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예전에 필넷에 썼던 글인데, 옮겨옵니다.
[조선일보 기고자들], [역사적 심판자로서의 독자]의 문제의식과 겹치는 영역이죠.
최근 선거법과 관련해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요.
추고는 최소한으로 했습니다.



지식인과 참여
- 실존주의 선언의 의미와 52년 논쟁




Ⅰ.
우리는 실존주의의 몇 가지 선언들을 기억하고 있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이런 사르트르의 선언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Cogito Ergo Sum, 나는 회의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부터 비롯된 이성중심의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실존주의,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르트르의 노벨상 거부로 인구에 회자되었던 실존주의, 사르트르의 맑시즘에의 [전향]으로서 다시 한 번 의문시 되었던 실존주의, 그리고 사르트르/까뮈 논쟁, 사르트르/레비스트로스 논쟁으로 이슈화되었던 실존주의.


우리는 실존주의에 대한 교과서식 정의와 마치 스포츠 신문의 스캔들과도 같은 풍문에 어느 정도 길들여져 있다. 그러나 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우리는 그러한 ‘메마른’ 정의와 풍문으로부터도 동떨어져 있다. 이 글은 이 모든 무관심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하려고 한다. 사르트르의 표현을 풍자적으로 빌자면, ‘실존주의는 우리에게 처단되었다’(“우리는 자유에 처단되었다”고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로울 수밖에 없음을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글은 실존주의선언, 즉 ⑴“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⑵“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짧은 문장, 알 듯 모를 듯한 그 두 문장에 대한 상식적인 접근이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같았으나 결국 정반대 편에서 서로를 공격했던 ⑶사르트르와 까뮈의 1951년 [반항적 인간]을 둘러싼 입장차이(이하 [논쟁])를 아울러 살펴보고자 한다.


세계관으로서의 철학과 그 철학을 산출한 현실(그 역학)은 떼어놓을 수 없다. 이는 고종석식으로 말하자면 한쪽이 산모라면 다른 한 쪽은 태어날 / 혹은 태어난 아이이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의 역사적 함의와 그 (과거의) [논쟁]를 검토함에 있어 그 당대의 현실적인 역학은 당연히 고려되어야 한다. 이는 지식인이란 현실정치에 대해 어느 한 편에 설 수 밖에 없다는 자명한 명제에 대한 확인 과정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확인과 검토는 지금/여기에서 실존주의가 그저 과거의 유행이 아니라, 여전히 가치있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마치 우리문단의 [순수:참여]논쟁을 보는 듯 한 까뮈/싸르트르 논쟁은 [순수:참여]논쟁이 “가짜 논쟁”인 것처럼, “가짜 논쟁”이다. 그것이 가짜인 이유는 자명하다. '참여'아닌 문학은 그 자체로 존립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흡사 귄터 그라스에게 “[참여문학]이란 말을 싫어하신다면서요?”라고 물었을 때, 귄터 그라스가 던진 멋진 한마디, “문학이란 '이미' 현실에 참여되어 있습니다”라는 대답처럼, 그 출발점부터가 잘못된 논쟁이었던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위의 세가지 논점을 나름대로 분석하고 재구성하는 것이다. 우선 실존주의선언의 의미를 살펴 보자.


Ⅱ.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신 과 인간이 시이소오를 탄다면, 인간은 그 시이소오에서 튕겨져 나갈 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티끌에 불과하다. 인간은 신과 비교한다면 하나의 이미지이며, 하나의 그림자이다. 그러나 인간과 짐승이 시이소오를 탄다면 그 짐승은 조금 전에 탔던 신과 인간의 시이소오에서의 인간과 마찬가지의 존재일 것이다.


그 시이소오에 본질과 실존(혹은 본질과 현상)을 태우자. 우리가 말하는 실존이 인간이라는 일시적이며, 영원하지 못한 ‘가능성’의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전제한다면, 신 앞에 선 인간, 본질이라는 영원의 차원 앞에 선 인간은 하나의 순간이며, 무의미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그것을 전복한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선언은 서구 철학의 형이상학을 부정하며, 그것을 극복하고자 한다.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언했다면, 사르트르는 니체의 정신적 유산 위에서, 니체의 전언을 더 밀고 나아가, 인간의 탄생, 그 진정한 출발을 선언하고 있다. 인간의 실존은 즉, 가능성이며, 끊임없는 선택이며, 절대적 자유이며, 소멸할 수 없는 (영원의) 순간들이다. 그는 자신의 “본원적인 선택”을 통해서 본질에 도달하며, 그것을 극복한다.


그렇지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나의 발명품’이라는 지적을 긍정한다면, 그래서 인간 존재란 하나의 [아이디어]에 불과하다는 현대철학(미셀 푸코)의 뼈아픈 지적을 새긴다면, 우리에게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선언은 그 선언이 등장했던 시대와의 상관 관계를 떠나서는 의미를 획득하기 어렵다. 푸코도, 실존주의도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회의를 그 철학적인 기반으로 한다. 그래서 한쪽은 인간이라는 그 본원적 자유로서의 선택 가능성에 집중했다면(사르트르), 다른 한쪽은 인간 이성자체를 불신하는 것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푸코).


