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다 죽어버리면 좋겠어

2020/07/14 06:23
빌어먹을...

0. 한쪽에선 정의를 말한다. 다른 한쪽에선 인간에 대한 연민과 예의를 말한다.

1. 한쪽에선 죽음으로 도피했다고 말한다. 다른 한쪽에선 죽음으로 사죄했다고 말한다.

2. 한쪽에선 고소인의 고통을 보라고 말한다. 다른 한쪽에선 자신이 지은 죄보다 더 무거운 처벌을 자기 자신에게 집행한 불완전한 인간을 보라고 말한다.

3. 한쪽에선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한 연약한 존재를 억눌렀던 위선적 권력의 일방적인 욕망과 탐욕이 만들어낸 고통을 보라고 말한다. 다른 한쪽에선 그 모든 고통은 그 고통을 만들어낸 자가 스스로 처단한 생명으로, 그 죽음으로 넉넉하게 보상받지 않았느냐고 말한다.

4. 한쪽에선 사실을 규명하고,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한쪽에선 생명이 줄 수 있는 마지막 참회, 죽음으로 이미 사실을 뛰어넘는 진실이 성취됐다고 말한다.

5. 한쪽에선 죽음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른 한쪽에선 죽음은 이미 모든 것을 말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가 살아 돌아오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죽음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가 죽음으로 걸어 들어간 그 시간을 함께했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그 어둠으로 걸어 들어간 그 몇 시간 동안, 나는 그의 죽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했다. 만약에  그에게 좀 더 연민을 느낀다면, 그가 스스로 걸어 들어간 그 죽음의 시간을 실시간으로, 간접적으로나마, 함께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그 죽음의 시간을 한 방송사의 특보를 통해 실시간으로 확인했다.

하지만 고소인 혹은 피해 호소자의 고통을 상상하는 일은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보통의 남자들은 물론이고, 적지 않은 여성들에게도 그럴 것이다. 내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간접체험했던 그 죽음의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어둡고 깊은 고통을 고소인이 체험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고통의 시간을 간접체험하는 사람들은 남성보다는 여성일 테고, 앞으로도 그 고통의 시간은 누군가에게는 계속 이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 죽음조차 도피로 규정하면서 망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만 생각할 뿐이다. 다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면, 그저 그 죽음 앞에서 아주 잠시 동안만 침묵할 수는 있지 않을까, 바라볼 뿐이다.

나는 죽음마저도 서로 더 증오하기 위해 도구로 쓰는 이 지옥도를 더는 쳐다볼 자신이 없다.
정말 더는 보고 싶지 않다.

어떤 사람들에게 그는 조두순이고, 손정우이며, N번방의 공범들과 별로 다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렇게 상상할 수 있는 조건이나 능력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죄와 벌 사이에는 아주 엄격한 비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죄 지은 만큼 벌 받아야 한다.
그리고 제대로 벌 받은 만큼 용서받을 자격도 생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그건 단지 성인지 감수성의 부족일 뿐이다.
그 어떤 사람들의 말이 나에겐 그냥 논리의 비약이거나 억지인 것처럼.

그러다가 그냥 모두 용서하면 좋을 텐데, 나는 문득 생각한다.
그냥 모두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런 멍청하고 정의롭지 않은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벌어져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건 정의롭지 못한 일이니까.
나도 조두순을 손정우를 N번방의 공범들을 용서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스스로 죽어버렸다면, 아마도 용서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내가 그 피해자였다면 혹은 적어도 그 피해자가 될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다면.
그건 관념으로 상상하거나 떠올려보는 것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음 한 편으로 나는 생각한다.
빌어먹을, 이럴 거면 그냥 다 죽어버리면 좋겠어.
그래, 그냥 다 죽어버리면 좋겠어.

그리고 다 죽어버리기 전에,
조금만 더 서로에게 따뜻하게 말할 수 있다면 좋겠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마치 마약 빠는 것처럼 황홀해져서(물론 나는 마약을 빤 적 없어서 그게 얼마나 뿅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대가 당대에 명명하는 이름들이 있다. '당대'라고 썼지만, 대개 그 '당대'는 당대의 '빅마우스'거나 권력과 자본의 움직임이 '얼굴마담'으로 세운 하수인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는 그 이름들을 대체로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이름 붙이는 자'의 전략적인 프레임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웹2.0도 그중 하나다. 웹2.0으로 시대로 불렀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무슨 신화를 이야기하는 것 같은 비현실감마저 느껴지는 그 시절은 하지만 생각해보면 얼마 지나지 않은 그때다. 그 웹2.0을 대표하는 단어는 공유, 개방, 참여였다. 그 단어는 스스로 도취하게 하고 스스로 자뻑의 연못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는 나르시서스의 언어이기도 했다. 많은 이들에게 그랬다. 나도 그 자뻑맨 중 하나다. 인생을 망치는 방법은 늘 도처에 널렸다. 나는 그 자뻑이 내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를 견디게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자뻑(이라고 생각했던 누군가의 전략적 프레임)이 또 내 인생의 어리섞은 부분을 더 견고하게 했다고도 생각한다. 그래도 거기엔 일말의 양심(?)은 있었다. '엔드유저'. 웹2.0은 어쨌든 엔드유저에 관한 (표면적이고 가식적이나마) 존중이 있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민중적 관점이나 철학이 그래도 코딱지만큼은 남아 있었다. 나에게 그 엔드유저의 철학을 대표하는 건 '블로거' 혹은 '블로그'였다.

