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질문은 아주 식상하다.
하지만 아주 근본적인 질문이다.
근본적인 질문이라고 적었지만, 그게 왜 근본적인 질문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막연하게나마 그 답을 이 글을 통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
오늘은 너무 하고 싶은 말이 많다.
갑자기 마구 수다를 떨고 싶은거다.
하지만 말은 혼자 할 수 없으니, 내 말을 들어줄 '당신'을 필요로 하고, 그런데 내 앞에는 아무도 없어서, 나는 나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으로, 내 안에 있는 타자들, 나를 구성하는 어떤 다른 의미들, 그 의미들을 만들어준 나의 또 다른 주인들인 상상적 당신들, 우리들에게 이야기한다.
*
[100분 토론]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보자.
어제는 [100분토론 - 광우병 끝장 토론] 때문에 아주 기분이 좋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쟁전투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덧.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인 것 같다..).
담론의 싸움은, 쉽게 말해 토론은, 피를 흘리지 않고, 상대방을 이성적으로 존중하면서, 하지만 가장 치열하게 좀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토론이 참 좋다. 그 말들의 향연이 끝나면 물론 언제나처럼 약간은 허무감이 함께 찾아오지만, 그래도 어제 광우병 토론만큼은 참 좋았다.
패널들 정말 애쓰셨다...
어제 [100분토론]은 나에게는 이런 시사점을 준다.
어떤 철학, 세계관의 우위를 지지하는 건 그 철학과 세계관 그 자체의 도덕성의 우월성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지식의 힘이라는 거다. 광우병이고 나발이고, 확률적으로 안정하다고 말할 수 있으니(혹은 확률적으로 그 위험을 무시할 수 있으니) 수입해도 괜찮다는 입장을 가진 정부측 관계자들은 그 철학이 갖는 도덕적 열세 때문에 토론에서 개망신 당한게 아니다. 자신의 입장을 지지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식들, 근거들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개망신 당했다. 물론 나는 그게 통쾌했는데, 그 상대방이 나와는 반대편에 속한 자들이라서 통쾌하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카타르시스는 감성적인, 정서적인, 직관적인 내포들, 함축들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고, 그것이 충족되어야만 폭발한다. 광우병을 수입해도 괜찮다는 '이메가식 실용주의자'들을 떠받치는 본질적인 철학은 '엘리트주의'다. 이것을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대중은 신뢰할 수 없는 존재이며,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가식적인 위장기제들이라고 생각하는 존재들이다. 무식한 대중과 온갖 뻘질해도 자신을 뽑아주는 한심한 유권자들을 존중할 필요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는거다. 이런 그들에 대한 '직관적인' 느낌들을 그자들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 개방'으로, '영교시 수업 부활'로, '영어 몰입교육'으로, 구체적으로 증명해보여줬다.
그리고 권력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권력을 통해서다.
아주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MBC라는 거대한 담론공장, 담론시스템의 조력을 얻지 못했더라면, 특히나 '피디수첩' '100분토론'이라는 담론시스템의 핵심기제의 조력을 얻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조중동에 의해 무식하고, 비과학적이며, "부드럽고 고소한 쇠고기" 못먹어서 환장한 어떤 것으로 취급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진 어떤 대중적 권위의 매개(피디수첩과 100분토론, 그리고 MBC라는 거대 방송사)를 통해 이제는 조중동이야 말로 비과학적이고, 싸구려이며, 무식한 족속이라는 '뿌듯함'을 우리는 느끼는거다.
