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2007년 겨울, 여전히 홀린 사람들

2007/11/22 17:44
부제 : 기형도, 홀린 사람, 그리고 정치적 상상력

0. 나는 언젠가 기형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들은 모두는 삶과 세계의 고립에 대해, 자신을 둘러싼 그 차가운 피처럼 소름끼치는 세계, 한강 위에는 여전히 평화롭게 유람선 떠 있는 그 대한민국을 둘러싼 그 온갖 거지발싸개 같은 것들의 위선에 대해 진심을 다해 분노했고, 치열하게 증오했다. 때론 이성의 차가운 응시를 통해, 때론 감성에 홀린 듯 취하여 그 모든 것들을 살로 비비듯.. 그들은 세계를 분석했고, 그렇게 노래했다.  (... 중략...) 그의 시는 그 당대에 있어 가장 혁명적인 상상력으로 쓰여진 미학적, 정치적 성취들 중 하나일 것이다.  
- 기형도와 나 중에서
기형도의 시는 미학적인 성취 뿐만 아니라, 지금 다시 돌이켜 생각해도 정치적인 상상력의 성취라고 할만하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최근에 다시 읽은 기형도의 시, '홀린 사람'때문이다.


1. 즐겨찾는 블로그 중에 써머즈님께서 운영하시는 '어쿠스틱 마인드'가 있다. 거기에서 오래된 포스트 하나를 읽었다. 거기에는 기형도의 시, [홀린 사람]이 원문만으로 포스팅되어 있었다. 시를 옮긴 써머즈님의 심중이야 알 길 없다. 다만 그 오래된 시, 그리고 오래된 포스트를 읽는 내 마음은, 이내 우리를 둘러싼 구역질나는 정치적 풍경들로 채워졌다. 그건 정말 섬뜩하면서, 또 씁쓸한 체험이었다.

홀린 사람

                                        - 기형도

사회자가 외쳤다.
여기 일생동안 이웃을 위해 산 분이 계시다.
이웃의 슬픔은 이 분의 슬픔이었고
이 분의 슬픔은 이글거리는 빛이었다.
사회자는 하늘을 걸고 맹세했다.
이 분은 자신을 위해 푸성귀 하나 심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도 자신을 위해 흘리지 않았다.
사회자는 흐느꼈다.
보라, 이 분은 당신들을 위해 청춘을 버렸다.
당신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그 분은 일어서서 흐느끼는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 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 때 누군가 그 분에게 물었다, 당신은 신인가
그 분은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유령인가, 목소리가 물었다.
저 미치광이를 끌어내, 사회자가 소리쳤다.
사내들은 달려갔고 분노한 여인들은 날뛰었다.
그 분은 성난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 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은 실신했다.
그 분의 답변은 군중들의 아우성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2. 정치적 맹목의 풍경들은 여전히 기형도가 살았던 80년대 뿐만 아니라 20여 년이 지난 21세기 대한민국의 풍경이기도 하다. 군중들은 숭배할 권리만을 부여받고 있고, 선거법은 국민들의 입을 틀어막고 있으며, 우리들은 어느새 스스로를 검열하는 감옥으로 들어가 자발적인 수인(囚人)이 된다. 온갖 비리와 온갖 부정부패가 와도, 묻지마 지지는 이어지고, 여전히 높으신 저 위에 계신 어르신들은 '구국의 결단'을 토해내며, 대한민국을 위해선 자신이 가장 필요하다고 외친다. 기형도의 시 '홀린 사람'은 아주 오래 오래 살아남아, 여전히 21세기 대한민국의 말라비트러진 정치의 풍경, 권력의 풍경을 노래하고 있다. 그 시가 이제는 회고적인 교훈으로만, 현실과는 상관없는 잠언으로만 노래되기를 나는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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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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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애시드시티 2007/11/22 22:59

    학교 수업 때 저 시를 배웠는데,
    대충 그냥 이성을 잃은 대중 요정도로만 가르쳐 주었지만
    그것을 현대 이 시점에 대입하니
    잘 다가오네요,
    기형도는 천재시인이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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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7/11/22 23:17

      애시드양 덕분에 무플 면했네요. : )
      기형도는 정말 천재죠.
      꼭 한번 읽어보십시오.
      산문도 참 좋습니다.
      물론 남겨진 책이 몇 권 되지는 않지만요.

  2. 가즈랑 2007/11/23 00:49

    시가 주는 느낌은 처음엔 무척 시끄러운듯 했지만, 좀더 읽어보니 오히려 적막하기까지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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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7/11/23 11:01

      정말이요...
      가즈랑님의 논평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적막하네요, 정말...

  3. 쟈칼 2007/11/23 02:59

    기형도..제가 좋아하는 분인데 ㅎㅎ...그의 글이 아니라..그의 글에서 느낄수 잇는 인간기형도를 말이죠..이분..참 매력있죠...머랄까..기형도는..시인이 되고파서 글을 쓴게 아니라 글을 쓰지 않으면 못 견딜것 같은 어떤고통이 그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들었다는 느낌이랄까..진부한 표현을 하자면..`심금`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

    근데..

    위 글은 첨 보네요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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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7/11/23 11:02

      저도 무척 좋아하는 시인입니다.
      황지우, 기형도, 이성복, 박노해, 정현종.. 시의 시대라고 불리는 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들이고, 그 중에서도 기형도는 아직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아요. : )

  4. 써머즈 2007/11/26 02:47

    시간을 보면 짐작하실 수 있는데, 황우석 사태 즈음에 '정말 기막힌 시'라고 감탄하며 옮겨놓은 것입니다.

    제가 자랐던 환경에서 오래 전부터 듣던 말 중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는데요, 쉽게 표현하자면 '사람을 믿지 말고 그 법(진리)를 믿을 것이요.' 가 그것입니다.

    우리나라 시스템 안에서 보자면 자꾸만 많은 사안들을 인물 중심으로 몰아가고, 사람에 대한 호불호나 개인이 가진 문제로만 해결하려는 것을 전근대적이라 생각하는 제 시각도 여기에 맞닿아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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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7/11/26 03:10

      황우석 파동에 즈음에서 옮기신 '시사적인' 포스팅이었고만요. : )

      말씀 듣고 보니..
      '사람 중심'이라는 가치가 엉뚱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가볍게 스치네요. 정작 사람 중심일 영역에서는 몰인격적인 '수치'와 '통계'를 들이밀고, 제도와 시스템이 강조되어야 할 영역에서는 엉뚱한 '양반'들이 '중심'에 서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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