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쉽게 판단하는 태도, 혹은 경직된 교조적 태도..
저는 정말 끔찍하게 싫어합니다.
물론 이런 걸 좋다고 말하는 사람 없겠지만요.
성급함과 순발력은 한 끝 차이인 경우가 많고,
교조적 태도와 원칙에 대한 확고한 신념 역시 한 끝 차이인 경우 많습니다.
인정합니다.
다만 아직까지도 저는 조선일보에 대해서만은 성급해지고, 또 다소간은 제 태도가 교조적이건 아닌가 스스로 염려됩니다. 물론 이것이 제 원칙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해석되기를 바라지만요.
저는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소위 '지식인'들
믿지 않습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존경할 수 없습니다.
정내미 떨어집니다.
물론 저는 조선일보 기고 행위에 대해서, 그 '행위'만을 비판하고 싶을 뿐이고..
그 '행위'와 더불어 그 '행위자'까지를 쉽게 판단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람이란게 오죽 복잡해야죠.
그리고 저같은 서툰 인격이 어찌 쉽게 사람, 그 자체를 판단할 수 있겠습니다. 이 글은 그 '공인'들의 '공적 행위'(조선일보에 기고하는 행위겠죠, 당연히)에 대해서만 판단하고 있음을 다시금 강조합니다.
조선일보 기고행위는 저에게 있어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자들에 대한 가장 강력한 판단표준 중 하나입니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지식인이랄까, 글로 먹고 사는 사람이랄까는 역사의식 '생략'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그리고 자신의 공적 행위가 어떤 역사적인 맥락에 위치하고 있는지 별로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이죠.
자기 행위에 어떤 정치적인 함의가 있는건지 모르거나, 모른척 하거나, 혹은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지식인으로 불려질 자격이 없다고 평가합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입니다. 더군다나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내적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쁜' 일을 하게될 공산이 큽니다.
한나 아렌트는 역사의식 없는 성실함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내가 있습니다. 그는 성실한 회계사입니다. 그리고 인자한 아버지이자 다정한 남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반인륜적인 학살에 기여하게 됩니다. 그 성실한 회계능력이 발휘된 곳이 나치스였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글쓰는 사람입니다.
여러 말하면 입 아픕니다.
아주 유명한 명제가 하나있죠.
미디어는 메시지다.
- 마샬 맥루한, [미디어의 이해] 중에서
미디어는, 그 자체로 메시지입니다.
당신이 어디에 기고하는지가 당신이 향하는 지향을 말해줍니다.
이하 제가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조선일보 적극 기고자(적극 관련자)입니다.
주로 진보적 이미지를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기술이 뛰어난 사람들을 위주로 선별했습니다(여기에서 쓴 '상업적'이란 말은, 중립적인 표현이 아니라, 부정적인 가치판단이 내재된 표현입니다. 좀더 풀어쓰면 '돈에 환장한' 혹은 '영향력에 환장한'으로 바꿔 읽으셔서 크게 무리가 없습니다). 마땅히 조선일보에 기고할 만한 '글쓰는 사람'(가령 이문열과 같은)에 대해서는 생략합니다.
생각나는데로 씁니다.
1. 정이현 소설가
한겨레에서도 사랑받고, 조선일보에서도 사랑받은 행운아입니다.
한겨레에서는 말랑말랑한 칼럼쓰고, 조선일보에서는 연재소설쓰고.. 참 부러워 미치더겠군요. : (
참고글 1. http://blog.hani.co.kr/skymap21/4881
참고글 2. http://blog.hani.co.kr/skymap21/4883
위 사례와 관련해서는 한겨레의 원칙, 한겨레의 존재근거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겨레가 왜, 무엇 때문에 만들어진 언론사였는지를 기억하시는 분이라면 제 질문이 아주 억지는 아니라고 생각하실 줄 믿습니다.
2. 김지하 시인
제가 몹시 존경했던 시인이었습니다.
한겨레에서 꽤 자주 다뤘고, 또 기고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바콩(박홍신부)이 분신정국에서 난리폈던 시절에, 김지하가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글을 기고해서 더 난리난 적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론 그것까지는 뭐,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물론 최근에는 잘 모르겠습니다, 문명기행인가 뭔가 조선일보에 기고하고 계시더만요. 정말 기분이 씁쓸했습니다.
3. 신경림 시인
신경림의 농무는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의 '가난한 사랑 노래'란 시는 참 좋아했습니다.
아래 기사는 새로운 신간 시집 광고용 인터뷰입니다.
참고. http://www.chosun.com/culture/news/200612/200612010525.html
덧. 신경림 시인에 대해선 과연 이 정도를 적극적인 기고로 평가해야 하는지 좀 헷갈립니다. 너무 성급하게 '단정'한 것 같아서 관련 기고들을 찾아보는데, 잘 발견되지 않더군요. 반면에 언젠가 신경림 시인이 조선일보에 적극적으로 기고하는 타 문인들을 점잖게 꾸짖는 취지의 발언들은 발견되고 말이죠... 신경림 시인에 대해선 판단을 유보합니다. (2008. 6. 26.)