물론 인터넷, 특히 블로그는 또 다른 가능성이긴 하지만, 너무 산발적이고, 너무 파편화되었으며, 자신의 잠재력을 현실화할 수 있는 방법을 아직은 알지 못하고, 앞으로도 그다지 그 성취가 수월할 것 같지는 않다(특히 어제 네이버가 공정위로부터 사실상의 면죄부를 받은 일은 이런 한국적 웹시스템의 암흑과 관련이 있을테다). 아틸라님께서는 종종 '집단지성 삥뜯기'란 표현을 즐겨 쓰는데, 한국 웹을, 특히 포털을 정의하는 가장 상징적인 표현이라는 생각이 여전히 든다. 시스템 얼개, 시스템의 구성요소들을 파악하는 노력을 아주 조금만, 조금만 더 기울인다면, 네이버가 대한민국 웹을 호령하는, 그래서 "사자가 이제 풀까지 뜯어먹는다"는 우스개는 듣지 않아도 좋으련만... (덧. foog님 댓글을 보면 사자도 풀 먹나보다. ^ ^ )
*
공동체라는 환상 내지는 이미지들은 내 구체적인 삶과 어떤 연계를 갖고, 그것은 나의 욕망과 어떤 구체적인 매개점을 갖는가.. 라는 생각을 나는 종종 한다. 광우병 사태와 관련해서도 그렇고, 삼성 특검이라는 쇼와 관련해서도 그렇다. 광우병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삼성 쇼야 어떻게 되든 말든... 만약에 나에게 아주 아름다고, 아주 현명한 어떤 여자가 있고, 그녀와 평생동안 따뜻하게 살 수 있다면, 그리고 내가 지켜야 하는 가족들, 내 누이와 내 동생과 내 어머니와 내 친구들과 더불어 그저 즐겁게 서로 위하며 살 수 있다면... 아무런 걱정없이, 그럴 수 있다면 솔직히 삼성이고, 광우병이고.. 내가 정말 이런 이야기들을 굳이 핏대세우면서 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런데 현대라는 괴물같은 시스템의 촉수들은 아주 작은 단위의 의미 관계망까지 그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행사한다. 그 촉수들은 흔히 미디어로 불린다. 그 미디어들은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결합하고, 궁극적으론 정치권력은 그 배후에서 그 시스템의 키를 쥔채 사회 전체의 의미들, 유통되는 컨텐츠의 수준과 정도를 조종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정치권력 그 뒤에 또 다시 자본권력이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들은 이미 한몸이다. 물론 그 방식은 예전처럼 방송국과 신문사를 통폐합하거나, 3S 정책을 취하는 무식한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담론생산집단과의 결탁을 통해서 시도된다. 이를 위해 제도를 '합법적으로' 뜯어고치고(가령 앞으로 개정될 것이 분명해 보이는 '신문법'과 '방송법'), 합법을 가장한 폐쇄적인 권력 분담을 시도한다. 그리고 당파성을 뛰어넘는 이익집단, 권력집단으로서의 미디어산업의 맹주들, 가령 우리나라로 치면 거대신문들을 통해서 구체적인 '미션'들은 수행된다. 그 미션은 자발적인 속물근성을 자극하고, 그래서 기끼어 스스로의 타락을 원하는 대중들을 사육하는 방식이다.
광우병 사태는 그 미션 수행자들이 패배한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승리에 도취할 만큼 명백한 승리를 얻어낸 것은 전혀 아니고, 언제나 그랬듯 그들은 한 두번의 실수로, 한 두번의 패배로 좌절할 만큼 약하지도 않다. 이들의 생명력은 정말 아메바스럽다는 느낌이 드는데, 이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떼어내면서 그렇게 생존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단발적인 승리는 '거대 시스템'의 조력을 받아 얻어낸 승리지, 시민역량이 숙성되어, 그 역량 그 자체가 어떤 시스템을 구축하여 승리한 것도 전혀 아니다. 이 이슈는 필연적으로 '뉴미디어 전쟁'과 관련이 있고, 싸움은 지금부터다. 광우병 사태의 최대 수혜자는, 적어도 뉴미디어 전쟁이라는 관극틀을 통해 본다면, 다음(daum)과 MBC지만, 이들이 항상 시민들의 우군이라는 생각도 솔직히 들지는 않는다. 시민들이 바보짓하고, 멍때리면 언제든지 우호적인 파트너쉽을 스스로 포기할지도 모른다.
*
엉뚱하게 [100분토론]이니 광우병이니 이런 이야기들을 너무 길게 했는데, 글은 그 구체적인 시공간의 제약 안에 있고,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은 그 구체적인 시공간을 뛰어넘어 어떤 초월적인 지점을 갖지는 못하는 것 같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물론 필요이상으로 부연설명으로서, 그 예시로서의 이야기가 길어진 감은 없지 않지만...
