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캡콜드(capcold)님의 책, 대중문화에 대한 2008년 결산 중 '책' 부분에서 바통 받습니다. : )
http://capcold.net/blog/2378
2008년에 무슨 책을 읽었더라...
떠올려보니 뻔하다.
구입해서 읽은 책은 몇 권도 안된다.
책 편집증이라고 할 만큼은 아니겠지만, 책을 굉장히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다. 발터 벤야민이나 장정일 같은 이들을 부러워했던 시절. 그네들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것 같은 그런 시절. 우아하고, 신비로운, 혹은 괴팍한 책 편집증 환자(?)들에게 가족같은 동질감을 느끼던 시절...
그 시절 가장 닮고 싶었던 '독서가'는 김현이었다.
그는 삶이 그 자체로 '독서'였다.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는 일종의 책에 관한 보물섬과 같은 책이었는데, 그 책 속에서 김현이 '행복하게' 읽었던 책들은 거의 모두 사서 읽었던 것 같다.
아주 오래된 기억들이다.
그런 시절은 갔다.
20대 중반 이후로 일년에 열권 이상의 책을 사서 읽은 해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물론 다른 목적의 공부를 위한 책은 제외하고... 그저 읽고 싶어서 읽는 그런 책 말이다.
강유원은 [책과 세계]에서 현대인이 갖는 '책에 대한 강박'을 이야기한다. 세계와 나 사이의 일체성이 사라진다. 세상에 밀착했던 나는 이제 세상과 분리되어 세상을 대상화시킨다. 그리고 세상을 재현한 '텍스트'가 출현한다. 책이 대표적이다. 그건 불행의 징조다. 그 텍스트는 세상을 온전히 재현하지 못한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고, 그런데 그 책은 세상에 대해 더 커다란 오해들을 부추긴다. 악순환이 벌어진다.
내가 책을 읽는 목적은 그저 호기심이나거 지적인 속물근성의 관성이거나, 혹은 그저 심심해서일테다.
나는 아직도 가장 낮은 수준의 독서가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편이다.
나는 왜 책을 읽나...
잘난척하고 싶어서, 자극을 받고 싶어서, 에너지 만땅으로 채워서 폼나는 글을 쓰고 싶으니까... 이런 저런 이유들이 있겠지만, 책은 마치 연애와 비슷해서 그저 불가피하게 끌리는 그런 마력이 존재하기도 하는 것 같다. 어느 순간 사랑에 빠지는 그런 것... 물론 언제나처럼 실증을 내기도 하지만.
그런 책은 별로 많지 않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세상을 좀더 풍부하게 느끼기 위해, 대상을 관계 속에서 입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인데, 그건 달리 말하면 '당신과 좀더 좋은 관계'를 맺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는 쉽게 지워지기도 한다. 책을 통해서 당신을 지배하고 싶거나, 유치하게 말하면 뻐시고 싶어서 책을 읽기도 하는거다.
내 저열한 지적 속물근성을 떠올리면, 일요 화가풍의 지적 허위의식은 마치 내 그림자 처럼 나를 쫓아다닌다. 나는 그게 싫다. 왜냐하면 그건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절대적인 표피들이기 때문이다. 가령 가방 끈 긴 소위 지식인들의 가든 파티에서 악세사리를 대신해서 반짝거리는 그런 거. 그게 싫다. 내가 그런 유치한 지적 속물근성의 관성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더 그럴테다.
역시나 서설이 필요이상으로 길어졌는데...;;;;
이하 내가 2008년에 읽은 책들을 생각나는대로 적어본다.
순위 같은 건 없고, 그냥 떠오르는대로 쓴다.
이 어마어마하게 유명한 책(이 책을 이렇게 유치하게 소개하는 것도 참 재밌긴 하다)을 처음 읽은 건 2007년이다.
처음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읽었을 때는 이건 그냥 그럴 듯한, 그런데 실은 너무도 허무한 철학적 신비주의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혹은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의 비전에서 [나와 너]가 갖는 매혹들은 거세시킨 몽상가 아저씨의 넋두리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니 처음 일독의 느낌은 별 울림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구절을 블로그(그게 미투데이였던 것 같기도 하고, intherye 블로그였던 것 같기도 하다)에서 읽고,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구절이 너무 매혹적이었던 거다. 그 매혹적인 구절들을 어찌하여 나는 발견하지 못했던 걸까....
그래서 다시 읽었다.
한번 읽고 지워버릴 책은 아예 처음부터 읽지 않는 편이 좋다.
예전에는 억지로 억지로 그렇게 독서의 전리품으로, 마치 전투하는 것처럼 책을 읽었지만, 그런 독서는 정말 부질없다. 정말 정말 부질없다.