4. 박완서 소설가
한겨레와 조선일보가 뭐가 그렇게 다르냐?
뭐 이런 취지로 말씀하셨던 것 같습니다.
물론 요즘 보면 그 쥐똥 만큼의 정치적 포지셔닝에 대한 상업적 전략을 제외하면, 뭐 크게 다르지 않은 것도 같습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박완서 할머니의 공적 행위에 대한 제 주관적인 평가에 영향을 미칠 만큼은 아닙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이셨는데, 최근에 관뒀습니다.
건강상 이유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5. 이청준 소설가
예전엔 (조선일보 추최)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이셨는데요.
요즘도 하고 있는가 모르겠네요.
최근 화제가 되는 영화 [밀양]의 원작인 '벌레이야기'의 작가이기도 하시죠.
개인적으론 가장 아쉽고, 안타까운 경우입니다.
6. 신경숙 소설가
조선일보 연재 소설 아직 쓰고 계신가 모르겠네요.
요즘 신문을 잘 안봐서리.. ㅡㅡ;;
7. 박민규 소설가
한겨레에서 상받아서 유명해지더니(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펜팬클럽)(덧. 구국오타협회에서 지적해주셨네요, 고맙습니다. : ) , 조선일보에서 서평쓰면서 돈 벌고 있더만요. 지금은 안하시는 것 같긴 합니다.
8. 공지영 소설가
솔직히 별 관심 없는 작가입니다.
한겨레에 연재소설 쓸 때에도 그다지 호감은 아니었는데요.
조선일보와 희희낙락 이게 광고인지 인터뷰인지 구별이 안되는 기사와 동영상 본 뒤로는 굉장히 짜증이 상승하더만요. 약간 공주병이 있는 것도 같고.. ㅡㅡ;;
* 관련기사
기사 1. http://www.chosun.com/culture/news/200611/200611200001.html
기사 2. http://www.chosun.com/culture/news/200611/200611200554.html
* 관련글
http://blog.hani.co.kr/skymap21/4630
9. 정과리 평론가
김현 선생의 직계이자, [문학과 지성]에서 힘 좀 쓴다고 막연하게나마 압니다.
동인문학상 종신심사위원입니다.
10. 조주은 여성학자·서울시립대 강사
참세상 관련.
진보적 지식인의 탈을 쓴 지적 매춘행위가 아닌가 싶네요.
참조.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5/20/2007052000344.html
11. 정희진 여성학자. ‘페미니즘의 도전’ 저자
참세상 관련.
위와 동으로 개인적으론 평가합니다.
참조 1. http://www.chosun.com/w21data/html/news/200406/200406280324.html
참조 2.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2/23/2007022300883.html
12. 장하준 교수. (2008. 6. 26. 추가)
외부 칼럼니스트로 정기 기고합니다.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매체로서의 조선일보를 그저 '도구적'으로 '활용'하는 차원으로 생각할 수 있을는지... 칼럼의 내용은 매우 준수하다고 평가합니다. 여느 조선일보 외부 칼럼과도 차별화된 논조를 유지하고 있죠.
조선일보 기고가 어떤 도덕적 고민도, 윤리적 고민도 불러오지 못하는 것 같은 현실 속에서 실은 점점 더 헷갈립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조선일보 적극 기고자에 대한 제 실망감 역시 점점 더 이유 없는 것이 되겠지요...
명단은, 의미있는 발견으로 판단되는 경우, 여기에 계속 보충합니다.
* 발아점
참세상과 조선일보, 그리고 한겨레 (marishin)
위 글을 읽고 포스팅해야겠다 결심했네요.
* 경유지
필넷에 썼던 내 글들.
위에 링크한 글들은 그대로 두고, '역사적 심판으로서의 독자'는 옮겨올 생각(덧. 옮겨왔습니다).
* 참고글
2002년 박노자 인터뷰 중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은 음미할 만한 것 같습니다.
강준만 교수의 저작물 중에서 <한국 지식인의 주류 콤플렉스>에 대해서 한 번 서평을 쓰고 일부의 논문을 읽었을 뿐, 대부분을 읽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충분한 판단을 할 만한 데이터베이스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읽은 강교수의 글에 대해서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그의 주장들이 한국 지식인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잘 보여 주는 측면이 분명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무분별한 미디어 이용을 통한 몸값 늘리기, 강단 좌파의 상업적인 미디어 활동 등은, 자기‘몸'을 비싸게 팔아 '멋진 출세'를 해야 하는 극단적인 시장주의의 한국 인테리겐차 사회의 현실을 대변합니다. 조선일보나 사립 대학 권력자 앞에서 무력하게 머리를 숙여 몸보신이나 하는 지식인들을 보는 것은, 저에게도 강교수 못지않게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만, 제 문화적인 편견인지 모르지만, 조선일보의 좌파 기고자를 겨냥하는 캠페인을 벌이느니 차라리 이 문제를 각자의 양심과 판단에 맡기는 것이, 진정한 자유주의자, 개인주의자답지 않나 싶습니다. 조선일보쪽에서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짓밟고 있는데, 반대쪽에서라도 그 중대한 원칙들을 잘 지켜 주었으면 합니다.
