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전혀, 아주 예민한 독자라면, 거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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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그로테스크한 블랙유머의 세계...



0. 흥행 : 롱런은 힘들겠다
나는 박찬욱 영화를 굉장히 좋아한다. 그래서 누구처럼 '박찬욱의 걸작, 아찔하다'라는 환호 가득한 제목을 나 역시 쓰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환호가 아니라 걱정이다. 이후의 박찬욱 영화는 제작사로부터 꽤나 압박을 받을 수도 있겠구나 싶은 그런 불길한 예감. 전작인 [사이버그지만 괜찮아]가 관객들과의 교감에서 실패했다면, 이번 [박쥐]도 느낌이 안좋다. 쉽게 말해서 재미없다(그렇다고 흥미롭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박찬욱과 송강호라는 이름값 때문에 초반에야 관객이 들겠지만(글 쓴 뒤에 살펴봤더니 올해 개봉작들 중 최단 기간 100만 돌파란다), 최소한 '입소문'으로 롱런하기는 매우 어렵겠다.

" 머리 나쁜 아이들은 입 좀 다물지?"  이렇게 스스로 바보선언하는 촌평들이 노이즈 마케팅에 일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없지 않지만, 글쎄.. 별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무슨 자연주의니 라캉이니 지젝이니 운운하는 '마루타비평'(아래 4. 참조)이 도움을 줄까? 글쎄, 이것도 별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흥행은 개봉 둘째 주부터는 좀 급격하게 고전하지 않을까 싶다.

[박쥐]에 관한 말말말들은 풍성하겠지만, 그 거품이 오래갈 것 같지는 않고, 오히려 [마더]가 얼마나 해줄수 있을지가 개인적으론 관심사다. 사족이지만, [마더]는 그냥 [마더]가 아니라 [마더 by 봉준호]다. 그러니 기상천외한 '봉준호 마케팅'을 하고 있는데... 왜 박쥐에선 'by 박찬욱'이라고 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박찬욱이라는 이름값은 수식할 필요도 없을만큼 넘버 원인건가? 농담이지만, 이런 촌스런 마케팅은 안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을 갖는다. 'by 봉준호'라뉘.... 봉준호도 참 민망뻘줌하겠다.

1. 박찬욱 필모그래피 내부에서의 비교 고찰 : [복수는 나의 것]의 부조리극 버전
일단 [달은 해가 꾸는 꿈]이나 [삼인조], 그리고 [사이버그...]는 제껴놓고.
[박쥐]는 [복수의 나의 것]처럼 파격적인 블랙유머나 창조적인 그로테스크 이미지, 의미심장한 엔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친절한 금자씨]처럼 과감하면서도 성찰적인 정치적인 비전이 느껴지지도 않으며, [올드보이]처럼 액션의 쾌감이나 내러티브의 입체적인 완결성을 보여주고 있지도 않다. 블랙유머라는 점에서는 매너리즘이 느껴지고, 그로테스트한 이미지들은 현실과의 접점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으며, 정치적인 함의를 추출하기에도 뭔가 삐리리 하다.

소위 '복수 3부작'은 박찬욱 영화의 기본 코드인 정치적이며 성적인 결핍으로서의 욕망, 그로테스크한 인공적 이미지, 연극적이고 과장된 인물 등을 공히 담고 있다. 무엇보다 박찬욱 영화는 '시대와의 불화'(이문열을 염두에 두고 쓴 건 아니고...;;)라는 심리적 배경을 갖는데, [박쥐]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이 시대는 뭔가 잘못됐다'라는 근원적인 불안과 그 불안을 전복시키려는 저항의 이미지, 그 불안과 저항이 세속적인 욕망의 차원에서 서로 엉키고, 다시 풀어지는 그 놀라운 변증법적 모순과 극복의 이미지 말이다. 하지만 [박쥐]는 뭔가 좀 엉성한 느낌이랄까, 덜 조율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길 없다.

기존작들 가운데 가장 닮은 건 [복수의 나의 것]이다. 다만 [박쥐]는 훨씬 더 연극적이고, 평면적이다. 공간적인 배치도 그렇고, 인물들의 상징성도 그렇다. 내러티브의 논리적 인과로 보자면, 이건 스토리가 말이 되나 안되나의 피상적인 차원이 아니다, 그 완결성(설득력)에서 [복수는 나의 것]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흥미로운 건 [쓰리](옴니버스 영화. 박찬욱이 연출한 '흡혈귀'가 등장하는 에피소드)와의 유사성이다. 전혀 다른 감수성이지만, 차라리 [박쥐]가 [쓰리]의 확장 버전이었다면 훨씬 더 볼만했을텐데 라는 생각이 든다.

좀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을 밀어 붙이거나, 혹은 연극적인 인물들의 속성들을 좀더 자연스러운 인과를 갖고 배치했어야 했다. [박쥐]는 아무리 우호적으로 봐도 어중간하다. 이건 무슨 브레히트의 '소외 효과'를 이야기해야 하는 국면이 전혀 아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양반들은 물론 있다). 무엇이든 좀더 확실하게 선택했어야 했다. [박쥐]는 너무 엉성하게 작위적라서 인물들 간의 유기적인 연계와 속성이 따로 노는 느낌이다. 심지어는 김옥빈이라는 인물은 그 인물 내부에서조차 그 성격이 따로 논다. 이건 인물의 입체성이니, 내러티브 진행상 자연스런 인물의 성격 변화니 이런 것과 상관없이 인물 형상화에 실패했다는 의미다. 언젠가 박광수가 [베를린 리포트]를 찍었을 때 들어야 했던 '기계적인 작위성'이라는 비판에서  박찬욱도 자유로울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베를린 리포트]처럼 엉망으로 작위적이진 않다. 송강호는 여전히 설득력을 유지하고 있는 캐릭터이긴 하다. 다만 아무리 박찬욱이라고 해도, 송강호나 김해숙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아닌 건 아니거다.

