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는 것과 기억해야하는 것 (소요유)

한국 저널리즘, 아니 의미 유통에 직간접으로 관여하는 총체적인 메카니즘, 그 시스템 자체가 ‘기억’과는 친하지 않다. 특히나 공식적인 기억시스템의 중핵으로 작동하는 저널리즘의 망각증은 심각해서 어떤 의미(사건)가 완결적으로 종료되었다는 인식을 얻은 경험은 우리에게 전무하다시피 하다. 특히나 이런  ‘망각’의 메카니즘이 권력(기득권)의 필요에 의해 조율되고 있다는 점은 이 망각 시스템의 가장 아픈, 비극적인 요소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한 것이다. 이 망각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기억이 소멸되기 전에 그 기억의 의미들을 내면화할 수 있도록 얼마나 효과적으로 싸울 것인가? 우리 시대에서 가장 의미있는 싸움은 망각에 저항하는 싸움이다. 인간을 인간일 수 있게 하는 그 모든 의미들이 실존의 주형을 통과하지 못한 채 망각 시스템 속으로 급하게 빨려들어간다. 의미의 출발점이자 종착지인 한 인간의 실존적 기억도 마치 '이슈 상품'의 싸구려 부속품처럼 이내 지워진다.

대한민국은 그 자체로 가장 거대한 망각 시스템이다. 그 망각에 가장 결정적으로 관여하는 건 말할 필요 없이 권력이다. 그 권력의 이름은 '이명박'으로 호칭되기도 하고, '조중동'으로 불려지기도 하며, '삼성'이나 '재벌' 때론 '대법원'이나 '언론' 등으로 이야기되기도 한다. 우리는 그 망각에 저항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동조하고, 방조한다. 소녀시대와 동방신기로 동조하고, 일박이일과 무한도전으로 동조하고, 블로거로서 이야기한다면, 새로운 트래픽 사냥감에 아직 교훈을 얻지 못한 그 기억들을 기끼어 버림으로써 그 망각에 동조한다.

소요유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미네르바 구속의 의미는 신동아의 진짜/가짜쇼가 잡아 먹고, 용산참사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공권력의 야만은 강호순의 얼굴이 잡아 먹는 망각의 순환이 일어난다. 신영철은 WBC가 잡아 먹고, 장자연 리스트는 박연차 리스트와 북한 로켓쇼가 잡아 먹는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어떤 기억의 교훈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어떤 고민의 기억도 우리 안에 내면화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영겁회귀하는 사건의 원형들만 '시트콤'의 무대처럼 반복된다. 권력은 여전히 거기에서 이 망각을 조율하고, 지리리 궁상인 시민들은 자신들이 이 무대의 주인공이라는 착각 속에서 철저하게 구경꾼으로 전락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유명한 라틴어 격언이다. 이 격언을 차용한 '메멘토'라는 유명한 영화도 있고, '메멘토 모리'를 부제로 삼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도 있다(사족. 이 영화는 미국 영화 '메멘토' 만큼 걸작이다). '죽음을 기억하라', '(당신의) 죽음을 상기하라'는 이 격언은 인간의 유한성, 인간은 필연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는 그 절대적인 한계를 이야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살아 있는 동안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적으로 이야기한다. 우리는 많은 것을 기억할 수도 없고, 그 기억들 역시 언젠가는 망각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기억해야 하고, 우리가 분노했던, 우리가 고민했던, 우리가 즐겁게 더불어 환호했던 그 모든 의미들을 기억하려고 애써야 한다. 특히나 유희는, 즐거움은 그 자체로 해소되는 성격들의 의미다. 그 기억들은 그저 우리에게 쾌락과 즐거움을 주고, 그 임무를 다해 버린다. 하지만 고통은, 파괴는, 상실과 허무는 우리에게 그 의미들을 외면하게 만드는, 그 고통과 상실의 대상들을 피하게 하는 성향을 갖는다. 하지만 우리는 대면해야 한다. 그리고 좀더 끈질기게 그 의미들을 붙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블로거로서 제안하고 싶은 건 메멘토 리스트다. 블로거들 각자가 자신들의 '메멘토 리스트'를 만들어 보자. 물론 그건 혼자만 해야 하는 건 아니고, 더불어 함께 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그게 '장자연 리스트'여도 좋고, 새드개그맨이 여전히 붙잡고 있는 '미네르바'여도 좋다. '용산참사'여도 좋고, 기성언론에 의해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는 '저작권법 개정안'이어도 좋겠지. 나는 요근래 '삼성전기 성희롱 사건'에 대해 좀더 오래 기억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에게 머물렀던, 그런데 망각시스템에 의해 그토록 허무하게 지워져버린 그 의미들, 우리가 분노했던, 우리가 그토록 애착했던 의미들을 우리는 좀더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사건들은 우리마저 기억하지 않으면 더 쉽게, 더 아무렇지 않게 지워질 기억들이다.  그건 인간을 인간일 수 있도록 하는 실천이면서 싸움이다. 그것은 '해변의 낙서처럼 지워져가는 인간(휴머니티)이라는 발명품'(푸코, 말과 사물)의 유통기간을 조금이나마 더 늘리는 길이다. 그 싸움이 사라지면, 인간도 비로소 사라져버릴 것이다.