이 책은 올해 두 번 다시 읽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다시 읽을 것 같다.
아무튼 그 매혹적인 구절로 다시 돌아가서, 그 구절을 인용해본다.
좀 길지만 그 구절은 이렇다.
정현종과 크리슈나무르티, 그리고 마르틴 부버의 책들은 서로 닮아 있다.
어떤 텍스트의 의미를 추출해서 그것들을 동일한 평면에서 기계적으로 비교하는 건 굉장히 위험하고, 흔히 천박한 일이 되기 쉽다. 그렇지만 '이미지'와 '관계' 그리고 '공간'을 사고하는 정현종과 크리슈나무르티, 그리고 마르틴 부버는 왜 어떻게 다르고, 그 사유의 풍경들은 어디에서 갈라지는지를 나는 종종 떠올리곤 했다.
아주 무식하게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부버는 사랑은 '나'와 '너' 사이에 있다고 말한다.
그 사랑에는 배타성이 생긴다.
정현종은 부버와 유사하게 행복은 이미지이며, 그것은 우리 속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들은 (필연적인) 고통 속에서 (생겨난 어떤 공감들로) (서로) 사랑하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크리슈나무르티는 좀 다르다.
그리슈나무르티는, 마치 강유원이 텍스트가 온전한 일체로서의 나와 대상 사이의 일치를 허물어 뜨리는 불행의 징후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나와 세계의 부조화, 세계의 대상성을 지워버리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건 책을 지우라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 전언은 부버가 '나-너'와 '나-그것'으로 나눈, 그러니 '근원어'로 세상을 분리하는 것과도 흡사하다.
역시나 정리가 안되는데...;;;
아무튼 정현종과 크리슈나무르티, 그리고 마르틴 부버가 이야기하는 바는 궁극적으론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다.
나는 그게 '허무'라고 생각한다.
세계와 인간의 분리로부터 탄생한 허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그들은 이야기한다.
물론 그 결론 역시 허무다.
여전히 나에게는 그렇다.
세상은 너무 엿같다.
"광적으로 잔인한" 세계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에 대해, 그래서 인간을 지우는 방식으로 진화하는 세계 속에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조건들에 대해 그들은 천착한다.
........
독서라는 건 어떤 활자들이 암시하고 있는 상징의 조합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에 불과할테지만, 어떤 순간들엔, 그 책이 말하는, 노래하는, 절규하는 목소리가 내 몸 속에 스며들어 불덩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이 책은 그런 기적같은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그건 정현종이 이야기한 것처럼 "책을 숨쉬는" 체험이다.
추.
하지만 여전히 나는 이 책 보다는 [나와 너]를 더 좋아한다.
좋아한다,는 게 어떤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 이 바통글도 다섯 번으로 나눠 써야할 것 같다...ㅡㅡ;;;
* 알라딘 5950원 (딴데서 더 싸게 파는지는 몰겠다. 암튼 여기선 30% 할인하고 있더라)
* 가즈랑님께서 이 글에 바통을 받아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얼핏...ㅎㅎ
* 발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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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책과 나
2008년에 무슨 책을 읽었더라...
떠올려보니 뻔하다.
구입해서 읽은 책은 몇 권도 안된다.
책 편집증이라고 할 만큼은 아니겠지만, 책을 굉장히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다. 발터 벤야민이나 장정일 같은 이들을 부러워했던 시절. 그네들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것 같은 그런 시절. 우아하고, 신비로운, 혹은 괴팍한 책 편집증 환자(?)들에게 가족같은 동질감을 느끼던 시절...
그 시절 가장 닮고 싶었던 '독서가'는 김현이었다.
그는 삶이 그 자체로 '독서'였다.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는 일종의 책에 관한 보물섬과 같은 책이었는데, 그 책 속에서 김현이 '행복하게' 읽었던 책들은 거의 모두 사서 읽었던 것 같다.
아주 오래된 기억들이다.
그런 시절은 갔다.
20대 중반 이후로 일년에 열권 이상의 책을 사서 읽은 해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물론 다른 목적의 공부를 위한 책은 제외하고... 그저 읽고 싶어서 읽는 그런 책 말이다.
강유원은 [책과 세계]에서 현대인이 갖는 '책에 대한 강박'을 이야기한다. 세계와 나 사이의 일체성이 사라진다. 세상에 밀착했던 나는 이제 세상과 분리되어 세상을 대상화시킨다. 그리고 세상을 재현한 '텍스트'가 출현한다. 책이 대표적이다. 그건 불행의 징조다. 그 텍스트는 세상을 온전히 재현하지 못한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고, 그런데 그 책은 세상에 대해 더 커다란 오해들을 부추긴다. 악순환이 벌어진다.