2. 그로테스크와 블랙유머 사이, 희극과 비극 사이에서 길을 잃다.
우리 시대의 음란함과 탐욕에 대한 역설적인 교훈극이라고 [박쥐]를 해석한다면 가장 상식적인 해석일 것 같다. 그 음란하고, 탐욕스러운 이미지들은 박정희시대 삘나는 한복집의 기괴한 이미지들과 겹치면서 더더욱 음산한 느낌으로 살아난다. 하지만 이 이미지들은 더 나가지 않는다. 그냥 과거회귀적이고, 그냥 기괴하다. 그저 쉽게 해석가능한 수준에서 인간의 본능과 종교적 성스러움의 대비, 자기 희생과 파괴적 욕구의 대비, 일상성으로서의 속물코드와 그 일상성을 뛰어넘는 박찬욱 영화의 시각적 테마의 변주로서 크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의 반복. 이게 다다.

하지만 박찬욱 영화에서 기대하는 건 이런 뻔한 차원에서의 식상하게 짜맞춰진 교훈극이나 평면적인 이미지들의 조합이 아니다. 이율배반과 속물근성, 그리고 결코 딴 몸이었던 적 없는 정치적인(권력적인) 욕망과 성적 욕망의 이미지, 그 겹침과 엇갈림은 내가 박찬욱 영화를 특별하게 평가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들 가운데 하나였다. [박쥐]에서도 그런 시도들은 물론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걸 형상화하는 박찬욱의 의도가 얼마나 성취되었는지는 미지수다. 그런 차원에서 나는 내심 영화를 보는 동안 가령 '장자연 사건'들 따위를 [박쥐]에서 발견할 수 있기를 원했다. 하지만 [박쥐]는 그럴만한 상상력의 여지를 관객에게 마련해주지 않는다.

영화는 미지의 이미지들이 연속적인 이어짐으로 설계되는 일종의 커다란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당연히 전략적인 선택이 필요하다. 주된 속성과 종된 속성의 계산된 조율, 비유자하면 일종의 주조색 설정이 필요하다. 비극이 주된 색인지, 아니면 희극이 주된 색인지, 그 양자는 어떤 거시적인 테마 속에서 서로 거시적인 디자인 위에 배치될 것인지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 [박쥐]는 이게 뒤죽박죽이다. 서로 단절적인 평면으로 이어진 이질적인 모자이크 같다. 이는 [친절한 금자씨]에서 양 요소가 완벽한 수준에서 서로 불가분의 요소로 호흡하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그래서 내적 내러티브의 설득력이 거의 바닥 수준으로 내려가 있다. 이런 내적 내러티브, 이미지 그 아래에서 호흡하는 내적 설득력이 가장 높은 수준으로 성취된 영화는 개인적으로 판단한다면 [복수는 나의 것] 혹은 [친절한 금자씨]다. 결정적으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서 박찬욱은 길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염려마저 자아낸다. 비극인가 희극인가? 아니면 [친절한 금자씨]처럼 그 양자가 완벽하게 서로에게 속한 희비극인가? [박쥐]는 모호한 지점에서 멈춰서고 있다.


3. 연기 : 썩 훌륭하다.
특히 송강호와 김해숙은 대단히 훌륭하다. 다만 김해숙의 이미지는 필요 이상으로 그로테스크하고, 김옥빈은 열심히 연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서 함량 미달을 자인하고 있으며, 송영창의 등장은 의도적이면서 가장 의미심장하기는 하지만 너무 비중이 약하다. 신하균과 오달수는 거의 완벽한 연기를 보여주고는 있지만, 이전 이미지들의 변주라는 성격이 강해서(물론 신하균이 훨씬 망가지는 이미지로 헌신하고 있기는 하지만) 별다른 감흥을 주지는 않는다.  

[박쥐] 에너지는 절반 이상은 송강호에 의존하고 있는데, 송강호는 역시나 막강 연기력을 뿜어낸다. 송강호의 연기'만' 감상하기 위해 극장에 찾겠다는 관객들이 절대 다수라면 이 영화는 강추다.  하지만 송강호의 연기'도' 보기를 원하는 관객들이 상식적이라면, 박찬욱은 뭔가 좀더 대답을 들려줬어야 한다. 여기에는 그게 없다. 있어도 좀 처럼 발견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누군가가 지적한 "개인취향의 수집품"이라는 지적은 설득력이 있지만, 이런 거대 배급망을 갖는 영화를 '개인취향의 수집품'으로 한정짓는다는 건 한국영화의 풍토에서는 대단한 사치라는 생각이 든다.


4. 어떤 문화평론가의 스포일러 만발한 계몽 리뷰에 대해 
어떤 텍스트도, 그것이 회화이든, 조각이든, 음악이든, 문학이든, 영화이든 간에, 대부분 언어를 통해서 해석되곤 한다.(물론 모든 예술작품들은 서로 상호간 비평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모든 예술적 표현형식도 공히 '언어적'이라는 속성을 갖는다. 각설하고, 영화를 해석함에 있어서 표피적인 내러티브, 쉽게 말해 줄거리를 문자적(문학적,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마땅하다. 이런 문자중심적 태도를 프랑소와 트뤼포는 가장 저주했다. 나는 여기에 기꺼이 공감한다. 영화는 '문학'이 아니다. 이것은 자명한 것이다. 사족으로, 경계해야 하는 트뤼포의 태도도 있는데, 트뤼포는 '가장 후진 감독의 걸작보다는 대가의 졸작이 위대하다'는 식으로 반응하곤 했다고 한다. 그러니 일방적인 '박찬욱에게 경배를~!'도 좀 내가 보기엔 좀 이상하다.

