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란 말처럼 지금 우리에게 쉽고도 어려운 말이 또 있을까. 이건 마치 연애라는 말처럼, 사랑이라는 말처럼, 인간이라는 말처럼 어렵다. 특히나 노무현과 김대중이 떠나간 마당에, 그리고 아직 그 거대한 상징이 채 빛을 바라기도 전에, MB는 박통처럼, 전통처럼 미디어를 동원해 꽃단장, 서민풍으로 이미지 쇄신에 한참(김종배)이다. 그래서 지지율도 꽤 높아졌단다. 이미지가 무섭긴 무서운건가 보다. 그래서 국회에선 그 관련법들 날치기 하자고, 대리투표에 재투표라는 기상천외한 지랄육갑 파티를 했나 싶기도 하다. 상황이 이러니, 민주주의란 말. 정말 어렵다. 그러다가... 어떤 글을 읽었다.
그건 말이라기 보다는 몸이다. 민주주의는 머리로 인식해야 하는 말이나 주장이나 주의가 아니라, 몸으로 깨닫고 실천해야 하는 행동강령이다. 그것을 육화하지 않으면, 그것을 체화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언제나 말로만 존재하는, 주의와 사상으로만 존재하는, 이미지와 상징으로만 떠도는 허깨비 같은 민주주의에 내내 둘러쌓여 있을지 모른다. 물론 말과 몸은 서로 딴 것이 아니지만, 이제는 말에서 몸을 꺼내고, 몸에서 말을 꺼내야 한다. 그렇게 실천으로 옮길 일이다. .... 오늘 새벽, 문득 홍세화 칼럼을 읽다가 김대중의 목소리를 들었다. 칼럼에 정말 좋은 말들이 참 많았지만, 나에겐 칼럼 서두에 있는 짧은 두 줄이 가슴에 와 닿았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좋다.
"하려고 하면 너무 많다."
* 보유.
1. ... 몸의 실천은 물질적인 것 속에서 만나는 신성한 것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면서, 종말론적 희망을 부분적으로 먼저 맛보는 일이어야 한다." (주낙현) 이 말은 마치 민주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행동강령이라고 말과 짝처럼 나에겐 느껴진다. 그것은 종교인으로서의 기도이자, 성찰이 그 몸에 스며들어 내는 목소리이리라.
2. 홍세화 칼럼에 대한 단상.
민주주의는, '주의'라는 잘못된 번역과는 달리,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행동 강령이다. 어떤 정신도 입바른 주장도 아니라, 몸에 익힐 것이다. 그러니 수련하고 도 닦듯 해야 한다. 2mb 으로 박통을 되살린 건 이런 수련이 부족했던 탓이다.
- 주낙현의 트위터. 2009. 8. 23.
그건 말이라기 보다는 몸이다. 민주주의는 머리로 인식해야 하는 말이나 주장이나 주의가 아니라, 몸으로 깨닫고 실천해야 하는 행동강령이다. 그것을 육화하지 않으면, 그것을 체화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언제나 말로만 존재하는, 주의와 사상으로만 존재하는, 이미지와 상징으로만 떠도는 허깨비 같은 민주주의에 내내 둘러쌓여 있을지 모른다. 물론 말과 몸은 서로 딴 것이 아니지만, 이제는 말에서 몸을 꺼내고, 몸에서 말을 꺼내야 한다. 그렇게 실천으로 옮길 일이다. .... 오늘 새벽, 문득 홍세화 칼럼을 읽다가 김대중의 목소리를 들었다. 칼럼에 정말 좋은 말들이 참 많았지만, 나에겐 칼럼 서두에 있는 짧은 두 줄이 가슴에 와 닿았다.
“나쁜 정당에 투표하지 말고, 나쁜 신문을 보지 않고, 집회에 나가고,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하다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이라도 할 수 있다. 하려고 하면 너무 많다.” (김대중)
- 홍세화, 나쁜 정당, 나쁜 신문 (2009.8.25.)
아주 작은 일이라도 좋다.
"하려고 하면 너무 많다."
* 보유.