*
다시 좀더 개인적 이야기로 돌아오면,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로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칠레의 국민시인 네루다의 유년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 인상적이다. 그 이야기는 '양과 솔방울'에 관한 이야기다([양과 솔방울], 로버트 블라이와의 대담,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사랑의 노래'에 수록, 민음사, 1990). 어린 네루다의 집에는 담벽이 있었고, 이 담을 사이에 두고 그 옆집에도 어떤 아이가 있었나 보다. 두 아이들은 그 담벽에 뚤린 구멍(!)을 통해 서로 양과 솔방울을 나눠 가졌다. 그리고 그 체험은 네루다에게 평생동안 세상과 내가 소통할 수 있다는 소망,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가 되어 이어질 수 있다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고 한다(물론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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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건 때로는 내가 가진 창고들을 비워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내가 가진 지식 나부랭이들의 창고들을 비워내고, 다시 채워넣고, 다시 비워내고... 이런 일은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다. 물론 그런 채움과 비움이 반복되면서 어떤 방식들, 틀, 회로들이 만들어지고, 그런 사고의 주형들, 회로들은 좀더 세상을 합리적으로 바라보게 하거나, 좀더 세상을 풍성하게 바라보게 하고, 또 세상과 당신, 그리고 우리들의 대화를 좀더 아름답고, 즐거운 것으로 이끌 수 있는 훈련이 되기도 할테지... 하지만 여전히 그건 너무도 메마르고, 지루하고, 식상하다는 느낌이 드는거다.... 글을 쓰는 게 창고를 채우는 일이 될 수는 있는걸까? 물론 나는 항상 그런 기대를 갖고 있다고 믿지만, 종종 그런 대화로서의 글쓰기가 갖는 관계적인 이미지들을 놓치기도 한다. 그저 이야기하기 위해 이야기하는 건 나쁜 건 아니지만, 그저 글을 쓰기 위해 글을 쓰는 건... 좀 다르다는 생각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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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욕망이 그 자체로 숨겨져있고, 그래서 그 욕망을 풀어놓을 길 없을 때, 도무지 그 욕망에 대해 스스로 인정하기도 너무 욕되거나, 너무도 슬프거나, 너무도 비참할 때... 우리는 꿈을 꾼다. 그 꿈은 어떤 형상도 어떤 색도 어떤 향기도 없고, 유년의 '장롱' 환상처럼, 장롱 안에 있는 깊고 어두운, 절벽보다 깊은 구멍처럼 끝간데 없다. 가령 내가 가장 오랫동안 갈망했던 어떤 여자 아이에 대한 풀려나지 않은 욕망, 갈구는 이런 장롱 환상 같은 깊은 구멍들을 만들어내고 있고, 내 삶은 그것만으로도, 내가 나에게 들리지 않는 소리로 말한다. 너는 실패했다거나, 혹은 너는 버림받았다거나, 혹은 너는 이제 여분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라는... 이런 비참한 감상들을, 그것은 물론 감상일 뿐이지만, 그 자체로 너무도 가혹한 느낌들을 내 안에 문득 문득 떠올리는거다. 그런 생각이 찾아오면, 이불 속에서 고요히 고요히 숨죽여 울거나, 혹은 음악을 듣거나, 혹은....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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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글쓰기는 자기 치유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연민의 가장 예술적인 형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나는 이토록 상처받았다오, 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모든 글은, 모든 이야기는 가장 본질적인 자기 상처, 그것이 사춘기의 실패한 연애담이든, 아니면 영원히 들키지 않을, 그래서 스스로도 망각한 부끄러운 욕망이든 간에... 그 자기상처에 대해 그 '환자로서의 동료의식'을 나눌 친구들을 찾는 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기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왜냐하면 그 일기가 나만 읽을 수 있는 일기일지라도, 그 글은 내 안에 있는 어떤 나 아닌 것들의 독자, 나를 만들어준 어떤 체험들의 흔적으로서의 주인공들에게 읽히는 글이면서, 막연하게나마 이 공기들을 채우는 어떤 시선들, 종이 위에 스며들어 있는 어떤 영혼들에게 읽히는 글이기 때문이다.
*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역시나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는 못한 것 같다.
물론 여기에는 제대로 된 대답이 있을리 만무하고, 이 질문은 질문에 대한 질문에 대한 질문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에, 그 답 역시 영원히 반복적으로 그 질문들을 쫓아서 여행해야 하는 그런 종류의 영역이긴 하겠다.