이런 문제의식의 연장에서 '요즘 유행하는 서구의 지적 사조'를 영화에 갖다대는 (정말 지긋지긋한) '강단식 비평'에 대해선 영화와 같은 대중적인 예술 형식이 어떤 비평을 요구받고 있는지를 심각한 수준에서 고민하게 한다. 즉, 이런 관객들, 혹은 독자들의 반발은 저널리즘 비평과 소위 '강단식 비평'의 위기를 반영한다. 영화를 통해서 철학을 논하지 못할 이유는 없고, 오히려 영화를 통해서 문학과 철학을 논할 수 있어야 하지만, "필자의 지젝과 정신분석학 학습을 위한 마루타로 영화를 갖다 대주고 있"다고 독자들이 느낀다면 그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프레시안의 박쥐 영화평은 아마도 '포털'에도 송고되어 메인에 노출되었거나, 해당 포털의 하위 영화 서비스 페이지에 링크된 것 같다. '식인토끼'의 영화촌평이 인상적이다. : )
*   명수(210.***.59.62)  | 2009/04/28 14:01:45
영화 개봉된 지 한참 지났으면 모를까 상당수 사람들이 영화를 못본 상태에서 이런 영화평을 올리는 의도는 뭔가요. 포털 영화평이 본인 일기장 속 감상문인가요. 독자를 배려하지 않은 과도한 줄거리 노출. 심히 거북하네요.

* ssip(218.***227.236) | 2009/04/28 13:37:57
이런 영화평 이제 지겹고, 짜증이 나고, 읽으면 우울해지기까지 한다. 영화 자체에 대한 진지한 비평보다, 필자의 지젝과 정신분석학 학습을 위한 마루타로 영화를 갖다 대주고 있는게 아닌지...

* 열심자(164.***.115.157) | 2009/04/28 09:56:55
이 평론이 나쁜 이유: 첫째, 스포일러가 아무런 경고없이 불쑥 튀어나온다. 반전 없는 영화라면 결론을 미리 말해버려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둘째, 일반인이 읽기에 너무 어렵다. 경제전문가 아닌 대중을 위한 신문에서 경제평론가가 자본의 한계대체율 체감이 어쩌고 하는 말을 늘어놓았다면, 그게 제대로 된 평론이라 할 수 있는가? 이 신문을 읽는 많은 사람들은, 지젝이 무슨 말을 한 어떤 사람인지조차 모른다. 대중이 읽기에 조중동보다 더 쉽게 쓰지 않으면 절대 조중동을 넘지 못 한다.

* 식인토끼(119.***.88.156) | 2009/04/28 09:41:58

18세 이상만 읽기 (more..)


* Gazer(59.1***15.105) | 2009/04/28 09:38:29
우와 정말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라캉과 스포일러를 만났다.

- 팜므파탈을 이기지 못한 뱀파이어, <박쥐> (기사입력 2009-04-27) 의 독자평 중에서


위 영화평에서 송강호와 김옥빈이 '공중 널뛰기(?)'하는 장면에서 극중 김옥빈이 느꼈을 일탈적 쾌감을 지적하는 부분에 대해선 크게 공감하고, 이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뛰어난 장면들 가운데 하나다. 이런 인상적인 장면들은 종종 만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로서의 작품 속에 스며들지는 못한다.

더불어 (개인적으론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중적인 친화도라는 차원에서는 평가하는 리뷰어인) 이 동진이 왜 걸작이라고 이야기하는건지 모르겠다. 물론 나는 영화를 보기 전에는 리뷰든, 프리뷰든 절대 피하는 입장이라서 제목만 봤는데, 이동진을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 이동진 리뷰는 이 글 쓴 뒤에 좀 확인해 봐야겠다.  왜 걸작이라고 생각하는건지 궁금하다(리뷰 제목이 '박찬욱의 걸작, 아찔하다'임). (이 글을 모두 다 쓴 뒤에 이동진의 리뷰를 읽었다. 읽고보니) 내가 왜 이동진을 별로 안좋아하는지 알겠다. 아찔하게 맹탕이다. 농담이고, 내가 부정적으로 해석한 요소들을 거의 모두 매우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다만 이창동을 떠올린 부분에 대해선 공감하지만, 뱀파이어 영화의 관습에 대한 전복이라는 부분에 대해선, 그냥 웃었다. 멀리 갈 것 없이 [렛미인 Let me in. 원제 : Låt den rätte komma in. Let the right one in(2008. 스웨덴)]이 있다. 그리고 아쉽게도(?) [렛미인]은 뱀파이어 영화의 장르적 관습을 넘어선다는 그 창조적 파괴라는 측면에 한정한다면  [박쥐]보다는 뛰어나다.  

