을 변혁할 수 있는 정치적 잠재력은 훨씬 더 커다랗게 숨겨져 있다.
* 금자씨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정치적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정치적 함의를 읽어내려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이 영화는 눈물을 찔끔 거릴만큼 포복절도할 블랙 코미디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표현주의적 과장으로 자신을 숨기며, 교활하고 뻔뻔한 스타일을 만개시킨다. 놀랄만한 표피들, 흔적들, 이미지들의 부유하는 속도들, 그 속도에 리듬과 단절의 운율을 만들며 흘러가는 기적적인 매혹의 이미지들, 그 이미지들의 끊임없는 교차, 그 혼돈의 우주 속에서 이미지가 내용이 되고, 형식이 실체가 되는 궁극의 지점을 향해 뛰어 든다.
그리하여 [친절한 금자씨]는 20세기 말 21세기 초라는 시간의 진실과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의 진실이 품을 수 있는 극단적인 상징들을 그 홀린듯 한 이미지들 속에서 재현해낸다. 그건 그 개새끼가 왜 죽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죽음이 이미 있는 우리들의 '주검'들과 어떤 본질적 연계를 맺는지 아프게 증명한다. 이 영화는 제도를 통한 합리적인 복수마저도 사제적인 작용, 그것은 주로 언론과 쇼오락프로그램이 담당하게 되는데, 을 통해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은 대한민국이라는 기만적 정의를 상징적으로 까발기고 진심을 다해 저주한다. 가령 이런 판국에 '사형제도 폐지론'은 얼마나 환상적인, 스스로에게 기만적인 휴머니즘에 기반하고 있는가?
"하늘엔 조각 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는" 아름다운 대한민국은 그 개새끼가 멋진 요트를 타기 위해 아이들을 죽이고, "당신은 영어를 할 줄 압니까?"라고 지껄이며, "아내와 그 짓을 할 때 포르노의 하얀 구멍을 상상하는"(황지우) 그런 세계, 평범함으로 둘러싸여 있는, 그래서 더더욱 도저한 악의 세계, 그 악의 세계 속에서 그 하수인으로 복무했던 어떤 '날라리 고삐리'가 이제는 어른이 되어, 한 순결한 소녀의 엄마가 되어, 숨죽이는 목소리로 "아임 소리, 아임 소리, 아임 소리, 정말 아임 소리"라고 흐느끼며 용서를 구하는 그런 세계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용서를 구하는, 하지만 구원받지는 못할, 날라리 고삐리가 초인이 되어 우리들 모두의 복수를 대행하고, 사이비 사제에게 "너나 잘하세요"라는 우리시대의 금언을 날리며, 친절하게 그 개새끼 이마에 총알을 쑤셔박는 궁극의 판타지를 꿈꾸는, 하지만 꿈만 꾸는... 그런... 세계. 마치 이건희가 법원에 퍽큐를 날리는 그 풍경을 이른바 진보적인 미디어들이 맹렬하게 비판하는 기사들의 배경 뒤로 전지현의 미끈한 허벅지가 겹쳐지는 그런 세계....
이 평범한 악의 세계에서 사이비 사제는 어느새 악의 심부름꾼이 되어 하느님을 팔아 먹고, 보통 사람들의 평범해서 더욱 거룩한 욕망들은 파출부가 되어 아이를 강남 학원에 밀어 넣으며, 그렇게 밀어 넣은 아이가 주검이 되자, 다시 그 죽음은 계좌번호로, 문득 희미한 천사들의 강림으로, 죽음 그 자체가 잔인하게, 그래서 더더욱 간절한 아름다움으로, 그런 싸구려 휴머니티로, 그 휴머니티에 대한 조소로, 조소에 대한 기꺼운 연민으로 영겁회귀한다.
하지만, 문득 눈이 내리고, 그 눈길을 잠에서 깬 기적의 소녀가 맨발로 뛰어 나오면, 금자씨는, 비록 "구원을 받지는 못했지만" 두부 케잌에 얼굴을 파묻고, 그 소녀를, 자신의 또 다른 '생(生)'을 껴안는다.
* 관련 팟캐스트
무비 토크 34회 - 감독을 말하다 '박찬욱'
* 관련글
니체와 금자씨 (kino21)
추.
