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전에 썼던 글. 사소하게 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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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다호 (구스 반 산트, 1991)



구스 반 산트가 만든 <아이다호. My own private Idaho>. 내가 말하려고 하는 나만의 개인적이고 은밀한 행복의 풍경이 궁금하다면, ‘아이다호’는 내가 생각하는 행복이 감추어진 깊은 성채로 들어가기 위한 일종의 암호다. 누구나 소망이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 소망을 위해서 살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 소망이 삶을 끈질기게 버티도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삶은 일종의 함정이니까. 자신이 함정에 빠져 있다는 걸 아무도 미리 알 수 없다. 마치 오후의 나른한 낮잠이 악몽으로 갑작스럽게 깨어나듯, 그렇게 삶이라는 뻔뻔스런 악마는 찾아온다.

‘기왕 태어났는데’ 라는 생각은 달리 말하자면, 인생이란 일종의 낭만적인 도박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근사한 옷과 자랑할 만한 직장과 풍족한 돈과 아름다운 로맨스를 누구나 바란다. 나는 그것이 의심할 수 없는 행복의 요소들이라고 생각한다. 훌륭한 가문, 좋은 학벌, 아름답고 현명한 배우자. 이것은 정말 부정할 수 없다. 정말 부정할 수 없는 행복의 요소들이다. 그것들만 가지면 행복이 완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것들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행복할까?

결론은 뻔하다. 그렇지 않다는 것. 이런 질문은 식상해 보인다. 그렇다. 정말 식상하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결론이다. 돈과 권력과 명예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그것들만 있으면 행복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믿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이미 모두 가졌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불행에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목격한다.

“거지는 부자가 되길 원하고, 부자는 왕이 되길 원하고, 왕은 만족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라고 노래하는 한 가수의 노래처럼 정말 그건 진실이다. 욕망은 끝이 없다. 욕망은 그 시작과 끝이, 그 머리와 꼬리가 서로에게 얽혀진 괴물처럼 보인다.

우리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문화적인 틀, 내가 생각하는 행복과 내가 느끼는 행복의 감촉들은 내가 속해있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거푸집을 ‘이미’ 통과한 것들이다. 도저히 그것을 초월할 수는 없다. 나는 일종의 도자기와도 같은 것. 누군가가 나를 틀 위에 올려놓고 빙빙 돌리고 있다. 그 누군가의 이름은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것을 그저 문화라고 추상화시켜서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지만 분명히 실재하는, 문화라는 가마에서 만들어진, 그리고 만들어지고 있는 도자기들이다. 우리의 빛깔은 모두 저마다 다르고, 그 질감과 무게도 모두 제각각 이지만, 문화라는 주형을 통과해서, 지금도 천천히 그 주형 속의 열기를 견디며,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에는 다를 바 없다.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는 문화를 통해서 사유하고, 고민하고, 행복을 느낀다. 절대적인 진실은 절대적인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이다. 문화는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문화라는 거푸집의 한계 안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는 우리는, 우리가 도착해 있는 역사적인 지점을 생각해야 한다.

21 세기의 초입, 자본주의, 분단국가, 서울... 그래서 내가 경험하는, 내가 꿈꾸는 행복은 나의 행복이면서, 나 아닌 것들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진 행복이다. 나는 그것에 저항할 수 있지만, 그 저항은 이미 패배가 예정된 비참한 게릴라전에 불과하다. 차라리 긍정적으로 끌어안고, 그 열기에 이끌리면서 스스로를 견고하게 하는 편이 현명하다.

이 모든 것들, 내가 나의 행복을 말해야 할 때, 그 행복을 가두고, 제한하는 우연과 필연들을, 나는 인정한다고 이미 말했다. 이제는 내 행복의 키워드를 말해주려고 한다. 그것은 아주 평범하다. 당신은 나로부터 아주 지겹도록 식상한 대답을 다시 듣게 된다. 그건 <아이다호>에서 주인공이 그토록 궁금해 하는, ‘노말 패밀리. normal family’ 다. 나는 행복이란 함께, 서로를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거창하게 말하면 그건 ‘공동체’ 다 .


우리는 관계 맺고 있다.
그 관계가 없으면 우리는 이미 우리가 아니다.
내가 소망하는 행복은 그 ‘관계’의 풍경 속에 있다.

가장 흔한 건 저녁식사를 하는 한 따뜻한 풍경일거라고 생각해. 쉽게 말해서 노말 패밀리. 그렇지만 그건 끊임없이 확장하고, 가지를 퍼뜨리는 나무의 뿌리와도 같은 것, 어떤 상징적인 원형으로서의 의미이다. 그것은 반복해서 말하자면, 공동체의 원형적인 공간이며 시간인 것이다.



추. 
위 본문 '노말 패밀리'는 그저 비유이며 상징입니다.
저 결혼제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 확장점
필그레이,아이다호 (My OWN PRIVATE IDA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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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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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ince 2007/06/20 08:42

    전 결혼이 목표는 아니더라도, 가장 큰 꿈 중 하나였다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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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7/06/20 09:17

      그러셨고만요. ^ ^
      것도 좋죠~!
      전 그걸 바라기엔 부족함이 너무 커서리... ㅡㅡ;;

  2. 필그레이 2007/06/20 13:06

    누구나 환상을 가지고 있나봅니다.가지거나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아이다호에 나오는 리버 피닉스는 그런 일상적인 따뜻함을 원했을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잘 읽고 갑니다.^^ 정은님 아나운서와 리버피닉스가 같은 하늘위에 있을거란 생각을 하니 괜스레 안시밍 되네요.이런 유치한 생각을...ㅋㅋㅋ

    정성일씨가 언젠가 정은임 아나운서를 저세상으로 보내면서 쓴 글귀가 기억에 남아요.아이다호를 설명하면서 빝나던 말씨와 눈빛이...말이예요.암튼...잊고살던 정은임씨와 리버 피닉스가 떠오르는 나른한 오후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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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7/06/21 01:18

      요즘도 종종 정은임과 정성일의 심야라디오 방송을 듣던 그 때가 떠올려집니다.... 리버는 정말 따뜻함을 원했을 것 같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누구나 그런 것 같아요.. 정말. : )

  3. 바로 2007/06/26 02:56

    후...스팸 트래백 정리하다가 같이 지워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좀 보내주셔요.ㅠㅠ
    글을 너무 예쁘게 정리하신듯 합니다. 이런 일을 하면서, 민노씨님이 모종의 제안 (예를 들어서 단체 저항운동이라던지 혹은 서명운동같은 것)을 하였다면 더 좋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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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7/07/02 15:49

      앗! 이제야 바로님의 댓글을 봤네요.
      그런데 다시 보내달라는 글이 어떤 글인지요? ^ ^;;
      제가 자주 깜빡깜빡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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