5. 기타
ㄱ. 원작 :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켕(Therese Raquin)
엔드 크레딧을 볼까말까 하다가 그래도 궁금해서 지켜봤는데, 원작에 에밀 졸라의 '뭐시기'(계속해서 자리에서 뜨는 관객들이 화면을 가리는 통에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라고 써있더라. 지금 찾아보니 졸라의 소설 '테레즈 라켕(Therese Raquin)'. '테레즈 랑켕'은 소설 속 여자 주인공 이름이라고 한다. 자연주의 소설로 문학사에서는 분류. 박찬욱이 10여년 전에 읽었던 소설인데, 모티브가 되었다고.(참조글)

ㄴ. 스포일러에 대한 불안
점 점 더 영화평에 대한 스포일러의 불안은 가속화되고 있다고 느낀다. 특히나 개봉 초기 영화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기 전에는 그 해당 영화에 대한 어떤 평도 접하지 않는 편이다. 영화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에 기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기 직전 우연히 RSS 리더를 읽다가 개인적으로 몹시 좋아하는 한 블로거벗의 [박쥐] 관련글을 읽었다. 아뿔사!.첫 줄에 결정적인 스포일러(영화 볼 독자들은 알아서 클릭하기)가 있었다. ㅡ.ㅡ;;; 그 결론을 미리 알고 봐서 영화에 대한 감흥이 상당히 추락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마음 한편에선 여전히 들지만, 다행스럽게도(?) 결론을 몰랐다고 해도 감상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아무튼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스포일러는 매우 유쾌하지 않은 것임에 분명하다. 위 프레시안 기사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이동진의 해당 리뷰에서도 스포일러에 대한 안내는 부실한 편이다. 나처럼 스포일러에 예민한 독자들이 읽으면 짜증이 날 법도 싶다.


* 관련
무비토크 58회 - 박쥐


* 이 글은 영화블로그에도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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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 박쥐, 2009

    Tracked from Plan9 Blog 2009/05/05 10:09 del.

    이건 순전히 취향문젠데 이번 영화에서 잔인한 묘사의 비중을 늘린건 별로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이야기 전개는 점점 재밌어졌고 악몽에 대한 연출도 좋았다. 특히 개인적...

  2. Subject : 무비 토크 58 - 박쥐

    Tracked from soriweb.com 2009/05/05 19:32 del.

    무비 토크 58회입니다. 이번 회에선 최근에 개봉해서 화제를 모으고 있는 박찬욱 감독의 박쥐에 대해서 두 대담자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대담 내용의 시간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영...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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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윤초딩 2009/05/05 11:16

    어이쿠...
    제가 영화를 상당히 좋아하는데..
    영화쪽글도 상당히 어렵게 쓰시네요..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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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5/05 11:34

      아이코... 제가 표현력이 딸려서... 앞으론 좀 쉽게 쓰도록.. ^ ^

  2. Venti Americano 2009/05/05 12:17

    아.. 보고 싶다. 박쥐.
    그러나 DVD 나올때 까지 기다려 되니 할 수 없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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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5/06 14:49

      벤티님께서도 몹시 궁금하신가 보군요. ^ ^;
      저도 영화 보기전에는 그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더만요..

  3. 우자 2009/05/05 12:24

    오늘 영화를 보러가긴 갈 건데...보지도 않고 느껴지는 '겉 멋' 이 있다는 거지. 소위 박찬욱의 '과거의 성공의 경험'은 이제 개뿔도 아닌 것도 미화하게 된다는 거지. 너무나 잦은 말들...너무도 주저하는 시도들...감독이 영화로 말해야 한다는 거지.

    영화 한 두편 잘 만들었다고 거장이니 뭐니 하는 사람들도 우습고 진보랍시고 대충 밀어주는 분위기도 거시기 하단 말이지. 박찬욱은 성찰을 하지 못하는 느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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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5/06 14:53

      그랬구나, 공감이야...

      추.
      독백투로 말씀을 주셨길래... 저도 독백투로. ㅡ.ㅡ;
      처음에는 제 친구가 댓글을 남겼나 했습니다. ^ ^;

  4. leopord 2009/05/05 16:46

    1. <친절한 금자씨>를 사랑하시는군요. :D 전 극장에서 (혼자) 한 번 봤을 뿐이네요. 최민식을 살해하고 난 뒤 돈을 나누는 장면에서 자본의 힘만을 관찰했던 리뷰를 썼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좀 편향적이었던 것도 같고요. 링크된 글을 읽고 나니 금자씨가 다시 보고 싶어지네요.

    2. <박쥐>에 대한 전반적인 평에 동감합니다. 이택광 님의 분석도 어느 정도 유효하다고 봐요. 영화평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이택광 님의 대응은 그가 취하는 스탠스(한국사회 지식의 하향평준화와 지식인의 역할부재)와 연관시켜보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3. <박쥐>를 한 번 더 봤는데, 정신분석학적인 틀을 통해 볼 수 있는 것들이 좀 있다고 생각했어요. 다만 독해는 될지언정 감상은 안 되는 작품이랄까. 가슴을 치고 드는 절망-희열이 없었다고 봅니다.

    덧. 영화리뷰를 쓰면서 느끼는 건 제 내공은 끊임없이 후달린다는 것입니다...OTL 영화를 보면 볼수록, 글을 쓰면 쓸수록 무엇을 취하고 버려야 할지 고민도 들고 제가 얼마나 무식한가를 알게 되기도 하고 말입니다. (웃음)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9/05/06 14:58

      1. 금자씨는 개인적으론 가장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박찬욱의 작품들 가운데서는요.