'공유경제'에 관한 김영준 님의 지적에 대체로 깊이 공감하고 동의한다. 공유경제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마법의 단어다. 그리고 그 단어와 더불어 또 하나의 마법의 단어가 있다. '4차산업혁명'이라는 단어다(참고하면 좋은 글: https://slownews.kr/61856).

그 둘의 의미론적 전략 기반은 디지털이 시대의 '상수'가 된 시대에 자본 권력을 확장하고 견고화하기 위한 대중적 위장(기만)을 위한 정경복합체의 레토릭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4차산업혁명이 (대한민국에서는) 귱유경제보다 더 최악인 건 그 기만성에 자본의 순수하기 짝이 없는 그 무지막지한 자기애와 그 자본과 한몸이 되어 연애하고 싶은 정책 관료의 망상이 겹쳐져서 느껴진다는 점이다(참고 하면 좋은 글: https://slownews.kr/72879). 정부에서 4차산업혁명 육성안이라고 하는 것들을 하나만 골라 제대로 살펴보시라. 그게 얼마나 기만적인 수사에 불과한지 담박에 느껴질 거다(참고하면 좋은 글: https://slownews.kr/71150). 4차산업혁명이라는 걸 무슨 정경복합체의 블루오션처럼 기업인, 정치인과 정책 관료들이 '전가의 보검'처럼 사용하는 모습은 대체로 씁쓸하고 대체로 코믹하다(대개 그냥 유행어 사용하듯 말하지 그게 무슨 의민지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사실 4차산업혁명이라고 말해지는 것들의 본질은, 지금까지 자본이 늘 그래왔듯, 새로운 시대의 지배적인  코드('디지털')에 결합해 어떻게 산업의 구조를 재편하고, 노동의 매커니즘을 재설계하면서 안정적으로 자본을 확장하고 축적하며 다시 확장하느냐에 있지 거기에 인간이나 공동체에 대한 전망이 있거나 '공유'라는 철학(?????????????)이 있거나 '혁명'(????????????????????)이라는 말이 가진 인간 공동체에 대한 진보적 역사관이 있는 건 전혀 아니다. 공유경제의 본질이 '엔드유저'의 자발적인 참여를 얼마나 조직화해서 영속적으로 그들의 참여(노동)를 삥뜯고, 그걸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알고리즘화하는 것이냐에 있다(여기에서 비인간적이라는 말은 인간의 노동이 덜 개입하는 방식으로라는 의미이지 통상의 윤리적 기준에 의한 표현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4차산업혁명의 본질에는 국가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승자로 등장한 디지털 기술 자본과 얼마나 자웅동체로 결합해서 표면적으로는 국가경제의 위상과 규모를, 실질적으로는 극소수 '신이 된 인간'의 권력을 확장하느냐에 있지 거기에 무슨 '파괴적 혁신'의 딜레마(가장 대표적인 건 고용없는 성장)에 관한 진지한 정책적 고민이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기본소득이나 소위 '복지국가'에 관해 집단적인 알러지를 내면화한 나라에서 공유경제나 4차산업혁명의 담론이 기업과 자본의 편에서만 일방적으로 집단 세뇌하는 것마냥 유통되는 건 큰 문제로 생각한다.

참고로 점점 더 고도화하는 디지털 독점 기업의 엔드유저 삥뜯기의 구조화와 이에 상응하는 자본의 극극극소수 집중에 대응하는 정책적 환원 수단이 기본소득이지 기본소득이 무슨 갑툭튀해서 세금을 나눠 먹는 그런 거 아니라는 걸 정말 시장의 할배할매들까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대대적인 정책적 캠페인이 조만간(?)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하는 편이다.

더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여기가지.

사족. 타다

나는 타다가 무슨 혁신이나 공유라는 말을 붙여야 하는 대단한 모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우리나라 사정에 부합하는 있을 수 있는 (사용자에게 좋은) 사업 모델로 생각한다. 하지만 타타에 짜증스러운 기존 운수업계 종사자의 마음도 충분히 공감이 되고, 반대로 타다 쪽에서 답답해 하고 화나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단순하게 직업 자유의 헌법적 가치로만 이 문제를 바라보거나 '공유경제'나 '4차산업혁명'이라는 아리까리하고 기만적인 수사로 이 문제의 논점에 물타기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열악한 전통 산업과 디지털 관리 기술에 기반한 새로운 서비스의 충돌이고, 그뿐이다. 정책이 개입하려면 무슨 지들도 제대로 모르는 아리까리한 4차산업혁명이니 공유경제니 이런 수사를 뒤집어 쓰고 개입하지 말고, 실제로 이 충돌이 초래하는 이익과 손해의 귀속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정책적으로 '재조정'되어야 하는지에 관해서만 고민하면 된다. (물론 그 안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타다가 공유경제인가? 그에 앞서 공유경제라는 건 도대체 뭔가? (참고하면 좋은 글: https://slownews.kr/53977))

그 관점에서 검찰의 기소는 타타 입장에서야 황당하고 억울하겠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기소였다고 생각한다. 박영선 장관이야 자기 부처(중소벤처기업부) 성격이 그러니까 그런 코멘트("검찰이 너무 전통적 사고에 머물러 있지 않았나 생각했다.")를 할 수 있다 치고 그런데 황당한 건 김현미 장관을 위시한 고위 관료들의 뒷북이다. 특히 김현미는 검찰 기소 과정을 뻔히 다 들여다 봤으면서 무슨 이런 뒷북("검찰이 너무 성급하지 않았나 생각")을 치는 건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