당신은 왜 글을 쓰는가...
당신의 이유를 듣고 싶다.
이 질문은 아주 식상하다.
하지만 아주 근본적인 질문이다.
근본적인 질문이라고 적었지만, 그게 왜 근본적인 질문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막연하게나마 그 답을 이 글을 통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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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너무 하고 싶은 말이 많다.
갑자기 마구 수다를 떨고 싶은거다.
하지만 말은 혼자 할 수 없으니, 내 말을 들어줄 '당신'을 필요로 하고, 그런데 내 앞에는 아무도 없어서, 나는 나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으로, 내 안에 있는 타자들, 나를 구성하는 어떤 다른 의미들, 그 의미들을 만들어준 나의 또 다른 주인들인 상상적 당신들, 우리들에게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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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분 토론]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보자.
어제는 [100분토론 - 광우병 끝장 토론] 때문에 아주 기분이 좋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쟁전투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덧.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인 것 같다..).
담론의 싸움은, 쉽게 말해 토론은, 피를 흘리지 않고, 상대방을 이성적으로 존중하면서, 하지만 가장 치열하게 좀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토론이 참 좋다. 그 말들의 향연이 끝나면 물론 언제나처럼 약간은 허무감이 함께 찾아오지만, 그래도 어제 광우병 토론만큼은 참 좋았다.
패널들 정말 애쓰셨다...
어제 [100분토론]은 나에게는 이런 시사점을 준다.
어떤 철학, 세계관의 우위를 지지하는 건 그 철학과 세계관 그 자체의 도덕성의 우월성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지식의 힘이라는 거다. 광우병이고 나발이고, 확률적으로 안정하다고 말할 수 있으니(혹은 확률적으로 그 위험을 무시할 수 있으니) 수입해도 괜찮다는 입장을 가진 정부측 관계자들은 그 철학이 갖는 도덕적 열세 때문에 토론에서 개망신 당한게 아니다. 자신의 입장을 지지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식들, 근거들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개망신 당했다. 물론 나는 그게 통쾌했는데, 그 상대방이 나와는 반대편에 속한 자들이라서 통쾌하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카타르시스는 감성적인, 정서적인, 직관적인 내포들, 함축들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고, 그것이 충족되어야만 폭발한다. 광우병을 수입해도 괜찮다는 '이메가식 실용주의자'들을 떠받치는 본질적인 철학은 '엘리트주의'다. 이것을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대중은 신뢰할 수 없는 존재이며,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가식적인 위장기제들이라고 생각하는 존재들이다. 무식한 대중과 온갖 뻘질해도 자신을 뽑아주는 한심한 유권자들을 존중할 필요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는거다. 이런 그들에 대한 '직관적인' 느낌들을 그자들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 개방'으로, '영교시 수업 부활'로, '영어 몰입교육'으로, 구체적으로 증명해보여줬다.
그리고 권력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권력을 통해서다.
아주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MBC라는 거대한 담론공장, 담론시스템의 조력을 얻지 못했더라면, 특히나 '피디수첩' '100분토론'이라는 담론시스템의 핵심기제의 조력을 얻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조중동에 의해 무식하고, 비과학적이며, "부드럽고 고소한 쇠고기" 못먹어서 환장한 어떤 것으로 취급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진 어떤 대중적 권위의 매개(피디수첩과 100분토론, 그리고 MBC라는 거대 방송사)를 통해 이제는 조중동이야 말로 비과학적이고, 싸구려이며, 무식한 족속이라는 '뿌듯함'을 우리는 느끼는거다.
