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이 글은 예전에 썼던 글을 좀 많이 생략하고, 추고한 글입니다.
[조선일보 기고자들]에 대한 관련 보충 포스팅 성격이구요.
약간 긴 글입니다.



0. 정치와 문학

저는 딱히 문학이나 저술활동이 아니더라도 '정치적'이지 않은 행위는 '거의' 상상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또 정신 그 자체를 업으로 삼은 문인들에게, 저자들에게 '정치적'이지 않은 액션은 '더 더욱'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명징하게 지적하는) 아도르노의 논의를 쫓자면, 아도르노는 '서정시의 정치성'은 그 서정시의 '순수성'에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하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 봅니다.


1. 서정시의 정치성 (아도르노의 인식을 빌어)

시가 그 시대와 동떨어진 '우주적 질서' '영원불멸한 진리'를 노래한다고 저는 믿지 않습니다. 인간 정신은 어쩔 수 없이, 그 당대를 '숙주'로 삼아 자랄 수 밖에 없으니까요. 정신이 그 당대의 시대적 조건과 무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거죠. 인간은 역사적인 존재이면서, 또 동시에 실존적인 존재입니다. 그 시대에 적극적으로 투항하든, 혹은 그 시대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든, 그 양태와는 전혀 별개로요.

거듭 강조하지만, 이미 인간은 그 시대에 '던져져' 있습니다.
따로 홀로 존재할 수 없죠.
물론 로빈스 크루소는 제욉니다.

그 시대는 그 시대를 지배하는 세계관(지배 이데올로기)이 있고, 그 지배적 관념이 당대의 사람들에게 '작용'하고 있다면, 정신노동에 종사하는 '저자들'은 그 '작용'에 '이미' '적극적으로' 관여되어 있습니다. 그 시대를 지배하는 작용이 '일본 제국주의'라면, 서정시를 쓰든, 정치적인 저항시를 쓰든 그는 그 '제국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되어 있는 거죠.

"문학은 이미 현실에 참여되어 있다"

귄터 그라스의 지적은 이런 맥락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이미 참여되어 있는 정신적인 산물로서의 '문학작품'은, 구태여 도식적으로, 이해를 위해 거칠게 말하자면, 그 지배적 세계관을 인정하거나, 거기에 저항하거나 그 둘 중 하나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객관성, 중립, 순수성.. 이거 다 말장난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개별 작품들의 '진실'을 이렇게 이분법으로 쉽게 논할 수 없다는 점을 충분히 인정합니다. 서정시를 쓰든, 치열한 저항시를 쓰든 그 자체의 '주제와 상징'과는 별개로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그 시대에 작용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이것으로 충분히 '정치적'입니다.
 

2. 작품의 상대적 자율성 문제 (마르쿠제)

문제는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에 사는 시인이 반드시 (표시적인, 노골적인) 저항시를 써야 하는가, 라는 질문일 것입니다. 저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가 자주 인용하는 마르쿠제의 진술을 빌어서 제 견해를 대신할까 합니다. 

예술의 정치적 잠재력이란 오직 그 자체의 미학적 차원에 달려있다. 실천에 대한 예술의 관계는 냉혹하게도 간접적이고, 중재되고, 좌절된 것이다. 좀더 즉각적으로 예술작품이 정치화되면 될수록 그것은 갈등에 대한, 변화의 급진적이고 초월적인 목표점에 대한 힘을 축소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브레히트의 교훈적인 희곡에서보다는 보들레르와 랭보의 시 속에 좀더 많은 변혁 가능한 잠재력이 있다고 하겠다.

- 허버트 마르쿠제, '미학의 차원' 서설 중에서.

이렇듯 작품의 내재적 진실은 그 피상적 표피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육사가 저항시를 썼기 때문에 서정주보다 좀더 존경을 받아야 하고, 서정주는 한가롭게 서정시를 썼기 때문에 덜 존경을 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 아니죠.

저 역시 그 개별 작품의 '진실'을 함부로 '결정'하는 것은 성급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은 야만적이고, 천박하기까지 합니다.


3. 작가와 역사의식

다만 어떤 작가와 작품을 서로 다른 것으로 분리할 수는 없을 것이며, 그 작가(작품)을 역사와는 별개의 '순수한' 시공간적 초월 상태로 놓아둘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서로 동일하지도 않지만, 별개도 아닌 존재들입니다.

시인은 그 시대정신 자체를 구현하는 존재들입니다.
모든 존재들이 그렇겠지만요.
시인이라고 예외적으로 그 시대와 '별개'로 산신령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 시대 안에서 평가받고, 작용하고, 영향을 미치죠.

다만 '그 당대를 벗어난' 작품들이 가능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남습니다.
즉, 서정주가 행한 친일행적을 모르는 독자들이 읽는 '국화 옆에서'라는 시는 과연 어떤 의미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입니다.