이건희가 대한민국 법치주의를 끝장낸 게 아니라, 법원이 대한민국 법치주의를 끝장낸 게 아니라, 실은 그 욕망의 사슬들, 이미 당신에게 있었고, 나에게 피처럼 흐르는 그 질투와 시기와 결핍과 그래서 더 붉게, 더 환하게 타오르는 그 자본에 대한 욕망, 권력에 대한 욕망, 사랑스런 이기심, 그리고, 그런데... 오늘은 비가 오려나요? 병신들, 놀고 있네... 이명박 각하 만세! 대한민국 만만세... ㅎㅎㅎ 완전히 코미디야, 코미디...
추2.
언젠가, 빨강머리 앤이 아주머니에게 그랬다.
"이젠 조쉬를 좋아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 그만둘까해요... "
추3.
나는 지금/여기 이 빌어먹을 대한민국에 총체적인 환멸을 느낀다. 그 환멸이 너무도 깊고, 동시에 너무도 피상적이기 때문에, 그건 마치 끈적끈적한 습기 같은데... 나는 될대로 되라...는 심리에 빠진 것 같기도 하다. 평소라면 글을 쓰고 싶었을, 혹은 최소한 알고 싶었을 각종의 사건 사고들이 넘쳐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새드개그맨에게, 그리고 새드개그맨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 무게에 질식해버릴 것 같다. 그러니까 결론은, 아주 이쁜 여자를 만나면 기분이 좋아질거다. 그것도 어쩌면 빌어먹을 짓이겠지만, 그리고 물론 커피캬라멜만 못하겠지만...
추4.
'악의 평범성'은, 주지하다시피, 한나 아렌트가 평생을 통해 추적한 철학적 테마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인간의 조건'... ). 최근에 청주로 여행(?)을 갔다. 거기에는 내가 참 좋아하는, 교수라는 말을 무척 싫어하는, 실제로도 교수는 아닌, 장동건을 좋아하는 시간강사가 산다. 그의 작업실 혹은 집필실(어떤 독신자 아파트인데)에 혼자 일박하게 됐다. 심심한 나머지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 가운데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빼들었다. 한 두 세시간 동안, 그 짜증스러운 번역투 글을 읽었다, 별 다른 감흥은 없었지만,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의 제목 중에 그 표현이 들어간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랬다는거다...
* 프랑소와 트뤼포의 유명한 일화.
열 살의 트뤼포. 땡땡이 치고 영화를 본다. 집에 돌아온 트뤼포, 숙모 손에 이끌려 다시 영화 보러 나선다. 그런데 숙모와 함께 봐야했던 영화가 하필이면 땡땡이 치고 낮에 봤던 바로 그 영화. 난감해진 트뤼포. 하지만 차마 땡땡이쳤다 말할 수 없었던 트뤼포. 그렇게 트뤼포는 그 운명의 영화, 마르셀 카르네의 <밤의 방문객>을 다시 보게 된다. 그리고 영화광은 같은 영화를 다시 홀린 듯 보는, 볼 수 있는 그 순간 태어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트뤼포, 드디어 영화광이 된거다.
그리고 어른이 된 트뤼포의 멋진 격언.
영화를 사랑하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거듭해서 영화를 다시 보는 것.
두 번째는 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것.
마지막은 영화를 직접 찍는 것, 그 이상은 없다.
* 어제 새벽 우연히 [친절한 금자씨]를 다시 봤다.
이번이 정확히 몇 번째인지는 모르겠다. 다섯 번 째나 혹은 여섯 번 째... 인 것 같다. 어떤 케이블 채널에서 뜬금없이, 정말 뜬금없이 [친절한 금자씨]는 방영중이었고, 나는 마침 우연히도 TV를 켰던 거다. 중간부터, 금자 새끼 손가락이 붕대로 감긴 그 뒤부터 다시 봤다. 이 영화는 정말 걸작이다. 나는 이 영화가 이토록 걸작인줄 예전엔, 네다섯 번을 보면서도, 미처 몰랐다.