실존주의는 2차 대전의 폐해가 가져온 패배주의와 극단적인 이성숭배를 극복할 수 있는 자기 반성과 인간의 한계적 상황을 인식하고, 인간에 대한 희망의 가능성을 제시한 철학이었다. 실존주의는 2차 대전의 절망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희망을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Ⅲ.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휴머니즘]이라는 너무도 익숙한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휴머니즘을 인간에 대한 사랑, 더 나아가 그 확대라고 말할 수 있다면, 사랑에 대한 확장은 공동체에서 실천하는 인간의 참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참여]라는 말의 의미를 통해서 사르트르가 말하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말의 의의에 좀더 가까워 질 수 있다.


그 의미에 다가서기 위해서 그 전제로서 우리는 [실존]이라는 말과 바꾸어 쓸수 있는 말, [선택]이 라는 말과 만난다. 우리가 [선택]이라는 말을 그 말 자체의 순수하게 사전적인(그러나 그러한 객관적 순수라는 말은 얼마나 거짓인가?) 의미에서 구출하여, 사회적 함의를 갖는 말로 ‘번역’할 수 있다면, 나는 [선택]이란 말을 사회라는 공동체의 정치사회경제적 구조 속에서의 선택이라는 말로 풀어서 구체적으로 받아들여야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선택]한다는 것은 선택하지 않은 무수히 많은 것들을 배제한다는 의미이며,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본원적인 선택의 궁극적 목적을 향해 자신의 삶을 설계한다는 의미이다.


[선택]이라는 말의 추상성을 조금만 구체화시켜 보자. 우리는 정치적인 선택을 강요받고 산다. 그건 불가피하다. 어떤 사회에나 정치적인 체제가 있고, 그 정치체제와 경제체제 속에서 사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행위일 수밖에 없다.


아도르노가 순수 서정시의 정치성을 그 순수 서정시의 ‘비정치성’에서 찾은 것처럼, 우리의 정치적 무관심은 기존 체제에 대한 옹호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그러니 그 '참여하지 않음'의 기호로서 (그 시스템의 일부로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소극적인 참여이다. 그 소극적인 참여에 대한 거부, 적극적인 참여야말로 사르트르가 주장하는 실존의 발현이 된다. 그것을 사르트르는 [앙가주망 engagement]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사르트르라는 현대 철학의 거목을, 아직까지 구태여 기억하는 이유, 만약 나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앙가주망 engagement]이다.


우리는 사르트르의 [앙가주망 engagement]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진지하게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정치가 있고, 공동체가 있는 시간과 공간이라면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질문인 것이다.




사르트르-2.jpg까뮈.jpg

사르트르 [Sartre, Jean-Paul, 1905.6.21~1980.4.15]
카뮈 [Camus, Albert, 1913.11.7~1960.1.4]



Ⅳ. 사르트르 vs 까뮈
사 르트르와 까뮈의 10년 우정을 깨뜨려 버린 사건은 1951년 10월 까뮈가 발표한 [반항적 인간]의 출간이다. 사르트르와 까뮈의 정치적 지향의 극단적인 변별점을 보여주는 [반항적 인간]을 둘러싼 [논쟁]은, 그러나 그리 생산적이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 ‘다툼’의 상당부분은 까뮈의 사르트르에 대한 인간적인 배신감으로부터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감정적인 찌꺼기를 모두 거두고 우리가 그 [논쟁]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판단이다.


우선 [반항적 인간]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논쟁의 시발점이 된 [반항적 인간]의 전언은 극단적인 반항의 정신이다. 까뮈는 “혁명은 하나의 사회 질서가 다른 또 하나의 사회 질서에 대체된 것”이며, “모든 사회 질서란 본질적으로 부당하며 억압적”이고, “따라서 윤리적 순수성과 우월성은 반항 쪽에 있다”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역사적인 전망 자체를 거부하고, 기성질서의 허구와 기만을 전복하는 혁명의 가능성까지를 폐기처분하는 맹목적인 반항이다.


그것은 감상에 젖은 무정부주의에 다름 아니다. 까뮈는 기득권을 대체하고, 그것을 전복하는 저항과 혁명도 필연적으로 또 다른 ‘권력’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까뮈의 반항은 모랄리스트로 서의 극단적인 반항이다. 인간을 고립적, 개체적으로 판단한다면 까뮈가 보여주는 끊임 없는 반항을 통한 자기 반성, 그 윤리적인 지향에 대한 고민과 치열성에 동감을 표시할 수 있겠지만, 현실 정치라는 선택과 배제의 잔인한 매커니즘 속에서 판단한다면, 까뮈의 반항은 ‘순진한’ 감상주의의 차원으로 추락하고 만다.