      2. 이택광씨의 비평도 물론 의미가 있겠지요. 다만 의미전달의 효율성이라는 차원에서 너무 과도하게 치장적인 수사가 들어간 것 같기도 합니다. 라캉이나 지젝이 정말 필요한 차원에서 거론된다는 느낌이라기 보다는 어떤 독자의 절묘한 지적처럼 영화가 비평을 위한 마루타로 소비되는 느낌이 강해서 말이죠.

      3. 전폭적으로 공감합니다. 예술은 불가피한 매혹의 성격이 거세되면 그 생명력을 논하기 매우 어려운 것이 아닌가 싶은데요. 그런 차원에서 박쥐는 전혀 매혹적인 작품이 아니지요. 물론 이것은 제 나름의 주관적인 감수성과 판단에 의지한 해석일 뿐이지만요.

      추.
      피디저널에 송고하시는 영화글은 잘 읽고 있습니다. : )
      겸손이 과하신듯.

  5. 주성치 2009/05/05 17:56

    요즘 며칠동안 박쥐 관람 후기들을 보면서 느낀게 박쥐는 영화보다 각자의 시선으로 본 후기들이 더 재밌는 것 같습니다.

    perm. |  mod/del. |  reply.
  6. 내가 내갸? 2009/05/06 01:55

    허... 이거 뭔 말씀이 뭔 말씀인지... 당췌 알아들을 수가 없구만요.
    그래도 박쥐 란 영화가 이렇게 많은 담론을 이끌어내는 것을 보니 그래도 `텍스트` 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할 만할 가치가 있는 작품인가 봅니다. 요즘에 골머리 아픈 것이 점점 지겨워져서 그냥그냥 눈에 쉽게 들어오는 영화들만 봐와서 그런가 박쥐 라는 영화가 확 땡기네요.

    그래도 워낙 기존의 한국영화들이 장황하게 구태의연한 설명조의 화면들을 늘어놔서 그런지 이렇게 상징들을 의미심장하게 깔아놓은 `척` 하는 영화가 가끔씩 나와서 나쁜 제 머리를 더욱더 복잡하게 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은근히 가져봅니다. 근데 솔직히 전 박감독 영화를 보고 그렇게 깊은 의미가 들어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게 제대로 된 비유라고 생각치는 않지만 제 얕은 지식으로 더듬어보면 70년대 락밴드들에게는 `난해함` 이라는 코드가 무슨 유행이자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음반에 삽입되던 시절이 있었지요. 당대의 팬들은 무슨 철학책까지 들춰가며 해석을 한다고 설레발을 쳤는데
    요즘에 와서는 `저 가사 지들도 뭔 소린지 모르고 쓴 것이다.` 라는 해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단 말이죠. 그렇다고 박감독 영화가 지도 뭔 소린지 모르고 찍었다는 이야기는 아니구요, 자칭 비주류 영화를 찍는다고 자처하는 감독치고는 너무 화면 곳곳에 멋을 많이 부린 흔적이 보여서요 (대표적인 예로 금자씨) 대중앞에서는 비주류니 ,b급무비 감독이니 해도 속으로는 제일 똑똑하고 아는것 많은 식자층에게 제대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속물근성이 살짜쿵 엿보여서 그의 영화를 보는 것이 더욱더 기대됩니다. 진정한 b급무비란 것은 평론가들이 아예 상대도 안해주는 영화들이 대부분인것을 상기해보면 박감독의 야심은 장르의 치밀한 교배를 통한 작가주의의 정점에 도달하고 있지 않은가 추측해봅니다. 그리고 그의 야심이 성공적인 수확을 맺기를 바랍니다. 요즘 본 한국영화들을 열거해보자니 언급하신 트뤼포의 `거장의 졸작이 바보천치의 걸작보다 운운` 하는 어록에 딱 들어맞는 것 같거든요.

    제가 박감독의 영화에 가지는 불만은 아이러니하게도 삼류관객들이 지들이 이해못하는 영화에 대고 짖어대는 가장 대표적인 문구인 `건방지게 관객을 가르치려 한다.` 는 말인데요, 정말 똑똑하고 아는 것 많은 감독이라면 한 수 가르쳐주실때 두 수, 세 수 얼마든지 배울 용의가 있습니다만 박감독의 영화는 가르침을 넘어서 `니들 대가리로는 가르쳐줘도 이해 못할걸? 가서 평론가들 평이나 열심히 읽고 그래도 이해못하겠으면 니들 수준에 맞는 영화나 봐` 라는 학교에서 공부잘하는 우등생들이 밑바닥에서 기는 친구들에게 보내는 시선을 자꾸 영화에 투영시키려 하는 것이 눈에 훤히 보여서요.
    반대로 각종 영화장르를 아우르며 갈고 닦은 실력을 화면 전반에 화려하게 깔아놓는 영상을 보면 아무리 공부잘한다고 잘난체를 해도 속으로 깊은 시샘과 열등감이 느껴지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박감독 영화의 매력이지요. `한국영화` 에 조르즈 시발 (발음이 맞나 모르겠네요.) 의 음반을 사운드트랙에 삽입할 생각은 아무 한국영화감독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때문에 말입니다. (금자씨에서)