* 마르쿠제는 거듭해서 예술과 실천, 예술과 정치적 잠재력, 꿈과 현실은 중재된 매개에 의해,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예술이 갖는 정치적 잠재력은 그 미학적인 형식 속에서만 구현될 수 있다. 그 형식이 내용이 됨으로써 구현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마르쿠제의 어투를 빌자면, 노골적인 교훈극인 [화려한 휴가]보다는 [친절한 금자씨] 혹은 [지구를 지켜라] 속에 현실을 변혁할 수 있는 정치적 잠재력은 훨씬 더 커다랗게 숨겨져 있다.
* 금자씨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정치적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정치적 함의를 읽어내려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이 영화는 눈물을 찔끔 거릴만큼 포복절도할 블랙 코미디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표현주의적 과장으로 자신을 숨기며, 교활하고 뻔뻔한 스타일을 만개시킨다. 놀랄만한 표피들, 흔적들, 이미지들의 부유하는 속도들, 그 속도에 리듬과 단절의 운율을 만들며 흘러가는 기적적인 매혹의 이미지들, 그 이미지들의 끊임없는 교차, 그 혼돈의 우주 속에서 이미지가 내용이 되고, 형식이 실체가 되는 궁극의 지점을 향해 뛰어 든다.
그리하여 [친절한 금자씨]는 20세기 말 21세기 초라는 시간의 진실과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의 진실이 품을 수 있는 극단적인 상징들을 그 홀린듯 한 이미지들 속에서 재현해낸다. 그건 그 개새끼가 왜 죽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죽음이 이미 있는 우리들의 '주검'들과 어떤 본질적 연계를 맺는지 아프게 증명한다. 이 영화는 제도를 통한 합리적인 복수마저도 사제적인 작용, 그것은 주로 언론과 쇼오락프로그램이 담당하게 되는데, 을 통해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은 대한민국이라는 기만적 정의를 상징적으로 까발기고 진심을 다해 저주한다. 가령 이런 판국에 '사형제도 폐지론'은 얼마나 환상적인, 스스로에게 기만적인 휴머니즘에 기반하고 있는가?
"하늘엔 조각 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는" 아름다운 대한민국은 그 개새끼가 멋진 요트를 타기 위해 아이들을 죽이고, "당신은 영어를 할 줄 압니까?"라고 지껄이며, "아내와 그 짓을 할 때 포르노의 하얀 구멍을 상상하는"(황지우) 그런 세계, 평범함으로 둘러싸여 있는, 그래서 더더욱 도저한 악의 세계, 그 악의 세계 속에서 그 하수인으로 복무했던 어떤 '날라리 고삐리'가 이제는 어른이 되어, 한 순결한 소녀의 엄마가 되어, 숨죽이는 목소리로 "아임 소리, 아임 소리, 아임 소리, 정말 아임 소리"라고 흐느끼며 용서를 구하는 그런 세계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용서를 구하는, 하지만 구원받지는 못할, 날라리 고삐리가 초인이 되어 우리들 모두의 복수를 대행하고, 사이비 사제에게 "너나 잘하세요"라는 우리시대의 금언을 날리며, 친절하게 그 개새끼 이마에 총알을 쑤셔박는 궁극의 판타지를 꿈꾸는, 하지만 꿈만 꾸는... 그런... 세계. 마치 이건희가 법원에 퍽큐를 날리는 그 풍경을 이른바 진보적인 미디어들이 맹렬하게 비판하는 기사들의 배경 뒤로 전지현의 미끈한 허벅지가 겹쳐지는 그런 세계....
이 평범한 악의 세계에서 사이비 사제는 어느새 악의 심부름꾼이 되어 하느님을 팔아 먹고, 보통 사람들의 평범해서 더욱 거룩한 욕망들은 파출부가 되어 아이를 강남 학원에 밀어 넣으며, 그렇게 밀어 넣은 아이가 주검이 되자, 다시 그 죽음은 계좌번호로, 문득 희미한 천사들의 강림으로, 죽음 그 자체가 잔인하게, 그래서 더더욱 간절한 아름다움으로, 그런 싸구려 휴머니티로, 그 휴머니티에 대한 조소로, 조소에 대한 기꺼운 연민으로 영겁회귀한다.
하지만, 문득 눈이 내리고, 그 눈길을 잠에서 깬 기적의 소녀가 맨발로 뛰어 나오면, 금자씨는, 비록 "구원을 받지는 못했지만" 두부 케잌에 얼굴을 파묻고, 그 소녀를, 자신의 또 다른 '생(生)'을 껴안는다.