* 발아점
잊혀지는 것과 기억해야하는 것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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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 망각보다 더 무서운 그리고 망각보다 더 편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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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자로의권리는 모두다 공평하고 남은(산) 사람에게 있어서 똑같이 망각의 기회를 주는것에 있다. 다만 거기엔 의식적인 망각이냐 무의식적인 망각이냐의 차이가 있을뿐이다. 그전에 망각을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것인가. 살인을 한 범죄자가 피해자의 얼굴을 망각하지 못한다면 그것만큼의 무서운 형벌은 없을것이다. 범죄자 자신이 죽기 전까지 지속된다면 범죄자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 모른다. 이런 단순한 공포는 바로 망각여부에 기인한다. 정신병가운데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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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띠보 2009/04/06 22:52

    앗.. 사상 처음 첫 댓글이군요.. 히히
    김태용 감독이 연출한 두 번째 이야기는 저도 좋아하는 영화에요..
    취업 준비 때문에 한겨레출판에서 나온 <배신>을 30분 전에 읽고 있던 중이었는데 그 책이 작년 9월에 나왔거든요. 첫 장에 김용철 변호사가 나왔는데 너무 오래전 일처럼 느껴져서 뜨금했었어요.
    포스팅 전반 부 읽으면서 위젯형 리스트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제 예측이 비슷하게 맞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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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4/07 00:11

      댓글 놀이 일등.. 뭐 이런 느낌으로 쓰신 것 같은데요.. ^ ^;;
      저로선 무플 면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런 느낌으로 답글을 남겨야 할 것 같습니다. ㅎㅎ.

      위젯을 굳이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참 좋겠네요. : )
      저로선 나름 계속해서 강조하는 바대로 어떤 이슈가 과연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혹은 너무 쉽게 지워져버린 것은 아닌지를 좀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뭐 이런 것입니다...;; 너무 쉽게 이슈가 이슈에 잡아 먹히고, 또 그렇게 망각 속으로 지워지고가 반복되는 것 같아서 말이죠...;;;;

  2. bayles 2009/04/08 00:34

    언론이라던가 정치같은 문제와는 좀 동떨어진 생각입니다만,

    아주 예전에 써놓았던 일기장이나 여기저기 나뒹굴던 수첩을 들쳐볼때면, 망각 저편으로 사라진 과거의 일들이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어서 행복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무섭기도 하죠.

    내 기억은 철저한 야생의 먹이사슬에 묶여있구나. 강한자가 약한자를 잡아먹듯이, 큰 기억이 작은 기억을 으깨는 그런 기억의 먹이사슬 말예요. 나는 아니라고 그럴리가 없다고 강한 부정을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마저도 한낯 기록으로 퇴화해 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체념할 수 밖에 없었죠.

    하지만 반면에 그러면 그럴수록 더 치열하게 모조리 기억하고 싶다는 욕심도 들어요. 싫은것도 좋은것도. 그래서일까요? 저는 하루하루를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쓰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면서 편집증적인 욕심을 부리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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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4/08 00:49

      이 답글도 좀 딴 얘기 같기는 합니다만, 기억이라는 게 어쩔 수 없이 '대상적'인 속성을 갖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마르틴 부버의 어투를 빌자면, 본질적이거나 현재적이지 않기 때문에, 현상적이고, 대상적인 것 같달까... 그래서 좀더 강한 기억들 간의 위계와 순위가 생기고, 그렇게 기억들의 제로섬 게임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좀 씁쓸하기도 하고, 좀 무섭기도 한데...

      일반의 어감으로 이야기하는 정치적인 싸움이나 사회적인 싸움의 영역 이외의 영역, 가령 bayles님께서 말씀하시는 각자의 내밀한 '일기장'과 같은 사적 영역 속에서도 이런 기억들 간의 싸움은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저 같은 경우에는 이제는 좀 지우고 싶은 '연애에 대한 기억들'이... 쉽게 지워지지 않네요...;;;;;

  3. 민노씨 2009/04/08 00:49

    * 시퍼렁어님의 글 추천 링크 보충.
    http://ddasik99.tistory.com/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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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퍼렁어 2009/04/08 10:04

      아이고 졸필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4. leopord 2009/04/08 23:27

    망각이야말로 최고의 적(?)인지도 모르겠어요. 기억한다는 것은 시간과의 투쟁이기도 하고, 사실은 망각하고 싶어하는 욕망과의 투쟁이기도 하고. 쉽지 않은 길입니다만. 그런데 메멘토 리스트, 좋은 아이템이란 생각이 들어요. 블로그 리스트 한쪽을 차지한. 마치 메모지 같은 느낌도 들겠군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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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4/09 01:16

      leopord님께서도 메멘토 리스트 만들기에 동참해주시죠! ㅎㅎ
      어찌보면 이런 의식적인 작업이 필요할 만큼 기성언론에서 사안을 제대로 완료시켜주지 못하고, 사회시스템 전부가 마치 블랙홀처럼 망각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점이 참 씁쓸할 따름입니다. 물론 우리들 역시나 '방조자'들이긴 하지만요..;;;

  5. leopord 2009/04/10 17:15

    부족하지만 트랙백 걸었습니다. 앞으로 메멘토 리스트가 어떤 형태가 될지는 잘 모르겠네요. 차근차근 해나가면서 고쳐가는 작업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ㅎㅎ; 덕분에 좋은 기획을 만나게 되어 제가 더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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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4/11 02:28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 )
      leopord님처럼 블로거 각자가 자신의 주제, 자신의 기억을 붙잡는 노력은 가장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장차로는 띠보님의 말씀처럼 '위젯'형태로 나와서 블로거들을 연계시켜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요.

  6. 멀더 2010/08/14 19:48

    좋은글 감사합니다 망각에 길들여진 사회가 다시금 안타까워 집니다
    망각의 확대 재생산이랄까요... 모르는것이 약이다 이런말이 덕담처럼 통용되는 망각의 시스템 그리고 여담이지만 너무나도 치열한 사회 구조 시스템이 사람들을 망각의 늪으로 몰아가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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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나은 2010/08/15 21:08

    난 잘 못잊어서 탈인데 ㅠㅠ
    아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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