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마음 속으로 꽤 좋아하는 두 필자가 있다. 깐깐하고 고지식한 느낌의 기자와 존경스러울만큼 성실하고 정직한 철학자다. 이 글은 이 두 명의 실존적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은 아니다. 그러니 이 두 명을 당신이 생각하는 어떤 유형의 언어, 그런 담론의 풍경이라고 바꿔 생각하길 바란다. 이 두 사람은 세상의 부조리한 가치를 비판하고, 일갈한다. 그 말들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대개는 숙고해야 마땅한, 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좋은 영양가 만점 충고들이다.
하지만 뭐랄까, 피로감이 쌓인다. 그것이 옳은 줄 알면서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쌓인다. 그래서 결국 외면한다. 다시 돌아가서 그 쓴 말들을 경청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그렇다. 왜 그럴까? 이 글은 그 마음을 돌아보는 글이다.
김현은 문학의 가치를 '안락함'이 아닌 '불편함'이라고 이야기한다. (정확한 출처는 기억나지 않는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혹은 [한국문학의 위상]인 것 같기는 하다) 문학은, 널리 보면 예술은, 당대를 지배하는 질서를 교란시킨다. 시스템의 포로인채로 안락한 시스템의 구심력 속에서 존재적 회의의 감각을 잊고 있던 독자들에게 그 시스템의 혈관을, 속살을, 그 안에서 흐르는 피를 드러낸다. 그건 안락하지도 않고, 평온하지도 않다. 우리가 꿈꾸는 어떤 소박한 바람, 그런 희망까지도, 어쩌면 권력이 만들어낸 환상일지 모른다고, 진실한 문학은, 예술은 고발한다.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면, 나는 왜 '두 필자의 이야기'가 불편한 걸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건 격리의 감정이라고 부를만한 심리적 소외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비판은 옳지만, 그 비판의 방법은 내가 그들과 함께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어떤 부조리한 사회현상을 비판하는 그 내용은 옳지만, 그 내용을 감싸는 언어가 고립된 지사의 풍모랄까, 무결점의 독선적 느낌이랄까, '너희들이 뭘 알아?' 이런 자기들만의 성채를 쌓는듯한... 그런 벽 같은 거.. 그런게 느껴진다.
비판은 절망으로부터 비롯한다. 그 절망의 짝은 바람이고, 소망이다. 무엇인가를 원한다. 그래서 이야기한다. 세상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절망한다. 그리고 비판한다. 그런데 가끔은 비판을 만들어낸 그 절망이, 그 절망의 짝인 소망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그게 보이지 않을 때, 내 마음은 이렇게 반응한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건데?' '참 잘나셨습니다' 이렇게 아이처럼 외면하게 된다. 나는 항상 내용과 형식, 마음과 몸은 서로 하나라고 생각한다. 내용이 그 소망에 어울리는 형식을 만나지 못하거나, 마음이 그 마음을 온전하게 드러낼 몸을 만나지 못하면, 그 마음을 보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을 전적으로 내 부덕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으리라. 이건 내가 내 마음, 그 마음의 옷인 내 글을 통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 나솔의 댓글
- 옳바른 비판에 대한 피로감 -> 비판에 대한 피로감.
- 옳다/올바르다..를 순간 헷갈려서 올바른, 혹은 옳은 이라고 써야 하는데, 옳바른...이라고 썼었네요.
하지만 뭐랄까, 피로감이 쌓인다. 그것이 옳은 줄 알면서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쌓인다. 그래서 결국 외면한다. 다시 돌아가서 그 쓴 말들을 경청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그렇다. 왜 그럴까? 이 글은 그 마음을 돌아보는 글이다.
