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아주 아주 예전에 쓴 글인데요. 아틸라님의 [충동적 책사기]를 읽고 갑자기 생각 나서요. 이 글에 담겨진 냉소적인 뉘앙스는 아틸라님을 향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오히려 아틸라님의 글에 공감해서 등록하는 글입니다. : ).



다람쥐족 -‘느림’에 관한 단상



"기도가 시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기도 안에 있으며, 희생의 제사가 공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희생의 제사 안에 있듯이……"
- 마르틴 부버, [나와 너] 중에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는 내게 갑자기 마르틴 부버가 찾아온 이유를 나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부버는 이렇게 말했고, 이 구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 중의 하나인데, 시간이 기도 안에 있다는 의미는 무얼까, 이따금씩 나는 곰씹어 보거나, 내 주변의 知人들에게 물어보곤 한다.

수학문제처럼 하나의 해답이 존재하는 물음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각주를 드려다 보아도 거기에 진실한 답이 있지는 않다.

해답. 그렇다. 해답이 없는 질문, 질문 그 자체로서 한없이 이어지는, 끝이 없는 대화를 나는 상상해본다.

또 나는 상상한다. 시간과 경쟁하며,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시간과 싸우도록 강요하는 세상의 논리에 자신을 끼워 맞추며 살아가는 현대의 평범한 사람들, 그러므로, 나와 나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의 슬픈 손을, 그러므로, 우리의 부모들의 지친 눈동자를 떠올려 본다.

이를테면 퇴근 후의 지친 몸을 텔레비전 수상기 앞에 늘어뜨리고, 모니터를 이리저리 꾹꾹 누르는, 손톱에 때가 낀 앙상한 손을, 그리고 그, 혹은 그녀의 지친 눈동자에 들어있는 일일드라마의 화면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말 슬퍼진다. 그것이 아주 일상적인 현대의 행복이자 슬픔의 조건이 아닐까.

우리는 답이 정해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답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답이 없다면, 그 답을 찾아 여행해야 하며, 그 답을 꼬셔내기 위해 대화해야하며, 그 답이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거다.

너무 오래 걸리니 실속이 없다는 것. 쉽게 말해서 '시간은 돈이다'라는 거지. 이 표어는 속도와 시간과 자본에 대한 아주 소름끼치도록 평범한 현대의 잠언이다. 그러니 "시간이 기도 속에 있다"는 말은 아주 배부른 몽상가의 잠꼬대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잠꼬대라고 비웃는다고 해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뭐라 힐난할 수는 없다. 그들은 우리이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나인 것이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나는 도무지 갈피를 못 잡겠다. 현대는, 참으로 신기하게도, 속도를 강요하다가도, 이런 종류의 책을 또한 강요한다. 나는 이 책의 진정한 가치와는 상관없이, 출판사의 '발빠른' 기획력과 책 제목과의 괴리감을 생각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 책을 아직 읽어보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이 베스트셀러라는 책의 제목을 보면서, 그 내용과는 상관없이, 아주 짓궂게, 나는 생각한다. 병 주고 약 주는 세상에 나는 살고 있구나, 라고. 이 책을 '빨리' 읽고, 교양을 찾는 녀석들과의 대화에서 소외당하지 말아야겠다, 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너무 속물인가, 아니면 세상에 너무 잘 적응하고 있는 것인가.

이 책의 저자는 이런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저 웃겠지. 하하하. 하지만 나의 진심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 책, 예전에 읽어보려고 했지만, 저자의 의도를 책의 제목만으로 아주, 정말 너무도 악의적으로, 작정하고 오해하여, 천천히 읽어야지, 하면서 이렇게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그러나 게으름과 느림이 같지 않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게으름이 느림에 대한 일종의 유머가 될 수는, 한번쯤은 있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해보는 것이다.

중심에 대한 저항.
무중심의 여행. 
속도와 무관하게 부유하는 방랑.
일탈의 쾌감이 내면에서 터질 듯한 산책...

중심은 나를 잡아당긴다.
그래서 우리들은 빙빙 돈다.
그 구심력 때문에 우리들의 원심력은 가속도가 붙을 수 있다. 구심력이 강할수록 우리들의 속도는 빨라진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나가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붙잡는 힘이 세니 아무리 빨리 돌아도 원심력이 구심력을 이기지 못하는 바에야 한없이 빙빙 돌 수밖에 없다. 그 놈의 구심력은 우리들의 원심력과 비례해서 증가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그 구심력에 우리들의 원심력을 맞추어야 한다. 그건 무언의 압력이다. 때문에 혹여 그 힘에서 벗어나거나, 그 힘에 휩쓸려 버린다면, 우리에게는 당장 '낙오자'라는 딱지가 이마에 붙게 된다.