물론 인터넷, 특히 블로그는 또 다른 가능성이긴 하지만, 너무 산발적이고, 너무 파편화되었으며, 자신의 잠재력을 현실화할 수 있는 방법을 아직은 알지 못하고, 앞으로도 그다지 그 성취가 수월할 것 같지는 않다(특히 어제 네이버가 공정위로부터 사실상의 면죄부를 받은 일은 이런 한국적 웹시스템의 암흑과 관련이 있을테다). 아틸라님께서는 종종 '집단지성 삥뜯기'란 표현을 즐겨 쓰는데, 한국 웹을, 특히 포털을 정의하는 가장 상징적인 표현이라는 생각이 여전히 든다. 시스템 얼개, 시스템의 구성요소들을 파악하는 노력을 아주 조금만, 조금만 더 기울인다면, 네이버가 대한민국 웹을 호령하는, 그래서 "사자가 이제 풀까지 뜯어먹는다"는 우스개는 듣지 않아도 좋으련만... (덧. foog님 댓글을 보면 사자도 풀 먹나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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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라는 환상 내지는 이미지들은 내 구체적인 삶과 어떤 연계를 갖고, 그것은 나의 욕망과 어떤 구체적인 매개점을 갖는가.. 라는 생각을 나는 종종 한다. 광우병 사태와 관련해서도 그렇고, 삼성 특검이라는 쇼와 관련해서도 그렇다. 광우병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삼성 쇼야 어떻게 되든 말든... 만약에 나에게 아주 아름다고, 아주 현명한 어떤 여자가 있고, 그녀와 평생동안 따뜻하게 살 수 있다면, 그리고 내가 지켜야 하는 가족들, 내 누이와 내 동생과 내 어머니와 내 친구들과 더불어 그저 즐겁게 서로 위하며 살 수 있다면... 아무런 걱정없이, 그럴 수 있다면 솔직히 삼성이고, 광우병이고.. 내가 정말 이런 이야기들을 굳이 핏대세우면서 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런데 현대라는 괴물같은 시스템의 촉수들은 아주 작은 단위의 의미 관계망까지 그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행사한다. 그 촉수들은 흔히 미디어로 불린다. 그 미디어들은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결합하고, 궁극적으론 정치권력은 그 배후에서 그 시스템의 키를 쥔채 사회 전체의 의미들, 유통되는 컨텐츠의 수준과 정도를 조종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정치권력 그 뒤에 또 다시 자본권력이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들은 이미 한몸이다. 물론 그 방식은 예전처럼 방송국과 신문사를 통폐합하거나, 3S 정책을 취하는 무식한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담론생산집단과의 결탁을 통해서 시도된다. 이를 위해 제도를 '합법적으로' 뜯어고치고(가령 앞으로 개정될 것이 분명해 보이는 '신문법'과 '방송법'), 합법을 가장한 폐쇄적인 권력 분담을 시도한다. 그리고 당파성을 뛰어넘는 이익집단, 권력집단으로서의 미디어산업의 맹주들, 가령 우리나라로 치면 거대신문들을 통해서 구체적인 '미션'들은 수행된다. 그 미션은 자발적인 속물근성을 자극하고, 그래서 기끼어 스스로의 타락을 원하는 대중들을 사육하는 방식이다.
광우병 사태는 그 미션 수행자들이 패배한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승리에 도취할 만큼 명백한 승리를 얻어낸 것은 전혀 아니고, 언제나 그랬듯 그들은 한 두번의 실수로, 한 두번의 패배로 좌절할 만큼 약하지도 않다. 이들의 생명력은 정말 아메바스럽다는 느낌이 드는데, 이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떼어내면서 그렇게 생존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단발적인 승리는 '거대 시스템'의 조력을 받아 얻어낸 승리지, 시민역량이 숙성되어, 그 역량 그 자체가 어떤 시스템을 구축하여 승리한 것도 전혀 아니다. 이 이슈는 필연적으로 '뉴미디어 전쟁'과 관련이 있고, 싸움은 지금부터다. 광우병 사태의 최대 수혜자는, 적어도 뉴미디어 전쟁이라는 관극틀을 통해 본다면, 다음(daum)과 MBC지만, 이들이 항상 시민들의 우군이라는 생각도 솔직히 들지는 않는다. 시민들이 바보짓하고, 멍때리면 언제든지 우호적인 파트너쉽을 스스로 포기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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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하게 [100분토론]이니 광우병이니 이런 이야기들을 너무 길게 했는데, 글은 그 구체적인 시공간의 제약 안에 있고,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은 그 구체적인 시공간을 뛰어넘어 어떤 초월적인 지점을 갖지는 못하는 것 같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물론 필요이상으로 부연설명으로서, 그 예시로서의 이야기가 길어진 감은 없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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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좀더 개인적 이야기로 돌아오면,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로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칠레의 국민시인 네루다의 유년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 인상적이다. 