    제 짧은 눈으로 볼 때 박감독은 본인이 사랑한다는 b급 무비보다 공동경비구역 같은 철저한 주류의 영화를 만들때 가장 자신의 진가가 발휘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제작되는 영화도 그런영화를 한 작품 정도만 더 만들어주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그의 최고걸작으로 꼽는 영화가 바로 단편영화모음 쓰리 의 에피소드인데 b급 정신이 충만한 그 단편조차 어지간한 영화적 지식이 없으면 만끽하기 어려운 작품이었거든요. 제가 뱀파이어 영화 박쥐 에 대한 호불호의 평을 읽으면서도 한편으로 했던 기대는 우스꽝스럽기 그지 없게도 `톰 크루즈, 브래드 피트, 크리스찬 슬레이터, 안토니오 반데라스 같은 별들의 전쟁을 만들려다 별똥별 신세도 되지 못한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보다는 나의 취향에 맞겠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기대는 그다지 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박감독에 대한 과대평가니 거품 운운하는데 제가 꼽는 진정한 과대평가와 거품은 봉감독이라 생각합니다. 괴물은 물론이고 살인의 추억 에서조차 그는 과분한 명성을 얻고 있죠. 굳이 제 호불호를 나눈다면 전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의 열작품보다는 이창동, 김기덕, 홍상수 의 한작품 에 제 시간을 투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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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5/06 23:08

      친애하는 내내님께서 알아들을 수 없겠다니 심하게 찔립니다. ^ ^. 스포 불안을 염려하다보니 써도 그만 안써도 그만인 밍숭미숭한 글이 된 것 같네요. 앞으로 신경 쓰겠습니다.

      휴일은 잘 보내셨는지요?
      안그래도 내심 궁금하던 참입니다.
      이렇게 다시 찾아주시니 정말 반갑네요.

      1. 무비토크에서 링크님이 지적하는 것처럼 그래도 이만큼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감독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영화라는 허구를 통해 현실을 우리가 성찰해야 하는, 추구해야 하는 진실의 이미지들(예술을 통해서 그 진실은 여전히 추상적인 이미지의 형태로만 감지된다고 보는데요) 반추할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예술의 의미이자, 특히나 이토록 대중적인 영화라는 예술형식이 갖는 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박쥐라는 영화가 확 땡"긴다는 내내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ㅎㅎ

      2. 지난 친금 글에서도 표했습니다만, '친절한 금자'같은 경우에는 영화적인 재미라는 차원에서 그 표현의 과장은 충분히 이해될만한 수준이고, 또 그 표피의 이미지들이 작품의 내재적인 진실과 호응한다는 점에서도 저로선 단순히 "겉멋"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관점에서는 '지구를 지켜라'와 같은 영화가 대표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 이야기는 뒤에 좀더 이야기할까 싶고요.

      3. 지적 속물근성
      지적 속물근성에 대해선 박찬욱의 기존 영화, 혹은 이번 영화보다는 앞으로 개봉될 홍상수 영화('잘알지도 못하면서')가 좀더 적극적인 예시가 될 것 같습니다. 홍상수는 이번에 아주 노골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외부(대중)의 불만에 관한 이야기를 찍는 것 같은데요(물론 이전작들도 대체로 그런 경향이 강했지만요). 지식인의 속물근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또 동시에 관조하며 '짓궂은' 방식으로 성찰하는 홍상수의 스타일이 이번 영화를 분기점으로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거나 혹은 지긋지긋한 '변주'에 머물거나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영화가 될 것 같습니다.

      4. 권위적이며 계몽적이라는 성격
      박찬욱 영화가 그렇게 권위적인 성격을 강조하거나, 대중적인 취향이나 수준을 무시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B급 영화의 스타일을 추구하지만 그러기에는 그 주제가 너무 무거운 영화를 찍고 있다는 점이 이전에는 대단히 창조적인 균열의 에너지로써 영화의 완성도에 기여했다면, 이번에는 그런 자의식 과잉이 영화의 스타일에 소통 불가능한 작위적 코드(바이러스)를 심었던 것은 아닌가 싶어요.

      4-1.
      그런 차원에서 무비토크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저 역시 대중적인 스타일이라는 관습적인 억압이 박찬욱의 영화에 대한 창조력을 높일 수 있는 긍정적인 '조율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점에서 "주류 영화를 만들 때 가장 자신의 진가"가 발휘된다는 내내님의 입장에 매우 공감하게 됩니다.

      5. '창조적 인용'이라는 차원 : [쓰리, 몬스터]의 경우
      저 역시 '쓰리'에서 박찬욱의 에피소드는 굉장히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그 영화에서 기존 영화에 대한 '창조적 인용'의 흔적은 크게 발견하지 못했습니다만(다음에 기회가 되면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 ) '창조적 인용'이라는 차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은 [지구를 지켜라]겠죠. 그리고 이스트우드의 영화적인 연대기 전체, 이안이 장르의 규칙들을 자신의 탁월한 역량으로 재소화하는 그 놀라운 해석력 등이 영화사적으로는 '창조적인 인용'의 관점에서 이야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찬욱의 경우에는 그것이 마치 '아버지의 욕망을 모방하는 불안'(혹은 해롤드 블룸의 관점을 빌자면 자신이 극복해야 하는, 하지만 닮고 싶은 선배의 영향에 대한 불안)을 통해서 '흔적'으로만 영화적으로 형상화된다는 점에서 그 불안이 얼마나 박찬욱이라는 실존의 내부에서 재해석되었는지가 그 영화의 완성도에 반영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차원에서는 앞서 이야기한 이안은 정말 탁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이안은 누구보다 스타일리스트라는 생각을 저 개인적으론 있고, 그렇게 영화적인 형상화에 대한 '융통성'이랄까요? 그런 점에서 박찬욱보단느 훨씬 더 '장인적인 성격'이 높다고 봅니다(그건 이안과 박찬욱의 장단점이겠지요).