그러니 그 힘을 견디며 빙빙 도는 기술을 채득해야 하는 수밖에.

현대인은 다람쥐족이다.
다람쥐로 길들여져 가고 있다.

빙빙 돈다.
빙빙 돈다.
쳇바퀴가 망가지지 않는 한 빙빙 돌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빙빙 돌다가, 어느 날 퇴근길에 서점에 들러,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사야 하는 것이다.


p.s.
아직 기억하고 계시는 분들도 많을 것으로 생각하는데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한때 대박났던 피에르 쌍소의 책 제목입니다. 지금 찾아보니 '99년 프랑스 논픽션부문 1위'였다고 하네요. 이 글은 리포트로 쓴 글입니다. ㅎㅎ. 블로그에는 처음 공개하네요. 너무 상투적인 글이지만, 추고는 최소한으로 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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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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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히치하이커 2007/03/25 23:04

    이 글을 읽으니, 저는 '아침형 인간' 열풍도 떠오르네요. 개인의 생활 습관이나 직업, 가치관 따위는 아랑곳 않고 마치 '아침형 인간'이 되지 않으면 큰 일이라도 나는 듯이 호들갑을 떨던 미디어와 사람들의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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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7/03/26 03:12

      '느르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아침형 인간'과는 (마케팅의 차원에서는) 정반대의 컨셉이겠죠. 그런데 본질적으론 그 마케팅의 본질은 같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그 책들이 갖는 의미는, 읽어보지 않은 바에야 쉽게 평가하기는 쉽지 않겠다 싶습니다. ^ ^; 이 글이 스스로에게도 좀 민망한 까닭입니다.

      : )

  2. 너바나나 2007/03/26 18:30

    아침형 인간이 되는 법, 성공하는 사람에게 듣는 몇 가지 법칙 등 개인적으론 이런책들을 무쟈게 싫어합니다. 이런류의 책들을 안 읽는거이 아침형 인간이 될 것이고 느리고 살 수 있을 것 같구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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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7/03/27 08:08

      저도 적극적인 '처세'를 얘기하는 책, 부지런하게 무엇무엇을 해라는 좀 멀리하고, 피하는 편이긴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좀 쉬자, 느려도 된다.. 뭐 이런 마인드의 책도 꽤 있는 것 같아서요. ㅎ

      역설적으로 그런 책들도 본질적으론 '처세'를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좀 살짝, 선입견에 바탕한 저항감이 생기곤 합니다. : )

    • 너바나나 2007/03/27 13:19

      네!! 그렇죠~ 이런 책들도 처세인 듯싶구만요. 이런 책 안 읽는게 느리게 사는 비법같구만요. 여튼 이런류의 책 읽으면 그때 잠깐은 그런갑다 하지만 전혀 남는게 없더만요. 결정적으로! 뻔한말만 하니 흥미도 안 생기고 시간 낭비같구요.

  3. cathy 2007/03/26 22:22

    그 책 읽었는데... 느리게 산다는것의 의미는, 아침 새벽 공기의 차가움을 뜨거운 커피로 달랠수 있는 여유를 가지자는 거죠... 오래전에 졸면서(사실 무지 지루해요...) 읽어서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책 읽고 나서 마음이 참 훈훈해 졌었던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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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7/03/27 08:09

      꽤 좋은 책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베스트셀러는 좀 의식적으로 '역차별'하는 성향, 그런 선입견이 있어서.. ^ ^; 앞으로도 읽게 될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cathy 2007/03/27 09:26

      저와 같네요... 저 역시 뭔가 뜨는것은 이상하게 싫은데, 집에 꽃혀 있길래 봤죠... 아마, 갑자기 뜨기 전 까지는 한 구석에서 먼지 먹고 있었을 거에요. 꼭 읽어 보세요. 전 줄 까지 쳐가면서 읽었었어요. ^^*

    • 민노씨 2007/03/27 10:53

      그랬군요. : )

      어제 기어코(?) '1984'를 구입했습니다.
      일단 이거랑 거의 다 읽다가 말아버린 '앎으로부터의 자유'(크리슈 나무르티) 읽고 난 다음에요. ^ ^; 그런데 확약할 수는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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