"그래도, 그렇기 때문에..."
솔솔솔 오솔길에 빨간 구두 아가씨.
똑똑똑 구두소리 어딜 가시나.
"... 나는 금자씨를 좋아했다."
* 관련 팟캐스트
무비 토크 34회 - 감독을 말하다 '박찬욱'
* 관련글
니체와 금자씨 (kino21)
추.
이건희가 대한민국 법치주의를 끝장낸 게 아니라, 법원이 대한민국 법치주의를 끝장낸 게 아니라, 실은 그 욕망의 사슬들, 이미 당신에게 있었고, 나에게 피처럼 흐르는 그 질투와 시기와 결핍과 그래서 더 붉게, 더 환하게 타오르는 그 자본에 대한 욕망, 권력에 대한 욕망, 사랑스런 이기심, 그리고, 그런데... 오늘은 비가 오려나요? 병신들, 놀고 있네... 이명박 각하 만세! 대한민국 만만세... ㅎㅎㅎ 완전히 코미디야, 코미디...
추2.
언젠가, 빨강머리 앤이 아주머니에게 그랬다.
"이젠 조쉬를 좋아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 그만둘까해요... "
추3.
나는 지금/여기 이 빌어먹을 대한민국에 총체적인 환멸을 느낀다. 그 환멸이 너무도 깊고, 동시에 너무도 피상적이기 때문에, 그건 마치 끈적끈적한 습기 같은데... 나는 될대로 되라...는 심리에 빠진 것 같기도 하다. 평소라면 글을 쓰고 싶었을, 혹은 최소한 알고 싶었을 각종의 사건 사고들이 넘쳐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새드개그맨에게, 그리고 새드개그맨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 무게에 질식해버릴 것 같다. 그러니까 결론은, 아주 이쁜 여자를 만나면 기분이 좋아질거다. 그것도 어쩌면 빌어먹을 짓이겠지만, 그리고 물론 커피캬라멜만 못하겠지만...
추4.
'악의 평범성'은, 주지하다시피, 한나 아렌트가 평생을 통해 추적한 철학적 테마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인간의 조건'... ). 최근에 청주로 여행(?)을 갔다. 거기에는 내가 참 좋아하는, 교수라는 말을 무척 싫어하는, 실제로도 교수는 아닌, 장동건을 좋아하는 시간강사가 산다. 그의 작업실 혹은 집필실(어떤 독신자 아파트인데)에 혼자 일박하게 됐다. 심심한 나머지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 가운데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빼들었다. 한 두 세시간 동안, 그 짜증스러운 번역투 글을 읽었다, 별 다른 감흥은 없었지만,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의 제목 중에 그 표현이 들어간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랬다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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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 친절한 금자씨, 또는 속죄는 나의 것
Tracked from Different Tastes™ Ltd. 2008/08/10 00:10 del.친절한 금자씨를 극장에서 만난지 벌써 2주 정도가 지났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 연작 세번째 작품(복수 3부작은 잘못된 표현이고 어디까지나 마케팅을 위해 동원된 수사일 뿐이다. 애초부터 3부작으로 기획된 시리즈가 아니다)인 "친절한 금자씨"에 대한 영화로서의 관람 후 감상은 일찌감치 슥삭 정리해두었으니 됐고, 지금은 영화 속 금자라는 인물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편이다. 영화를 볼 때와 보고 나서 며칠 동안은 스크린을 가득 메우던 이영애의 얼굴에 가려졌..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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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 워~ 릴래액스~ 고정하십셔~
오늘 저녁에 종로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정말 문득 새드개그맨님과 맥주라도 한잔 나누면서 '정치''이명박''검찰''포털''방송''방통위''인터넷''촛불''네티즌''블로거'... 이런거는 빼고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는데 말이죠. ㅎㅎ.
계속되는 격무에 몸마음이 너무 지치셨을 것 같아서 전화하는 걸 그만 뒀습니다.
아, 그런데
http://sadgagman.tistory.com/72
위 팟캐스트 중에서요.
중간에 '방통위' 혹은 '방통심의위'에 대해 잠깐 확인을 못했다는 취지로 말씀하신 부분이 있었잖아요? 그 부분에 대해 찾다가...