저로선 텍스트(국화 옆에서)를 둘러싼 의미는 그 텍스트 자체만으로는 읽힐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텍스트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그 텍스트가 만들어진 시대를 생각할 수 있을테고, 서정주라는 친일작가 얼굴이 떠올려질 테고, 그런 '문맥'이 그 텍스트에 '직접적으로'(간접적으로 아닙니다) 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텍스트 해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문맥'입니다.

좀더 도식적으로 설명드리면, 텍스트(해석)는

  1. 텍스트 그 자체(거기에 담겨 있다고 믿어지는 작가)
  2. 그 텍스트를 둘러싼 문맥 (역사, 다른 텍스트들과의 관계)
  3. 양자의 모순과 균형과 역학을 '능동적으로' 읽어내는 독자

위 세 가지 해석 요소들의 삼위일체라고 생각합니다.
(텍스트 해석의 삼각형. 딱히 이런 용어가 있는지는 모르겠고, 제가 보기엔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특히 위 2. 문맥 요소에서, 텍스트는 그 텍스트가 태어난 '출생의 비밀'을 영원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비밀이 신비로운 작용을 하기도 하고, 그 텍스트 자체의 의미에 부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업보'입니다.

아무리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가 훌륭한 시라고 할지라도, 그 텍스트의 진실은 일제의 피비린내 나는 폭력을 외면하고, 도피하고 있는 시라는 '정당한 선입견'(저는 이것을 '역사적 심판자로서의 독자'라고 부르고 싶은데요)이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4. 결

황지우가 지적했듯이 김수영-이어령의 '순수문학 - 참여문학'은 가짜 논쟁입니다.
이미 순수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할 수 없는 허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순수문학을 옹호했던 이어령씨가 초대 문화부 장관이 되었다는 사실로써, "그의 순수는 도금"이었다고 지적하는 황지우에 저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광복 이후 서정주씨가 지배한 우리 문단은 어떻습니까?
이 역시 서정주의 '순수'가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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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 역사적 심판자로서의 독자 - 순수 문학이라는 기만에 대하여, 를 읽고

    Tracked from 로망롤랑의 꿈 2007/06/21 09:13 del.

    순수문학 자체가 어불성설이고 기만이라면 참여문학은 지향하지 않아도 노력하지 않아도 드러내지 않아도 현실과 정치에 자연스레 어우러진 문학이 되겠죠. 당대의 정치, 경제, 문화적 현실과 동떨어진 작가가 있을 수 없다는 것과 순수문학을 지향하거나 그러한 성격을 띄는 문학 또한 그러한 현실과 별개가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순수문학이란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하지만 이 부분에서 작가가 현실 세계와 섞이는 부분으로 인해 텍스트 역시 그러하리라는 생각..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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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astRain 2007/06/20 10:22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도 문학은 그 시대와 함께 살을 섞고 같이 뒹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문학을 저는 더 좋아라 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간혹 예외도 있는 듯 합니다.
    박상륭 선생의 작품들,
    예컨데 '죽음의 한연구' 같은 작품은 이미 시대나 정치 등을 초월해버린 작품이란 말이죠.
    그리고 그러한 작품을 읽어보면 순수문학이라는 단어가 허위가 이님을 느끼기도 합니다.
    방현석의 80년대 작품들에서만 진정성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더란 말이지요.
    (냉정하게 이야기 해서, 극도로 현실 참여적이었던 한국 문단의 80년대 작품들은 과연 진보적인 문학이었을까요?)

    사실 저같은 경우에도 이런 저런 생각을 골머리 싸매고 해도 결국, 리얼리즘으로 답이 나오긴 합디다.
    그래도 확실하게 칼로 무 자르듯이 확실한 답은 못내리겠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런 아리송한, 단언키 어려운 것들이 문학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요소더란 말이죠.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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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7/06/21 00:59

      저는 우리나라의 80년대 문학에 대해서도 그 미학적 성취가 여전히 작품의 가치평가에 대해 큰 표준이 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일군의 민중문학진영에서 많은 작품들을 생산하긴 했지만.. 개인적으론 황지우나 이성복, 기형도, 이청준이나 김현의 비평들에 크게 공감했더랬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동해방문학을 중심으로 눈부신 성취와 활동을 보여준 박노해나 이정로(백태웅) 역시 큰 역사적인 의미와 더불어 문학적 형식, 그 미학 자체에 '충격'을 주는 행적을 남겼다고 평가해요.

      다만 예시하신 방현석씨의 경우, 혹은 그 반대편의 예시로서의 박상륭씨의 경우는 그다지 큰 관심을 갖지는 않았습니다. ^ ^ 방현석씨으로 예시될 수 있는 일군의 문학집단의 경우에 문학을 통해 너무 과도한 메시지만을 강박적으로 표현해내려고 애썼다는 평가가 많더군요. 물론 제 개인적인 체험치가 없는 상태에서 쉽게 말할 수는 없는 부분이죠, 반대로 박상륭의 그 난해한 엄숙주의 역시 저로선 그다지 높게 평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역시 제 편견임을 인정하는 전제에서요.