김현은 문학의 가치를 '안락함'이 아닌 '불편함'이라고 이야기한다. (정확한 출처는 기억나지 않는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혹은 [한국문학의 위상]인 것 같기는 하다) 문학은, 널리 보면 예술은, 당대를 지배하는 질서를 교란시킨다. 시스템의 포로인채로 안락한 시스템의 구심력 속에서 존재적 회의의 감각을 잊고 있던 독자들에게 그 시스템의 혈관을, 속살을, 그 안에서 흐르는 피를 드러낸다. 그건 안락하지도 않고, 평온하지도 않다. 우리가 꿈꾸는 어떤 소박한 바람, 그런 희망까지도, 어쩌면 권력이 만들어낸 환상일지 모른다고, 진실한 문학은, 예술은 고발한다.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면, 나는 왜 '두 필자의 이야기'가 불편한 걸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건 격리의 감정이라고 부를만한 심리적 소외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비판은 옳지만, 그 비판의 방법은 내가 그들과 함께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어떤 부조리한 사회현상을 비판하는 그 내용은 옳지만, 그 내용을 감싸는 언어가 고립된 지사의 풍모랄까, 무결점의 독선적 느낌이랄까, '너희들이 뭘 알아?' 이런 자기들만의 성채를 쌓는듯한... 그런 벽 같은 거.. 그런게 느껴진다.
비판은 절망으로부터 비롯한다. 그 절망의 짝은 바람이고, 소망이다. 무엇인가를 원한다. 그래서 이야기한다. 세상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절망한다. 그리고 비판한다. 그런데 가끔은 비판을 만들어낸 그 절망이, 그 절망의 짝인 소망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그게 보이지 않을 때, 내 마음은 이렇게 반응한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건데?' '참 잘나셨습니다' 이렇게 아이처럼 외면하게 된다. 나는 항상 내용과 형식, 마음과 몸은 서로 하나라고 생각한다. 내용이 그 소망에 어울리는 형식을 만나지 못하거나, 마음이 그 마음을 온전하게 드러낼 몸을 만나지 못하면, 그 마음을 보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을 전적으로 내 부덕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으리라. 이건 내가 내 마음, 그 마음의 옷인 내 글을 통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 나솔의 댓글
nassol 2010/02/03 16:33
저도 소망이 감지되는 비판이 좋아요. 물론 비판이 신랄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비판할 점이 있다면, 소망하는 바와 현실 사이의 현저한 차이를 꼬집으려면,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 통쾌하기도 하고 그리고 충격효과도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소망이 감지되지 않으면 무력감이 느껴져요. 비판하는 것 만으로는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요. 소망이 없는 비판은 존재 이유가 없는 듯 하고요. 바라는 상태가 없는데 무슨 괴리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소망의 존재가 감지되지 않으면, 마치 비판하는 능력이 뛰어난 그 사람 조차도 소망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무력한 존재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비판하는 능력도 안 뛰어난 저는 더욱 무력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요. 비판하는 분이, 반드시 '대안을 제시하세요, 행동으로 보여주세요'라고 독자가 강요할 수는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소망을 보여주지 않을 때 독자가 느끼는 무력감에 대해서 인지하고 계셨으면 좋겠어요.
- 옳바른 비판에 대한 피로감 -> 비판에 대한 피로감.
- 옳다/올바르다..를 순간 헷갈려서 올바른, 혹은 옳은 이라고 써야 하는데, 옳바른...이라고 썼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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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창으로 순간 이동!2연속 제목 첫글자 오타는 의도하신건가요..
ㅎㅎ
전혀 아닙니다.
착오/무지로부터 비롯된...;;;;
포로노는 고치셨구나.. ;;; 올바른이라능
포로노는 단순 오타인데.. 옳다/올바르다...는 무지에 가깝근영.
알려주셔서 대단히 감솨~!
* 제목 수정 : 시퍼렁어님 감솨~!
옳바른 비판에 대한 피로감 -> 비판에 대한 피로감.
옳다/올바르다..를 순간 헷갈려서 올바른, 혹은 옳은 이라고 써야 하는데, 옳바른...이라고 썼었근영.
저도 소망이 감지되는 비판이 좋아요. 물론 비판이 신랄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비판할 점이 있다면, 소망하는 바와 현실 사이의 현저한 차이를 꼬집으려면,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 통쾌하기도 하고 그리고 충격효과도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소망이 감지되지 않으면 무력감이 느껴져요. 비판하는 것 만으로는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요. 소망이 없는 비판은 존재 이유가 없는 듯 하고요. 바라는 상태가 없는데 무슨 괴리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소망의 존재가 감지되지 않으면, 마치 비판하는 능력이 뛰어난 그 사람 조차도 소망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무력한 존재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비판하는 능력도 안 뛰어난 저는 더욱 무력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요. 비판하는 분이, 반드시 '대안을 제시하세요, 행동으로 보여주세요'라고 독자가 강요할 수는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소망을 보여주지 않을 때 독자가 느끼는 무력감에 대해서 인지하고 계셨으면 좋겠어요.