'최우정 계명대학교 법경대학 교수'의
'방송통신위원회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대한 법리적 문제점에 관한 연구 : 공영방송을 중심으로
(방송문화연구 2008 제20권 1호 pp. 187~218.)
(pdf 파일)
이란 짧은 논문을 읽었는데, 위 논문의 해당부분을 찾아서 거의 답변을 달뻔했다가, 결국은 저도 잘 정리가 되지 않아서... 댓글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ㅡ.ㅡ; 특히나 위 논문이 시간상으로 방통위 출범 전에 쓰여진 것이라서.... 좀 헷갈리기도 했구요.
우리 모두 공범자가 된건가요?
지난 주말에 개봉한 다크 나이트를 보신 후의 감상이 기대됩니다. 소위 죄수의 딜레마란 게임을 헐리우드 영화치고는 깔끔하게 다루었다는.
다크 나이트는 안그래도 관심이 가는 영화였는데, 제가 배트맨을 꽤 좋아하기도 하고, 히스 레저의 유작이기도 하고요... 비트마니아님의 말씀도 있고 하니 꼭 봐야겠네요. : )
추4. 입력 및 사소한 추고.
금자씨. 다시 봐야겠어요. ㅎㅎ
그리고 끈적끈적하게 주위에 가득차 있어서 그 무게에 질식할 것 같다는 것에 동감해요. 저도 이제 더 이상 뭐라고 말할 기운이 없는 느낌이예요. 될대로 되던지.. 라는 마음도 없는 게 아니고.
내가 너무 쉽게 나가떨어지는건가. 그렇게 저들 원하는대로 굴러가는 세상이 오는 걸 도와주는 건가.. 걱정도 후회도 많이 합니다. ㅠㅠ
내일은 다시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겠죠. ㅎㅎ
오늘은 좀 실망하더라도...
그렇게 (무엇보다 자기에게) 실망하면서 다시 힘을 내고..
뭐, 그런거죠..
저는 쓸데없이 바빠서... (아무리 봐도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그리 도움되지 않는 일들로.. 바쁜...) 영화는 커녕 즐겨보던 드라마도 드디어 밀리는 경지에 갔습니다. 정보는 모아놓고 아직 읽어보지도 못 해서.. 블로그 포스트 언제할까.. 고민만하죠..
살다 보면 선악이란게 정말 구분이 가는 것인지..
헷갈리는 순간이 더 많지만... 이렇게 끈적하게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분위기 만은 악한 것이 분명한 거겠죠. 단순하게 손가락으로 악한 사람을 가르치는 평범한 사람, 그 평범한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분노.. 그건 어떤 의미로 두부 케이크 만큼이나 슬픈 손가락질이네요..
금자씨는 스스로 비난당할 여지를 남겨두고 악을 처단했기 떄문에..
카타르시스이고.. 용감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확실히 영화를 좀 더 봐야겠단 생각을 해보며.. 총총..
(근데 정말 책 지루하셨나 봅니다...;;;)
저도 그다지 생산성 없게 바쁜, 그렇게 마음만 바쁜 나날들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렇게 마음이 바쁘고, 마음이 불안한 가운데... 어떤 고요가 있더라는 겁니다. 그 고요는 물론 아주 우울한 회색에 가까운 것이긴 하지만요.
책은 (ㅎㅎ) 꽤 지루했습니다.
제대로 읽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요.
한나 아렌트는 꼭 (최소한 그녀의 주저라도) 읽어보고 싶은 작가인데 말이죠... 다른 번역본이 있나 살펴봐야겠어요(아무래도 워낙에 유명한 작품이라서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
영화블로그가 개점휴업상태여서 궁금했는데 당분간 이곳에 글을 모으려 하시나봅니다. 영화블로그 마지막 글에 소개하신 오퍼나지를 최근에 보았는데 판의 미로라는 처절하게 아름다운 악몽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한 점이 아쉽기만 했습니다. `한` 이라는 소재는 우리 한국인들에게 너무 친숙한 정서라서 외국인이 묘사한 그 `한` 이 좀 싱거워보이더라구요.