      개인적으론 김현 혹은 황지우(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가 진술하는 문학의 본령이 무엇이고, 그 의미는 그 '당대'에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입체적인 고민에 대해 크게 공감하는 편입니다.

      논평 고맙습니다. : )

  2. 여형사 2007/06/20 10:47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1. 저는 서정주를 좋아했습니다. (친일 행적 같은것을 모르던 어린 시절에요)
    '국화옆에서' 나 '자화상'같은 시들이 그냥 좋았습니다.
    그러다가 '역사적 맥락속의 서정주'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서정주는 몰라도 그 '시'들은 좋아합니다.

    2. 저는 이문열도 좋아했습니다.
    '사람의 아들', '그해 겨울'같은 작품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다 이문열의 여러가지 헛짓거리가 싫어지기 시작했고,
    비교적 최근의 작품들도 그의 정치색이 그대로 드러나면서 잘 보지 않습니다.
    그 이전의 작품들도 뭔가 현재의 냄새를 갖고 있는 것 같아서 이전 작품들도 싫어졌습니다.

    차이가 무엇일까요?

    서정시의 순수성 자체가 정치적이라는 말은 정말 동감이 됩니다.

    하지만 '일제 시대'는 제가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았던 시간이고, '독재나 꼴통 우익의 시대'는
    제가 직접 경험한 시대입니다.

    그런 이유로 서정주의 정치성(?)은 작품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고,
    이문열의 정치성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뭐 그렇다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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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7/06/21 01:03

      여형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끄덕끄덕하게 됩니다. : )
      말씀하신 독자의 적극적인 체험이, 그 체험이 갖는 역사적인 의미들이 역시나 작품에 적극적으로 투여되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론 이문열의 문학적인 성취나 그의 [영웅시대]에서 표현된 작가의 '가족사'에 대해서는, 솔직히 꽤 공감하는 편입니다. 그런 역사에 대한 혐오, 권력에 대한 방관자적 인식은 [필론의 돼지]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표현되고 있는 것 같은데요.

      다만 그 역사에 대한, 인간의 권력쟁투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들이 작품 외적인 활동으로, 그 반대급부로서 적극적으로 표현되는 모습들에 대해서는 솔직히 크게 아쉬움을 갖지요. 이문열은 개인적으론 꽤 안타깝게, 아쉽게 생각하는 소설가입니다.

      깊이있는 논평에 감사드립니다.

  3. 필그레이 2007/06/20 13:24

    참 혼란스럽고 여려운 글이네요.

    문학적 태도와 정치적 성향....구분해 따로 비판해야할까요.
    저는 같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맞게 기억해 낸 말인지는 모르겠지만...-_-)
    라는 말이 생각나네요. 어차피 개인적인 생각이나 성향이 묻어나오지 않을 수 없단 생각입니다.
    정치를 하든 장사를 하든.문학을 하든 말이죠.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7/06/21 01:10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이 문구는 저도 예전에 제 다른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인용했던 문구라서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는데요.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다시 그 글을 찾아서 읽었더니(^ ^;; ), 60년대 후반, 70년대 초 왕성한 활동을 보여준 '급진적 페미니즘' 진영에서 내걸었던 '슬로건'이라고 하네요.

      텍스트는 그 작가를 배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텍스트가 그 작가와 전혀 다른 별개로 취급되는 것도 다소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현실적인 작용들은 텍스트와 텍스트 외부의 맥락들이 종합적이고, 입체적으로 그 텍스트 해석에 개입하는 것 같습니다. ^ ^;

    • 필그레이 2007/06/21 23:30

      아...개인적이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의 출처와
      어디에 쓰였을 글귀였는지는 알고 있었답니다.^^;;;

      저는 언젠가 페미니스트인 현경 이란 분의 책을 읽고 이 글귀를 접했었거든요.^^ 개인적인 부분들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부분들에 표출 안 될 수 없단 말이죠...왜 있잖아요.유명한 일화...맑시스트가 자유와 평등을 위해 피터지게 총질하며 싸우다 쉬는 타임에는 옆에 있는 여자,메리에게 "메리! 얼른 밥해!"한다구요...^^;;;
      뭐 그런 의미....하하...암튼 늘 글 잘 읽고 있습니다.^__^

    • 민노씨 2007/06/22 02:50

      이런 제가 실례를 했네요. ^ ^
      전 솔직히 인터넷백과사전에서 인용한 문구였었어요.
      구체적인 텍스트에서 인용한 것도 아니었죠. ㅎ

      그런 사례라면..
      '해피엔드'를 만든 정지우(이름이 맞나 모르겠네요)의 영화 [생강]에서 잘 표현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상과 관습과 습관의 차원에서 그 철학이 세계관이 표현되지 않는다면.. 그 철학이 세계관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에요.

      물론 우리들은 모두 어느 정도는 이율배반을 즐기는 기회주의자들이긴 하지만요...

    • 필그레이 2007/06/22 11:22

      아...정지우 감독의 생강...못봤던 작품인데..챙겨봐야겠네요...^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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