      추.
      1. 봉준호를 저평가하시는 이유에 대해서도 나중에 들어볼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 )

      2. 내내님과의 대화, 정리해서 따로 포스팅하고 싶네요. 기존에 제 블로깅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정말 깊이있는 논평을 주시는 고마운 독자들이 계시는데요. 내심 '독자 열전'이라는 타이틀로 내내님과 같은 고마운 독자이자 제 블로깅의 비평가들께 제 나름으로 작으나마 고마움을 표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7. 오르페오 2009/05/06 15:48

    아직 시간이 안 맞아 영화를 보진 못했는데, 기대하고 있습니다.
    민노 씨의 프리뷰를 읽으니 최대한 빨리 보러가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네요. :D
    +)출연 배우 이름이 잘못됐습니다. '김혜숙'이 아니고 '김해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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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5/06 17:31

      그러셨군요. : )
      저는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는 않은데, 제가 오르페오님 입장이라고 해도 호기심을 견디기는 어려울 것 같긴합니다. ㅎ

      추.
      이룬.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 오르페오 2009/05/06 23:26

      네, 어쨌든 강추/비추 어떤 글을 접해도 호기심을 견딜 수 없는 영화는 오랜만이네요. ㅎ

    • 민노씨 2009/05/07 00:47

      그 기분 십분 이해합니다. ㅎㅎ
      스포일러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힌트(?) 하나만 드리자면...
      '걔'는 왜 안죽는지 정말 궁금하더만요...
      뭔가 의미가 있는건가 싶기도 하고...
      뭔가 말려드는 느낌도 없지 않지만요.

      보고 오시면 리뷰 한방 부탁드립니다. : )

  8. 반지성주의 2009/12/15 14:17

    일반 블로거들의 '반지성주의'에 기반한 비평가 매도는 참.

    박찬욱 감독 자신이 평론가 출신이고, 그래서인지 그는 참 평론가들이나 비평가들이 라캉이든 지젝이든 인용하지 않을 수 없게, "스스로 마루타로 갖다바치는" 경항의 이야기와 장면을 짭니다. 거기에 각종 다양한 - 일반관객들은 제목과 감독 이름조차 잘 모르는 - 고전 걸작 영화들을 레퍼런스로 삼으면서요.

    님이 말한 '강단식 비평'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려는 게 아닙니다. 적어도 감독은 모호한 수수께끼로 가득한 어떤 텍스트를 던졌고, 한 평론가는 그에 대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분야의 지식을 택해 이를 해석했습니다. 그런 '강단식 비평'을 비판한다면서 그 비평의 논리적 정합성이나 적절함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그 해석의 틀 자체를 문제삼으며 '익명의 대중의 댓글'를 들어 순환논리의 오류를 범한다면, 나아가 "나는 되지만 남은 하면 안 된다"는 태도를 보인다면 과연 님의 '강단식 비평에 대한 비판'이 과연 어느 정도나 어필할 수 있을까요. 그저 "맞아 그 평론가 싫어, 민노씨 좋아" 정도의 감정적 공감 외에 말입니다.

    일찍이 그 문화평론가는 '반지성주의는 정말로 무지한 사람들이 아니라 책깨나 읽었다는 먹물들이 조장한다'고 통찰한 바 있습니다. 님 글에 나오는 어지러운 이론가들의 이름들을 보니 그 말이 정말 절묘한 지적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전 적어도 님이 언급하고 인용하는 이론가들의 관점에 의거한 님의 해석을 '강단식 비평'이라며 아예 부정할 생각이 없습니다. 아, 님은 강단에 계시는 분이 아니니 '강단식 비평의 변형' 내지는 '비강단식 비평'이라 불러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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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12/15 19:36

      적어도 반론 가능한 '내용'에 대해 근거를 갖고 좀더 구체적으로 논평주시길 바랍니다.
      여기서 이런 모호하고 아리까리한 수사로 투정부리시면 제 글을 비판하는 그 아주 '추상적인 차원의 취지' 자체마저 스스로 실천하시는 것이 될까 우려스럽습니다.

    • 반지성주의 2009/12/16 12:47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 댓글은 '어떤 문화비평가'의 평론에 대해 님께서 '투정'을 부렸다고 자인하시는 것이군요?

      이 글이 애초 <박쥐>와 박찬욱론에 관한 것이었으니 그 부분을 말해보자면, 전 님의 의견보다 댓글다신 분들의 몇몇 의견에 더 동의하지만 님의 의견을 '틀린 의견'이 아닌 '다른 의견'으로서 존중합니다. 그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생각 없고 그걸로 논쟁할 생각도 없습니다. 님이 트뤼포든 고다르든 알랭 레네든 해롤드 블룸이든 데이빗 보드웰이든 누구를 인용하든 말이죠.

      하지만 다른 이의 평론에 대해 논리적 반박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투정'을 부린다면 얘기가 달라지지요. 님은 그 평론가의 비평에 대해 '평론에 텍스트를 (겉핥기로) 짜맞추는, 영화를 마루타로 이용하는' 전형적인 '강단식 비평'이라 비판하면서 그 근거로 자신과 비슷한 느낌을 표출한 댓글을 인용했습니다. 그걸 무려 '대중'의 의견이라며 부풀리기까지 하고 있지요. 자신의 느낌을 표출하고 싶었다면 그냥 누구 평 이래서 싫더라 하면 되지 그걸 객관적인 다수의 의견인 양 포장할 필요는 없는 거죠. 그 분석도 유효했다는 다른 의견에 님이 "그냥 제 느낌이 그래요"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거기에 제가 지적한 건 박찬욱이 원래 그렇게 '마루타로 갖다대기 좋으라고' 영화를 만든단 점이었고요. 이동진의 평에 대해선 <렛 미 인>으로 훌륭히 반증을 하신 분이 '어떤 문화평론가'에 대해선 "전체로서의 작품 속에 스며들지는 못한다."는 한마디 외에/포함해 '모호하고 아리까리한 수사'을 동원해 투정으로 일관하고 계시는데, 여기에 제가 더 반박할 만한 님의 '내용'이란 게 더 있습니까? 님이 논리적 반박이 아닌 투정을 부렸다고 지적한 건데.