내가 책을 읽는 목적은 그저 호기심이나거 지적인 속물근성의 관성이거나, 혹은 그저 심심해서일테다.
나는 아직도 가장 낮은 수준의 독서가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편이다.
나는 왜 책을 읽나...
잘난척하고 싶어서, 자극을 받고 싶어서, 에너지 만땅으로 채워서 폼나는 글을 쓰고 싶으니까... 이런 저런 이유들이 있겠지만, 책은 마치 연애와 비슷해서 그저 불가피하게 끌리는 그런 마력이 존재하기도 하는 것 같다. 어느 순간 사랑에 빠지는 그런 것... 물론 언제나처럼 실증을 내기도 하지만.
그런 책은 별로 많지 않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세상을 좀더 풍부하게 느끼기 위해, 대상을 관계 속에서 입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인데, 그건 달리 말하면 '당신과 좀더 좋은 관계'를 맺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는 쉽게 지워지기도 한다. 책을 통해서 당신을 지배하고 싶거나, 유치하게 말하면 뻐시고 싶어서 책을 읽기도 하는거다.
내 저열한 지적 속물근성을 떠올리면, 일요 화가풍의 지적 허위의식은 마치 내 그림자 처럼 나를 쫓아다닌다. 나는 그게 싫다. 왜냐하면 그건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절대적인 표피들이기 때문이다. 가령 가방 끈 긴 소위 지식인들의 가든 파티에서 악세사리를 대신해서 반짝거리는 그런 거. 그게 싫다. 내가 그런 유치한 지적 속물근성의 관성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더 그럴테다.
역시나 서설이 필요이상으로 길어졌는데...;;;;
이하 내가 2008년에 읽은 책들을 생각나는대로 적어본다.
순위 같은 건 없고, 그냥 떠오르는대로 쓴다.
1.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 정현종 옮김 / 물병자리)
이 어마어마하게 유명한 책(이 책을 이렇게 유치하게 소개하는 것도 참 재밌긴 하다)을 처음 읽은 건 2007년이다.
처음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읽었을 때는 이건 그냥 그럴 듯한, 그런데 실은 너무도 허무한 철학적 신비주의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혹은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의 비전에서 [나와 너]가 갖는 매혹들은 거세시킨 몽상가 아저씨의 넋두리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니 처음 일독의 느낌은 별 울림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구절을 블로그(그게 미투데이였던 것 같기도 하고, intherye 블로그였던 것 같기도 하다)에서 읽고,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구절이 너무 매혹적이었던 거다. 그 매혹적인 구절들을 어찌하여 나는 발견하지 못했던 걸까....
그래서 다시 읽었다.
한번 읽고 지워버릴 책은 아예 처음부터 읽지 않는 편이 좋다.
예전에는 억지로 억지로 그렇게 독서의 전리품으로, 마치 전투하는 것처럼 책을 읽었지만, 그런 독서는 정말 부질없다. 정말 정말 부질없다.
이 책은 올해 두 번 다시 읽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다시 읽을 것 같다.
아무튼 그 매혹적인 구절로 다시 돌아가서, 그 구절을 인용해본다.
좀 길지만 그 구절은 이렇다.
당신은 하늘의 별을 바라볼 때, 거기엔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고 있는 당신이 있다. 하늘은 빛나는 별들로 넘치고 서늘한 공기가 있으며 그리고 당신이 있다. 즉 관찰자이고 경험자이고 사고자이며 활동하는 심장을 갖고 있는 당신, 중심이며 공간을 만들어내는 당신이 있다. 당신은 당신과 별들 사이의 거리(공간), 당신과 아내, 남편 또는 친구 사이의 거리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지 없이 무엇인가를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또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당신이 모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당신은 그것에 관해 말하고 그것에 관해 쓰지만, 드물게 완전히 자기를 포기할 때를 제외하면 당신은 그것에 대해 안 적이 없을 것이다. 그것 주위에 공간을 만들어내는 중심이 있는 한, 거기엔 사랑도 아름다움도 없다. 아무 중심도 아무 주위도 없을 때 사랑이 있고, 당신이 사랑할 때 당신이 아름다움이다.정현종은 시 속에서 사랑이나 행복이란 건 '이미지'라고 말하고 있는데, 가령 [나는 별 아저씨] 속의 산문시 연작인 '노트 1975' 중 3은,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시인데, 이렇다.