댓글이 너무 길어져요. ㅎㅎ 트랙백 날릴 줄을 몰라서.. 텍스트 큐브에서 트랙백 날리는 방법 혹시 아세요? 아무리 찾아봐도 못 찾겠어요. 어떤 포스트에 보니깐 '트랙백 보내기'버튼이 나온다는데요, 제 눈에는 안 보이고.. 블로그 서비스마다 다른건지.. 혹 아시면 알려주시면 감사드리겠습뉘다~
아주 공감가는 논평이시네요. : )
저는 비판 그 자체로도 아주 희미하게나마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리고 반드시 대안을 제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때론 그저 감정적 자기만족, 화풀이 같은 글을 반복해서 볼 때도 있는데요... 그런 글에 대해선 왠지 적절하게 표현하신, "소망의 존재가 감지되지" 않더군요..
추.
지금 방금 제(가 방치하고 있는) 텍큐닷컴에서 처음으로 연습글(이글의 일부를 긁어서 옮긴 것. ㅎㅎ)을 공개글로 올려봤습니다. 제목 아래 글관리 단추줄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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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이 감지되는 비판"이라.. 정말 좋은 표현이네요.
답을 알지 못해도 변화를 바라는 마음과 희망이 전달되면
그 답은 함께 찾아나갈 수 있게 되겠지요.
아미 또는 신비님 :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추.
댓글창에서 뵙는 건 참 오랜만입니다.
아미와 신비의 앞자를 따면 '아신'이네요?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ㅎ
아신님은 잘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레오포드님, 감솨~! ^ ^
트랙백 남기는 방법 알려주셔서 감사드려요! 이제 트랙백 보낼 수 있겠어요.
저는 비판이 생겨나는 곳에는 소망이나 욕망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소망이 감지되면 비판에서 좋은 느낌, 희망의 느낌이 들고 욕망이 감지되면 씁쓸한 느낌이 들어요. 그런데 정말 어려운 것은, 감지되는 것이 소망인지 욕망인지 잘 구분이 안될 때에요. 그 이유는 제가 무지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결론은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는 ㅠ.ㅠ 이런 것들을 구분할 수 있고 파악하는 그날까지요..
다행입니다. : )
저는 오히려 목적과 관련한 수사적 함정의 문제, 가령 황지우의 어투를 빌자면, 범죄자가 자신의 거짓을 숨기기 위해 내놓는 진실의 문제가 굉장히 중요하지 않나 싶은 생각도 종종 들어요.
"범죄자가 자신의 거짓을 숨기기 위해 내놓는 진실의 문제", 수사적 함정의 문제가 어떤건지 잘 모르겠어요. ^^ 알려주세요~
범죄자는 자신의 거짓을 숨기기 위해 어떤 것을 내놓는데, 예를 들면 "난 안했어요!", 거기에서 '했다는' 진실이 드러난다는 의미인가요? 즉 거짓된 표현에서 숨어있는 진실이 드러난다는 의미인가요? 아니면, 실제로는 범죄를 저질렀어도, 안했다고 부인하는 말이라도 해야, 범죄가 드러나기 때문에, 범죄자는 거짓말이라고 해야 한다는 의미인가요? 아~ 모르겠어요~ 범죄자와, 거짓과 진실, 범죄 행위가 각각 뭘 의미하는 지 알아야 이해가 될 것 같아요~
이에 대해선 조만간 따로 글을 쓸까합니다. ^ ^;;
조금만 기둘려주세요. :)
약 2년전 문화방송 MBC가 방송한 PD수첩이 <수상한 비밀 신천지> 라는 제목으로 방영한 내용을 보면 [예수교 신천지 증거장막성전(신천지)]이 마치 ,가정파탄의주역, 청소년 가출및 비행조장, 공금횡령,감금,폭행을 자행하는 비사회적, 광신적 종교집단 으로 매도한 방송을 한적이 있었다.
가끔은 소망을 안 보여주며 블랙코미디적인 요소에 도전하는 것도 좋지요. 영화 <시리어스맨>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