    • 민노씨 2009/12/16 15:46

      1. 제 글은 '평론'이 아닙니다. '리뷰'도 아니고, '평론'은 더더욱 아니고, 그저 영화 소개를 위한 '프리뷰'라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이것이 무슨 제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한 것은 전혀 아닙니다. 저는 반지님의 적극적인 논평에 대해선, 그 과도한 공격성이나 내용/논리의 부실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우호적입니다.

      2. 다만 제 '추상적이고, 투정 가득한' 프리뷰에 대해 불만이 계시면 반지님께서 좀더 '내용'있는 반박문을 통해 제 부족함을 채워주시길 바랍니다. 진심입니다. 그러니 제 글이 단순히 "투정"이라고 생각하셔서 그것이 불만이었고, 그것을 지적하신 취지라면, 네, "투정"입니다. 제가 그것을 인정하면 모든 것은 해결된 것인지요? 이런 '취조식' 대화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더욱이 이것은 '하나의 단일한 진실'을 찾는 형사놀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다만 그것을 인정해야 좀더 대화의 깊이나 폭이 넓어질 수 있다면 기꺼이 그걸 인정하겠습니다. "투정"입니다. 그리고 아주 즉흥적으로, 되는대로 쓴 영화소개글, 프리뷰입니다.

      3. 다만 위 본문에서 제가 '트위포'를 인용한 부분에 대해선, 솔직히 여전히 트위포의 입장을 존중하기는 하지만, 영화의 서사성과 문학성에 대해 달리 생각하고 있기는 합니다. 특히나 이창동 영화를 좋아하게 된 이후로는 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트뤼포나 고다르, 블룸을 인용한 기억은 있습니다만, 보드웰이란 분은 누군지 모르겠네요. 어떤 글에서 제가 그 보드웰이라는 학자(?)를 제 글의 배경적 참조로, 혹은 근거로 인용하고 있는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궁금해서요.

      적극적인 논평에 대해선 다시금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런데요. "너 실은 무식하잖아!"라는 것이 반지님 논평이 추구하는 전부라면, "네, 저 무식합니다. 제 무식 때문에 반지님께 불편을 드렸다면 사과드립니다. 그러니 이런 무식한 블로그는 앞으로 피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라고 대답드리겠습니다. 그런 초딩스런 것이 아니라면, 언제든 좀더 대화를 이어가고 싶군요.

      날 추운데 감기조심하시고요... :)

    • 반지성주의 2009/12/18 17:02

      1. 님 글을 '평론'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 말씀하시듯 애초 님의 글이 평론은 아니었으니까요. 제가 주로 사용한 단어가 '비평' '비판'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군요.

      2. 결국 "개인적 잡설일 뿐인데 뭘 그리 빡빡하게 구느냐"가 님의 입장이라면, 그냥 여기서 그만하겠습니다. 전 그냥 가벼운 투정인 것도 모르고 어떤 방식/형태의 비평에 대해 님이 진지하게 문제제기를 하는 걸로 오해했지 뭡니까.

      3. 님은 이 글 및 댓글에서 트뤼포와 해롤드 블룸만을 인용했고, "그들이든 누구든"이라는 의미로 '누구'에 해당하는 사람들에 제가 당장 생각난 고다르 레네 보드웰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저의 문제제기의 의도는 "너 무식해"라거나 "너 글 이래저래" 따위가 아니라, (이 따위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만)

      "어떤 비평 방식 및 그 방식으로 쓰여진 특정글을 대해 논할 때, 유효성과 한계 혹은 단점을 진지하게 논한다고 하면 일단 상대의 존재 자체부터 부정하면 안 되지 않나, 그런데 어떻게 부정을 하면서 그 근거가 고작 '나도 싫고 남들도 싫어해'가 되나, 그 근저에 존재하는 건 결국 반지성주의 아닌가" 입니다.

      이제보니 설마 반지성주의란 말을 '너 무식해'로 받아들인 건가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자 그럼 안녕히.

    • 민노씨 2009/12/18 17:48

      1. 이건 넘어갑시다.

      2. 그것이 제 입장이 아니라, 반지님께서 전한 논평을 접하고 그런 것이 아닌가 추론한 것을 들려드린 겁니다. 점점 대화가 말꼬투리 잡기로 전락하는 것 같아서 유감이네요.

      3. 괄호라고 생각하지 못하셨다는 것이 저로선, 솔직히, 더 놀랍습니다. 가령 괄호에 존재하는 적대적인 조롱투를 의도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는 수사 "이 따위"류의 표현을 쓰신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니... 허허. 이거 참 난감합니다.

      우리 이럴게 아니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보는 건 어떨까요?
      혹시 스카이프 사용하고 계시다면, 비밀글로, 아이디를 알려주세요.
      직접 목소리로 대화하면 이런 불필요한 잡음과 소모가 사라질 수 있겠다 싶어서 청해봅니다.

      아니라면 저도 이 쯤에서 그만하겠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댓글 한방 날려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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