상대편의 얼굴을 볼 때 당신은 중심에서 보고 있는 것이며, 그 중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리를 만들어내어 우리의 삶이 이다지도 공허하고 무감각한 것이다. 당신은 사랑이나 아름다움을 경작할 수 없고 진리를 만들어낼 수도 없지만, 만일 항상 자신이 하고 있는 바를 안다면, 당신은 앎을 경작할 수 있으며 그 앎으로 인해 쾌락, 욕망, 슬픔, 완전한 고독, 인간의 권태의 본질을 알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당신은 '거리(공간)'라고 불리는 것과 만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당신과 당신이 바라보는 것 사이에 거리가 있을 때 거기엔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당신이 세계를 개혁하려 하거나 새로운 사회 질서를 가져오려고 해도 또한 아무리 당신이 개선에 관해 말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다면 당신은 단지 심한 괴로움만 만들어낼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당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지도자도 없고 선생도 없으며 당신에게 해야 할 일을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신은 이 광적으로 잔인한 세계에 홀로 서 있다.
- 크리슈나무르티, '있는 그래도 바라보기',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중에서, pp148~150.
행복은 행복의 부재를 통해서만 존재하기 시작한다.
행복은 불행이 낳은 천사이며 이미지이다. 그것은 항상 이미지로서 존재한다.
그런데 행복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즉 행복이라는 이미지는 '우리' 속에서 탄생한다.
고통 속에 있는 우리들의 불가피한 사랑 속에 내재하는 행복의 이미지.
- 정현종, 절망 할 수 없는 것조차 절망하지는 말고 : 노트 1975 중 3, [나는 별 아저씨] 중에서
정현종과 크리슈나무르티, 그리고 마르틴 부버의 책들은 서로 닮아 있다.
어떤 텍스트의 의미를 추출해서 그것들을 동일한 평면에서 기계적으로 비교하는 건 굉장히 위험하고, 흔히 천박한 일이 되기 쉽다. 그렇지만 '이미지'와 '관계' 그리고 '공간'을 사고하는 정현종과 크리슈나무르티, 그리고 마르틴 부버는 왜 어떻게 다르고, 그 사유의 풍경들은 어디에서 갈라지는지를 나는 종종 떠올리곤 했다.
아주 무식하게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부버는 사랑은 '나'와 '너' 사이에 있다고 말한다.
그 사랑에는 배타성이 생긴다.
정현종은 부버와 유사하게 행복은 이미지이며, 그것은 우리 속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들은 (필연적인) 고통 속에서 (생겨난 어떤 공감들로) (서로) 사랑하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크리슈나무르티는 좀 다르다.
그리슈나무르티는, 마치 강유원이 텍스트가 온전한 일체로서의 나와 대상 사이의 일치를 허물어 뜨리는 불행의 징후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나와 세계의 부조화, 세계의 대상성을 지워버리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건 책을 지우라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 전언은 부버가 '나-너'와 '나-그것'으로 나눈, 그러니 '근원어'로 세상을 분리하는 것과도 흡사하다.
역시나 정리가 안되는데...;;;
아무튼 정현종과 크리슈나무르티, 그리고 마르틴 부버가 이야기하는 바는 궁극적으론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다.
나는 그게 '허무'라고 생각한다.
세계와 인간의 분리로부터 탄생한 허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그들은 이야기한다.
물론 그 결론 역시 허무다.
여전히 나에게는 그렇다.
세상은 너무 엿같다.
"광적으로 잔인한" 세계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에 대해, 그래서 인간을 지우는 방식으로 진화하는 세계 속에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조건들에 대해 그들은 천착한다.
........
독서라는 건 어떤 활자들이 암시하고 있는 상징의 조합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에 불과할테지만, 어떤 순간들엔, 그 책이 말하는, 노래하는, 절규하는 목소리가 내 몸 속에 스며들어 불덩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이 책은 그런 기적같은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그건 정현종이 이야기한 것처럼 "책을 숨쉬는" 체험이다.
추.
하지만 여전히 나는 이 책 보다는 [나와 너]를 더 좋아한다.
좋아한다,는 게 어떤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 이 바통글도 다섯 번으로 나눠 써야할 것 같다...ㅡㅡ;;;
* 알라딘 5950원 (딴데서 더 싸게 파는지는 몰겠다. 암튼 여기선 30% 할인하고 있더라)
* 가즈랑님께서 이 글에 바통을 받아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얼핏...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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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창으로 순간 이동!으,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책을 읽기가 아주 힘들어졌습니다....ㅠ
예전에는 집에서 회사까지 거리가 좀 되서 (무려 2시간!!) 2일에 한권은 소화가 가능했는데 말이죠...ㅠ_ㅠ
요즘 좀 이상한 버릇이, 집안 곳곳에 책을 숨겨두고 자꾸 찔끔찔끔 읽어서 다들 반쯤만 읽어버리는 이런 이상한....ㅠ
우와, 굉장한 속독이십니다.