1. ... 몸의 실천은 물질적인 것 속에서 만나는 신성한 것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면서, 종말론적 희망을 부분적으로 먼저 맛보는 일이어야 한다." (주낙현) 이 말은 마치 민주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행동강령이라고 말과 짝처럼 나에겐 느껴진다. 그것은 종교인으로서의 기도이자, 성찰이 그 몸에 스며들어 내는 목소리이리라.
2. 홍세화 칼럼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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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창으로 순간 이동!민주주의를 육화하기. 그런데 '행위'란 본질적으로 말하기이고, 자신을 드러내기라는 아렌트의 지적은, 도리어 우리가 제대로 말하기조차 못하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정말 할 수 있는 건 많겠지요.
적절한 지적이십니다.
책읽고, 말하고, 글쓰는 것이 마치 실천의 반대말, 행동의 반대말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리고 그런 일반적인 감수성의 한 영역이 저에게도 물론 존재합니다만, 이 모든 것들은 실천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좀더 내적 긴장을 갖는 목적적인 실천, 그것이 아주 작은 것이라도 말이죠, 그것이 이제는 필요하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어요. 가장 좋은 것은 그런 시민의식이 일상에서 유희로써 피어나는 풍경이겠지만... 한국적인 상황에선 그게 그다지 쉽진 않을 것 같습니다.
계몽이란 방법은 그 '추진력 없음'으로 인해 실패할 확률이 크죠. 많은 사람들은 민주사회를 실현하기보단 민주주의가 실현된 사회에 살고 싶어합니다.. 계몽보단 '시저'같은 존재가 나타나길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새 시대를 여는 방법이 시저가 됐던 계몽이 됐던 상관없이 진정 바라는 것은 이후부턴 시저도 계몽도 필요 없도록 사회를 잘 제도화하는 것입니다만.. (그게 더 어려운 건가요?..--;)
저는 계몽 그 자체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아니고요. 계몽 정말 필요하죠. 다만 계몽이라는 이름으로 무거운 권위주의, 엄숙주의의 그림자를 끌고 와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 ^
민주주의라는 명제에 반드시 필요한 두 글자, 조율..
우리만의 민주주의,,그들만의 민주주의가 아닌
모두의 민주주의,,격이 없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려면
행동하는 조율의 중요성은 누구나 공감할 겁니다
공공장소에서 큰소리로 휴대폰을 통화하는 사람에게
인상만 찌푸리는 것보단, 다가가서 기분 나쁘지 않게끔
조용해 줄 것을 부탁한다면 모두에게 이롭듯이요.
근데 휴대폰 통화하던 사람이 열 받아서 그 휴대폰으로
머리라도 한대 친다면........??
그리고 정중히 부탁하러 간 사람이 나처럼 다혈질이라
쌈박질이라도 벌이면 뭐,,개판 5분전 되는 거죠..^^
아니면 주위의 사람들이 함께 무시칸,,그 사람한테 주먹질이라도
한다면 같이 무시케질테고..그럼 개판되는 거죠
-맞아도 도와줄 확률은 지극히 낮지만 ㅡㅡ
그렇다고 계속 혼자 떠들게 놔둘 수도 없고,
-갓난아이라도 울어대면 더 시끄러워 질테니까요!
휴대폰 통화자가 온순한 사람이기만을 바랄수도 없고..
방법은 한가지,,부탁하러 간 사람이 주먹으로 한대 맞더라도
웃을 수 있는 내공을 쌓은 사람이라면 어렵더라도
문제해결의 빛은 보일겁니다..
누가 잘못인지에 대한 판단은 분명해지므로..^^
문제는 이 조율자에 대한 사람들의 시각이죠!!
모두을 위해 몸을 움직인 사람에게 호응만이 아닌,,
뭐야,,왜 저래..잘난 척 하냐??
이런 식이라면...........
정말 공감가는 말씀이세요. : )
조율에 대해 말씀하시니 문득 한영애의 '조율'이란 노래가 듣고 싶어지네요.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번 해주세요." (이게 가사가 맞나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