사르트르가 이끌었던 [현대紙]에서 [반항적 인간]에 대한 서평을 썼던 장송의 지적처럼, 까뮈의 [반항]은 “이 세계 속에서 무엇이건 도모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세계의 흐름’을 거부”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문단의 [순수문학:참여문학]논쟁을 기억하고 있다. 김수영과 이어령이 치열하게 싸웠던 [순수문학 : 참여문학] 논쟁에서 이어령은 문학이 수단이 되고, 정치의 시녀가 될 수는 없다고, 순수문학을 옹호했지만, 귄터 그라스의 지적처럼, 문학이란 ‘이미’ 현실에 어쩔 수 없이 ‘참여 되어’ 있다. 그것은 아도르노의 지적과도 일맥상통하며, 사르트르가 까뮈에 대해 지녔던 불만과도 맥을 같이 한다.


까뮈는 혁명에 대한 ‘반항’을 주장한다. 공상과 관념의 영역에서라면, 그런 지고지순한 지점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현실에서는 당파성과 자신의 입장, 그 흔적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역설적지만, 이어령이 초대 문화부장관에 취임하면서, 자신의 주장과는 ‘괴리’를 보여주는 친권력적, 정치적 성향을 보여준 것처럼, 사르트르가 거부했던 노벨상을, 까뮈는 순순히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이 주장했던 '반항'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다.





참고 문헌

0. 까뮈, [반항적 인간], 읽긴 읽었는데, 정확히 누가 언제 번역해서 어떤 출판사에서 출판했는지 기억 안남. ㅡㅡ;
1. 김화영, <까뮈와 사르트르의 논쟁>, [사르트르의 문학적 세계], 김치수/김현 편, 문학과 지성사, 1989.
2. S.U. 주이데마, <사르트르>, [현대 사상의 거목들], 주이데마 외 2인, 이창우 역, 종로서적, 1983.
3. 황지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 중에서 '이어령과 김수영의 논쟁'에 관한 어떤 구절.
4. [브리태니커
세계대백과사전]
5. [두산 세계대백과사전]
6.
http://deer.sangmyung.ac.kr/~cjpark/frame.htm.




트랙백

트랙백 주소 :: http://minoci.net/trackback/129

댓글

댓글창으로 순간 이동!
  1. nob 2007/06/28 04:59

    블로깅 중에 들렸습니다. 내용이 상당히 어렵습니다만 글 도중에 알베르 까뮈 내용이 있어서 댓글 남깁니다. 근래에 단두대에 대한 성찰.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어서(다 읽진 않았지만) 알베르 까뮈 얘기가 나와서 반가워서 댓글 남깁니다. 아 그리고 곤조 저널리즘이란게 뭔가요?

    perm. |  mod/del. |  reply.
  2. 가즈랑 2007/06/28 16:38

    민노씨께.
    "그러나 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우리는 그러한 ‘메마른’ 정의와 풍문으로부터도 동떨어져 있다."
    요부분은 딱 저에게 맞는 소리네요. 학교 다닐 적 선생님 가운데 한분이 자주 이야기하셔서 실존, 실존주의 라는 말에 대해서 참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단 한번도 이거다 싶은 말은 없었고, 왠지 주변부만 찔러대던 기억만 남았거든요. 제대로 알지도, 그렇다고 모르지도 않은 상태로 여태껏 (멀쩡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하. ㅡㅡ;
    이 글, 실존주의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읽는다면 참 시원하게 읽히겠는데..
    꼭 기억해두었다가 참고문헌으로 올려주신 책 구해서 다시 읽어볼께요. ^ ^

    덧) 우선 당장 궁금한 것. 일전에 권해주신 '나와너'요것도 실존주의와 관련이 있는 것인가요?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7/06/28 22:52

      겸손이 과하십니다. : )

      그런 존재의 불완전성 역시나 실존적으로 느껴지는데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저는 훨씬 더 심하죠.. ㅡㅡ;

      이 글은 실존주의에 대한 정치한 이해, 깊이있는 인식에 바탕해서 쓰여진 글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저 중학생 정도의 고민과 궁금증을 갖고 사르트르의 선언이 갖는 의미, 그리고 까뮈와의 논쟁을 제 나름으로 풀어서 정리한 글에 불과해요.

      덧.
      마르틴 부버를 실존주의 철학자로 '분류'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그건 전혀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구요. 솔직히 저는 잘 모릅니다. ^ ^; 다만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란 말을 직접 하지만, 프랑스 (탈)구조주의 철학자들, 혹은 해체주의 철학자로 '분류'되는 미셸 푸코나 데리다 등등은 그런 평론가들의 쉬운 '분류'에 자신이 속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 같은데요. 부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해보긴 합니다.

      논평과 질문에 감사드립니다. : )

  3. login 2009/05/21 14:14

    가벼운 마음으로 댓글 남겨야 할듯 해서.. 음.. 사실 무슨 내용인지 잘 이해가 안되는군요. 어렵습니다. ㅠ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9/05/21 20:04

      제 표현이 부족하고, 앎이 모자란 탓입니다..ㅠ.ㅜ;

가벼운 마음으로 댓글 한방 날려주세요. : )

댓글 입력 폼
[로그인][오픈아이디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