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최초 발행했던 글을 추고해서 옮긴다. 예외적으로 거기에 있던 글은 지우지 않는다.

무엇이든 해야 한다. 그것이 서툰 것이고, 실수투성이일지라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이제 막 한세기를 통과하고 있는 빨강머리 앤(1908년 6월 13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처음 책으로 태어난)도 그랬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것보다 좌절하더라도 무엇인가를 소망하는 것이 더 낫다고. 그리고 물론, 여전히, 나는 빨강머리 앤주의자다. (참고 . 1. 전시회 13∼18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가나아트스페이스에서 ‘빨강머리 앤’ 전시회. 02-725-9256. 2. EBS '다시 보는 명작만화 - 빨강머리 앤' 주중 매일 저녁 7시 30분. 일요일 10시에 주중 방영분 전부 재방송. 놓치지 마시라. :  )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사무엘 베케트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아주 따분하다고 알려진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 관한 이야기다. 우선 잡지에서 읽은 일화 하나. 난해하기 짝이 없는 이 연극에 열렬한 반응을 보낸 관객들이 있었다. 교양미 넘치는 연극애호가와는 전혀 거리가 먼 상관없는 사람들. 그들은 감옥에 갇힌 수감자들이었다. 그 죄수들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고 경악에 가까운 열광을 보여줬다. 마치 자신이 고도를 애타게 기다리는 고고와 디디가 된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고도'는 누구이고, 우리는 언제쯤 고도를 만날 수 있을까. 이 글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었던, 한 여자 아이를 몹시도 좋아했던, 어떤 날의 내가 썼던 글이고, 아직 고도를 만나지 못한 현재의 내가 여전히 쓰고 있는 글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무엘 베케트. Samuel Barclay Beckett
(아일랜드. 1906. 4. 13 ~ 1989. 12. 22.)
 

미친듯이 고도를 찾아서
- 의미 없는 세상에서 무엇이든 하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에서, 무엇이든 하려고 애써야 한다.
Ubi nihil vales, ibi nihil velis".
- Arnold Geulincx

 
고고와 디디는 애타게 고도를 기다린다. 나는 이제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를 이제 더 이상 기다리지 않으려고 한다. 이제 너무 지친 것이다. 이 글은 고도를 우연히 마추질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 떠나는 낭만적인 여행담이 아니다. 이 글은 오히려 고도를 찾아 헤매는 필사적인 모험담이다. 실은 이 글은 그냥 거짓이고, 그 거짓 속에 담겨진 일말의 진실이며,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왜 이 글을 다시 계속 쓰는가에 대한 질문이고, 그 질문에 다시 현재의 나로 답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고고와 디디에게 고도는 어떤 의미이며, 극을 보는 우리에게, 희곡을 읽는 우리에게 고도는 누구인가. 아무도 정답을 말하지 않았다. 아니 모두가 그 정답을 이야기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그것이 진실이라고 확인해주지 못했다. 바흐친의 어투를 빌자면, 고도란 무엇이며, 누구인가에 대한 모두의 목소리들, 그 의미들의 귀향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늘 새로운 태어나는 축제들은, 비록 그 축제가 허무가 가득한 죽음의 축제라 할지라도,  아직 우리를 설레게 한다. 그건 마치 내일처럼, 우리를 살게 하는 그 '내일'처럼 새롭다.
 
가다머의 제1명제처럼, 해석한다는 것은 ‘선입견’으로부터 출발하는 위태로운 게임이다. 절대적인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적인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절대적인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이다. 모든 예술은 자신의 영혼을 ‘전염’시키기 위한 일종의 책략이다. 예술이 그저 사랑과 진실과 순수의 다른 이름이라고 믿는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물론 나는 항상 행복과 불행 사이를 위태롭게 부유하고, 그렇게 떠돌며, 흘러가고, 또 다시 고이며, 넘치고, 숨는다.  

고고와 디디의 고도는 왜 오지 않는가. 그리고 그들은 왜 고도를 기다려야만 하는가. 고고는 말한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된다. 이미 허무에 포위 당한 것이다. 그러니 할 일이 없(7). "Rien
à faire” 다. 허무를 선택했다기보다는 허무에 선택당했다. 그렇게 세상에 던져졌으며,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하는 지겹고, 잔인한 숙명에 "할 일 없는" 채로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치명적인 것은 그들에게 의미가 더 이상 의미 있지 않다는 데 있다. 그들은 실패했으며, 그것이 어떻게, 왜 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무엇인가를 찾아가야 하지만 찾을 것 없는 세상에 살아야 하는 난처함. 그러나 세상은 그들을 항상 깨운다. “왜 잠 좀 자게 내버려 두지 않는 거야(17)”.

고고와 디디는 고목이 서 있는 황폐한 길 위에 있다. 그곳은 우리의 메마른 공포가 자리한 원형적 공간이다. 마치 우리 영혼의 가장 어둡고, 가장 쓸쓸한 그림자와 같은 풍경, 그 풍경 속에서 고고와 디디, 뽀초와 럭키는 서로 싸우고, 투정부리며,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기댄다. 그들은 개별적인 존재이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불가분인 한 몸이다. 그래서 그들이 보여주는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은 서로의 결핍에 대한 목마름인 것 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고고가 가장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21).