그 이야기는 '양과 솔방울'에 관한 이야기다([양과 솔방울], 로버트 블라이와의 대담,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사랑의 노래'에 수록, 민음사, 1990). 어린 네루다의 집에는 담벽이 있었고, 이 담을 사이에 두고 그 옆집에도 어떤 아이가 있었나 보다. 두 아이들은 그 담벽에 뚤린 구멍(!)을 통해 서로 양과 솔방울을 나눠 가졌다. 그리고 그 체험은 네루다에게 평생동안 세상과 내가 소통할 수 있다는 소망,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가 되어 이어질 수 있다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고 한다(물론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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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건 때로는 내가 가진 창고들을 비워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내가 가진 지식 나부랭이들의 창고들을 비워내고, 다시 채워넣고, 다시 비워내고... 이런 일은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다. 물론 그런 채움과 비움이 반복되면서 어떤 방식들, 틀, 회로들이 만들어지고, 그런 사고의 주형들, 회로들은 좀더 세상을 합리적으로 바라보게 하거나, 좀더 세상을 풍성하게 바라보게 하고, 또 세상과 당신, 그리고 우리들의 대화를 좀더 아름답고, 즐거운 것으로 이끌 수 있는 훈련이 되기도 할테지... 하지만 여전히 그건 너무도 메마르고, 지루하고, 식상하다는 느낌이 드는거다.... 글을 쓰는 게 창고를 채우는 일이 될 수는 있는걸까? 물론 나는 항상 그런 기대를 갖고 있다고 믿지만, 종종 그런 대화로서의 글쓰기가 갖는 관계적인 이미지들을 놓치기도 한다. 그저 이야기하기 위해 이야기하는 건 나쁜 건 아니지만, 그저 글을 쓰기 위해 글을 쓰는 건... 좀 다르다는 생각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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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욕망이 그 자체로 숨겨져있고, 그래서 그 욕망을 풀어놓을 길 없을 때, 도무지 그 욕망에 대해 스스로 인정하기도 너무 욕되거나, 너무도 슬프거나, 너무도 비참할 때... 우리는 꿈을 꾼다. 그 꿈은 어떤 형상도 어떤 색도 어떤 향기도 없고, 유년의 '장롱' 환상처럼, 장롱 안에 있는 깊고 어두운, 절벽보다 깊은 구멍처럼 끝간데 없다. 가령 내가 가장 오랫동안 갈망했던 어떤 여자 아이에 대한 풀려나지 않은 욕망, 갈구는 이런 장롱 환상 같은 깊은 구멍들을 만들어내고 있고, 내 삶은 그것만으로도, 내가 나에게 들리지 않는 소리로 말한다. 너는 실패했다거나, 혹은 너는 버림받았다거나, 혹은 너는 이제 여분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라는... 이런 비참한 감상들을, 그것은 물론 감상일 뿐이지만, 그 자체로 너무도 가혹한 느낌들을 내 안에 문득 문득 떠올리는거다. 그런 생각이 찾아오면, 이불 속에서 고요히 고요히 숨죽여 울거나, 혹은 음악을 듣거나, 혹은....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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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글쓰기는 자기 치유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연민의 가장 예술적인 형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나는 이토록 상처받았다오, 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모든 글은, 모든 이야기는 가장 본질적인 자기 상처, 그것이 사춘기의 실패한 연애담이든, 아니면 영원히 들키지 않을, 그래서 스스로도 망각한 부끄러운 욕망이든 간에... 그 자기상처에 대해 그 '환자로서의 동료의식'을 나눌 친구들을 찾는 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기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왜냐하면 그 일기가 나만 읽을 수 있는 일기일지라도, 그 글은 내 안에 있는 어떤 나 아닌 것들의 독자, 나를 만들어준 어떤 체험들의 흔적으로서의 주인공들에게 읽히는 글이면서, 막연하게나마 이 공기들을 채우는 어떤 시선들, 종이 위에 스며들어 있는 어떤 영혼들에게 읽히는 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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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글을 쓰는가...
역시나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는 못한 것 같다.
물론 여기에는 제대로 된 대답이 있을리 만무하고, 이 질문은 질문에 대한 질문에 대한 질문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에, 그 답 역시 영원히 반복적으로 그 질문들을 쫓아서 여행해야 하는 그런 종류의 영역이긴 하겠다.
당신은 왜 글을 쓰는가...
당신의 이유를 듣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