금자씨에 대한 애정이 상당하시군요. 예전 글에도 극찬을 하셨는데...전 영화메세지보다 영화에 쏟아부은 스타일과 상징이 훨씬 관심이 가더군요. 저도 케이블을 통해 이 영화 많이 보았습니다. 금자씨가 일하는 오달수의 빵집 이름이 `나루세` 인데 박감독이 일본감독 나루세 미키오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기 위해 이름을 차용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로자와 아키라나 오즈 야스지로등의 거장에 묻힌 일본영화의 거목인데 시간 나시면 걸작 몇편은 필견의 가치가 있습니다.
금자씨의 최대 악수는 이영애의 캐스팅이다...영화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제 소신입니다. 물론 흥행을 고려해서겠지만 그렇다면 화끈한 이영애의 누드라도 한 컷 집어넣었더라면 진짜 흥행에 도움이 되었을텐데요. 박감독의 하드코어한 전작들의 정서를 생각해보면 너무 배우를 고려한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배두나,신하균,송강호등을 그렇게 멋지게 활용한 복수는 나의 것과 비교하면 금자씨는 힘이 너무 떨어져버렸습니다. (전 복수는 나의 것이야말로 박감독이 좋아한다는 타란티노의 왠만한 작품보다 월등한 퀄리티를 지닌 걸작중의 걸작으로 생각합니다. 올드보이의 흥행덕분에 이 명작이 너무 묻혀진 감이 있어요.)
말씀하신 정치적 메세지를 최민식의 캐릭터에 좀 더 노골적으로 집어넣었으면 많은 사람들이 다른 측면에서 다앙하게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었을텐데요, 금자씨도 오백만이상 관객이 든 것으로 아는데 그 많은 관객들이 어떤 감상으로 극장문을 나섰을지 궁금합니다. 전 금자씨를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 의 다크사이드 버전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도 오래간만에 댓글을 쓰니 손가락이 잘 돌아가지 않는군요.
정말 너무 너무 반갑네요. ^ ^
그동안 종종 내내님 뭐하실까 궁금해했더랬습니다.
* 오퍼나지는 '판의 미로'가 주는 깊고, 풍성한 느낌이라기 보다는 조금은 무채색에 가까운 작품인 것 같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같은 감독의 작품인줄 알고 봤다가 다 보고 나서야 '판'을 찍은 감독은 제작자로만 참여한 걸 알았죠. 말씀처럼 '한'이나 '모성애'는 무엇보다 익숙한 정서이기 때문에(그런 정서에서는 우리가 '선수급'이기 때문에?) 좀 싱겁게 느껴지는 부분이 없지 않았던 것도 같습니다.
* 나루세... 그런 일화가 있었군요. 몰랐던 사실입니다. 내내님 추천도 있고 하니 꼭 한번 살펴봐야겠네요.
* 이영애에 대해선..
저는 이영애의 연기력에 대해선 내내님과 의견을 함께 하지만, '금자'라는 캐릭터의 이율배반을 체현할 수 있는 실존의 연기자로 선택된 이영애에 대해선 감독의 선택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 복수는 나의 것..
박찬욱의 작품들 중에서 그저 가장 맘에 드는 영화가 뭔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저 역시 가장 '개인적인 취향'으로 맘에 드는, 가장 아름다운 영화는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특히나 저는 마지막 장면의 아이러니와 유머감각에 대해선 정말 탁월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데요. 그 아이러니(송강호가 자신의 죽음, 그 직접적인 원인이 뭔가를 궁금해하는)에 대한 내내님의 견해도 몹시 궁금하네요.
다만 금자씨의 버라이어티하고, 입체적이며, 중층적인 함의와 역동적인 구성과 비교한다면, 다소 '소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 최민식의 캐릭터
저는, 이런 의견이 기존의 리뷰에서 언급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최민식과 이영애의 캐릭터에는 실제의 사건(주교사 사건, 혹은 여고생 협박전화 사건... 그 유명한 이윤상 사건이죠)이 모티브가 되었다고 생각해서요. 그런 실제로 있었던 사건의 이미지가 겹쳐져서, 물론 말씀처럼 좀더 적극적인 정치적인 의도가 담겨져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오히려 지금이 가장 적정한 수준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박하사탕의 다크사이트 버전"이라는 말씀은 정말 인상적이네요.
내내님의 풍성한 논평 덕분에 제 손가락이 호강했네요...
깊은 고마움을 전합니다.
종종 안부라도 전해주시면 좋겠네요...
더위에 건강 조심하시구요.
* 사소한 추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