- 2002년 박노자 인터뷰 중에서
그러나, 제가 읽은 강교수의 글에 대해서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그의 주장들이 한국 지식인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잘 보여 주는 측면이 분명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무분별한 미디어 이용을 통한 몸값 늘리기, 강단 좌파의 상업적인 미디어 활동 등은, 자기‘몸'을 비싸게 팔아 '멋진 출세'를 해야 하는 극단적인 시장주의의 한국 인테리겐차 사회의 현실을 대변합니다. 조선일보나 사립 대학 권력자 앞에서 무력하게 머리를 숙여 몸보신이나 하는 지식인들을 보는 것은, 저에게도 강교수 못지않게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만, 제 문화적인 편견인지 모르지만, 조선일보의 좌파 기고자를 겨냥하는 캠페인을 벌이느니 차라리 이 문제를 각자의 양심과 판단에 맡기는 것이, 진정한 자유주의자, 개인주의자답지 않나 싶습니다. 조선일보쪽에서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짓밟고 있는데, 반대쪽에서라도 그 중대한 원칙들을 잘 지켜 주었으면 합니다.
- 2002년 박노자 인터뷰 중에서
* 확장점
조선일보, 과학자 그리고 지식인 (김우재) : 성실하고, 흥미진진한 글입니다. 무엇보다 제 졸문이 이런 멋진 글의 발아점이 되었다니 기분이 무척 좋군요… : )
통섭 혹은 융합이라는 화두가 유행이다. 좋은 말이다. 그것이 내게는 과학자들에게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라는 말로 들린다. 통섭이라는 화두가 유행하기 위해서는 이 땅의 과학자들과 과학으로 먹고 사는 지식인들이 지닌 이중적 잣대가 사라져야 한다. 그것은 과학자들의 사회참여를 요구하면서 과학자들의 정치적 의사를 막는 태도다. 이러한 이중적 잣대가 사라져야 비로서 통섭이라는 화두가 가능할 것이다. [....]
나는 이러한 바탕 위에서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 과학자들을 비판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과학자들이 소심하게 과학의 뒤에 숨지 말고 당당하게 정치를 논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현재 프레시안에서는 장대익 교수가 과학과 종교라는 화두로 신나게 칼을 휘두르고 있다. 실상 세상에서 가장 쉬운 비판이 종교비판이다. 그리고 종교비판을 하기엔 이 땅의 과학자들이 지닌 종교적 성향은 진정한 무종교인의 그것은 아니다. 나의 글 "일그러진 우리들의 과학자"는 이런 토대에서 작성된 글이었다.
나는 과학자들이 종교를 넘어 정치를 논하는 단계로 도약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결국은 초딩 수준의 과학대중화를 이룬 지난 30년 간의 실패한 과학대중화 정책을 만회하는 지름길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은 나 스스로의 정치적 성향을 부끄럼 없이 드러내는 행위이기도 하다.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점점 스티븐 제이 굴드가 걸었던 그 길을 다시 걷고 있다.
소박한 상식이 필요하다. 모든 인간은 정치적이고 과학자도 인간이다. 따라서 과학자도 정치에 관한 견해를 표출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과학대중화다. [....]
- 김우재, 조선일보, 과학자 그리고 지식인 중에서
나는 이러한 바탕 위에서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 과학자들을 비판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과학자들이 소심하게 과학의 뒤에 숨지 말고 당당하게 정치를 논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현재 프레시안에서는 장대익 교수가 과학과 종교라는 화두로 신나게 칼을 휘두르고 있다. 실상 세상에서 가장 쉬운 비판이 종교비판이다. 그리고 종교비판을 하기엔 이 땅의 과학자들이 지닌 종교적 성향은 진정한 무종교인의 그것은 아니다. 나의 글 "일그러진 우리들의 과학자"는 이런 토대에서 작성된 글이었다.
나는 과학자들이 종교를 넘어 정치를 논하는 단계로 도약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결국은 초딩 수준의 과학대중화를 이룬 지난 30년 간의 실패한 과학대중화 정책을 만회하는 지름길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은 나 스스로의 정치적 성향을 부끄럼 없이 드러내는 행위이기도 하다.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점점 스티븐 제이 굴드가 걸었던 그 길을 다시 걷고 있다.
소박한 상식이 필요하다. 모든 인간은 정치적이고 과학자도 인간이다. 따라서 과학자도 정치에 관한 견해를 표출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과학대중화다. [....]
- 김우재, 조선일보, 과학자 그리고 지식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