느무느무 부럽네요... ㅎㅎ
저는 책을 굉장히 느리게 읽는 편이라서 말이죠.
저도 열 권이 있다면 그 중 두 세권을 빼놓고는 완독하지 못하는 편입니다. 읽다가 말죠, 대개는... ㅎㅎ
저도 책을 올해는 거의 못봤는데...그래도 바통 받아서 꼭 이어서 올려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딜리셔스는 어떻게 올리신 건가요? 딜리셔스가봐도 딱히 찾질 못하겠네요.
감솨~! ㅎㅎ
딜리셔스는 너바나나님 블로그를 참조하시면 아주 간단합니다. : )
저도 어디에 붙어 있나 못찾고 있었는데, 구석탱이에 아주 간단히 셋팅할 수 있는 단추가 있더라구요.
참조 링크 : http://www.nirvanana.com/383
* 아리까리한 문장들 사소한 추고... 및 오타 수정.
전 어릴때부터 책읽는걸 좋아해서 ^^ 나중에 시간 없어지면 저도 책에서 멀어지려나요 ㅠ
(이미 지금 시작되었다고도..-_- 사고 싶은 책은 많은데 다 읽지는 못하고 있어요 ㅠ)
ㅎㅎ 그러시고만요.
그나저나 덱스터 시즌3이 마무리되서리 여간 아쉬운게 아닙니당.
크리슈나무르티... 이름만 많이 들어본 분이네요. 인용한 부분을 읽으니 불교의 그것과 상통하네요. 허무라고 하셨는데, 기존의 인식의 틀로 보면 허무지만, 이는 오해라고 하더군요. 허무가 아닌 가능성이라고 합니다.
그렇고만용.
해석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은 아니라서요...^ ^;
물론 권위의 위계는 있겠지만요..
!@#... 가볍게 넘긴 바통에 이렇게 대박 시리즈로 받아주시다니, 이렇게 훌륭한 일이... :-)
이렇게 과한 농담을... : )
민망뻘쭘한 가운데 고맙습니당. ㅎ
이런.. 맥루헌을 너무 열심히 읽은걸까요.
시각적인 문자사용으로 인한 감각의 분리를 경험한 인간의
표본을 위의 세명이 그대로 보여주는 기분이 듭니다.
제가 과문한 탓이겠습니다만...
논평이 너무 함축적이라고 느껴져서 말이죠. ^ ^;;
정확히 취지를 읽기가 좀 어렵습니다...
나중에 혹여라도 다시 와주신다면 좀더 풀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덕분에 오래전 신비주의자로 취급해서 내다버렸던 사람이 쓴 글의 일부를 다시 읽었네요. 민노씨처럼 저도 그때와 감흥이 다른걸요.
재밌습니다. 다시는 그의 글을 읽을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분명 그때는 이해 못할 부분이 담겨 있었었네요.
이런 것들 지금 이 순간에도 참 많이 스치고 지나가고 있을꺼에요.
p.s 역시 트랙백은 안되네요.^^
http://nooegoch.net/329
아참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셔야해요.
저도 그런 편견이 굉장히 강했던 저자인데요.
제가 좋아하는 블로거들께서(주로 한겨레 블로그에서 활동하시던 저보다 인생선배이신 존경하는 필벗들께서) 하도 좋다고 평가를 하셔서 말이죠. 정현종도 꽤나 좋아하는 시인이고...
추.
트랙백은... 판올림이 잘못인가 싶어서 계속 파일을 덮어씌우면서 업뎃하는데도... ;;;;
누에님께서도 복 많이 많이 받으셔야 합니닷. ㅎㅎ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말씀 고맙습니다. : )
언제 한번 진정한 독서에 대해 좀더 풀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런데 공지영의 독서편력에 대해선 어찌 아시는지 것도 좀 궁금하네요.
지인이셨던가요?
아니면 공지영의 수필이나 기고들에서 느끼신 점인가요?
다음에 오실 기회가 계시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꽤 시간이 지났지만 바통을 받아서 적긴 했네요. 좋아하는 책에 대해 글을 쓰는 때만치 즐거운 시간도 없는 거 같습니다. 남들이 다 아는 책이라 적고 나니 심심한 생각도 들었지만.
좋아하는 책에 대해 쓰는 일은 좋아하는 여자 아이에게 편지를 보내는 일만큼이나 설레고, 또 기쁜 순간들이면서... 동시에 몹시도 어려운 일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