우리에게 신은 이미 없고, 의미는 이미 사라져버렸으며, 우리가 행하는 이 모든 우스꽝스러운 제스처, 몸부림, 그 어떤 것도 진정한 의미를 우리에게 전해주지 않으니까. 우리는 그렇다면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허무로 짓이겨진 앙상하게 메마른 풍경처럼, 저 고목이 있는 거기는 우리 영혼의 그림자와 그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태양이, 그러나 놀랍게도, 함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야 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음과 할 일 없음. Rien
à faire ..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고고와 디디는 그들 자신이 고도임을 알고 있다. 즉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란 그들 스스로가 자기로 되돌아가는 자기로의 귀향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고고도 디디도 그것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마치 암수 한몸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섞여 관계 맺고 있지만, 그 관계는 불완전하며, 각자의 결핍과 공허를 오히려 두드러지게 할  뿐이다. 그들이 결국 하나가 되더라도 세상이 그 진정성을 거절할 것임을 그들은 두려워한다.

하지만 그들이 용기없다고 비난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바보도, 실패자도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해야 하는 우리의 무기력함, 우리 자신의 어쩔 수 없음에 대한 표상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고목이 있는 그 길 위에서 지금도 고도를 기다리며, 우스꽝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늘 그랬듯, 이미 우리들이었을 뿐이다.

세상이 허무 그 자체이더라도 우리는 그 허무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신 없는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는, 하지만 구원을 갈구한다. 그러나 그 구원이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걸 알면서 그 구원을 기다린다는 것은 절망적이다.  우리 안에 있는 고고와 디디는 불안에 가득한 모습으로、때로운 애처롭도록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 구원을 기다린다.

그러나 ‘기다림’은 자기를 찾는 ‘떠남’과 함께 할 때에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우리 안에 있는 고고와 디디, 그들이 온전한 스스로를 찾을 때, 서로 다른 의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서로 조화롭게 관계 맺을 때 고도는 비로소 우리 안에서 살아난다. 그리고 디디의 말처럼 “우리는 구원 받(141)”을 것이다.

고고는 “바지를 올려 입(141)”는다.
고고와 디디는 그들의 고도를 찾아 떠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들은 움직이기 않고 서 있다(141)”.

이제, 우리가 떠나야할 차례다.    

 


[참고문헌]
1.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용경식 역, 서울: 하서출판사, 1993.
2.황훈성, <베케트의 삶과 예술>, [외국문학](93년 봄호), 서울: 열음사.


[참조]
1. 본문의 ()안 숫자의 출처는 위 참고문헌(1.)의 페이지.
2. Arnold Geulincx . 네덜란드의 철학자(1624 ~1669).
3. "Rien a faire. 할 일 없음" 에서 a 위에 [악상 그라브 (accent grave: `)]가 표기되지 않았음. (추가. 엔디님의 도움으로 표시. 고맙습니다. : )

* 발아점
"... 몸의 실천은 물질적인 것 속에서 만나는 신성한 것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면서, 종말론적 희망을 부분적으로 먼저 맛보는 일이어야 한다." (주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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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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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엔디 2008/05/16 13:29

    임영웅 연출의 《고도…》는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무척 재미있습니다. ^^ 부족한 글이지만 시간이 나시면 한 번 읽으시고, 제 글이 못 따라잡는 극단 산울림의 연극을 언제 보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http://endy.pe.kr/30
    http://endy.pe.kr/31

    그리고 '아-악상그라브'는 여기(à) 있습니다. ^^
    (원문을 보존하시려고 수정하시지 않으신 것 같기도 하지만요.
    불어 표기를 자주 하신다면 캐나다 자판을 윈도에 설치하는 걸 추천합니다. ^^)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8/05/16 14:02

      ㅎㅎ
      항상 친절하고, 유용한 논평에 깊은 고마움을 전합니다. : )

  2. 민노씨 2009/01/29 02:54

    http://www.lucas.egloos.com/4794391

    위 여형사님 글에 댓글 입력이 안되서 임시로 여기에 옮겨놓는 거임! ㅡㅡ;;;

    ~~~

    이 책, 여형사님께서 읽은 민음사 버전은 아니고, 좀 마이너한 뉘앙스의 어떤 출판사 버전으로 '급통독'했던 기억이 납니다. : )
    이 희곡에 대한 리포트 과제가 있었거든요.
    무슨 교양수업이던가 그랬는데, 과제 때문에 도서관에서 이 책은 바로 대여 열풍이 일었구요.
    나름 급짜깁기+상상력으로 리포트를 완성한 다음에 찬찬히 다시 한번 훑어봤던 기억이 나네요.
    역시나 이해 안되는 내용은 건너뛰고 통독이긴 했지만요... ㅎ

    아무튼 트랙백 쏩니다. : )
    아, 정말 오랜만에 트랙백이로군요. ㅎ


    ~~~

    하서 출판서였고만요...;

    ~~~~

    이룬, 트랙백도 안보내지네요..;;;;

    perm. |  mod/del. |  reply.
  3. 민노씨 2009/01/31 07:35

    * 사소한 추고(문단 나누기 정도)
    * 엔디님의 à 이제야 추가 등록. ㅎㅎ

    perm. |  mod/del. |  reply.
  4. 여형사 2009/02/02 10:53

    정성스런 댓글과 트랙백 감사해요.

    죄수들 상대로 한 공연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는 점은 상당히 흥미롭네요. 책이 아닌 연극으로 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요즘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려본 적이 없어서 인지... 아직 '고도'가 잘 와닿지 않는데 살다가 문득 '고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일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9/02/02 14:00

      별말씀요. : )
      그런 날이 오는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날이 오시길 바라봅니다. ㅎ

  5. 민노씨 2012/09/02 02:42

    제주도에 있는 아름다운 친구와 베케트 이야기를 하다가...
    아주 오랜만에 다시 퇴고.

    perm. |  mod/del. |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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