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회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도덕적, 정치적, 미학적 범주가 필요하다. 앞으로의 논의 과정에서 이 범주들을 발전시킬 것이다.
논의에 들어가기 위해 '음란'이라는 범주가 쓸모있다. 질식할 것 같이 많은 양의 물품을 생산하고 과시하면서 외국의 희생자들에게서는 생활필수품조차 박탈하는 이 세계는 참으로 음란하다. [....] 정치꾼과 연예인의 말과 미소에서 그러한 음란성은 나타나며, 기도(prayer, 祈禱)나 무지, 어용 지식인의 지혜 속에서도 음란은 느껴진다.
음란성은 체제측의 언어 용법으로 말하면 도덕적 개념이다. 그들은 음란이라는 용어를 자신들의 도덕성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도덕성을 표현하기 위해 남용해왔다.
음모를 드러낸 벌거벗은 여자가 음란한 것이 아니라, 침략전으로 받은 훈장을 드러낸 정장한 장군이 바로 음란하다. 히피들의 의식이 음란한 것이 아니라, 전쟁은 평화를 위해 필요하다고 선포하는 교회 고위 성직자야 말로 음란하다.
more..
언어의 치료, 즉, 체제측에 의해 그 의미가 거의 전적으로 왜곡되어 있는 단어들(그리고 나아가서 개념들)을 해방시키려는 노력은 도덕적 기준과 유효성을 체제측으로부터 체제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이전할 것을 요청한다. 마찬가지로 사회학과 정치학의 어휘도 근본적으로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즉, 그것은 그 그릇된 중립성을 탈피해야 한다. 그것은 '거부'라는 맥락에서 조직적이고, 도전적인 방법으로 '도덕화'되어야 한다.
도덕성은 반드시 이데올로기적일 필요는 없으며, 보통 그렇지도 않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소집영장을 태워버리게 하는 유효한 무기이며, 나라의 지도자들을 조롱하고, 길거리에서 데모를 하며, 교회에서 '살인하지 말지어다'라고 씌어있는 피켓을 들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음란에 대한 반응은 수치심이다. 그것은 대개 금기를 범했을 때 동반되는 죄의식의 생리학적 표출이라고 해석된다. 그러나 이 사회가 문명의 가장 기본적인 도덕적 금기들을 위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풍요한 사회에서는 음란한 노출은 더이상 수치나 죄의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음란이라는 말은 섹스의 영역에서 속하며, 수치심과 죄의식은 오이디푸스적인 상황 속에서 생겨난다. 이런 측면에서 만약 사회적 도덕성이 성적 도덕성에 그 뿌리박고 있다고 할 때, 이 풍요한 사회가 수치심을 전혀 모르고, 죄의식을 효율적으로 억압하고 있다는 것은 성적 영역에서의 수치심과 죄의식의 쇠퇴를 가리키게 될 것이다. 사실 실질적으로 나체를 노출하는 것이 용납되고, 심지어 고무되기조차 하는 형편이며, 혼전 혼외 성교에 대한 터부가 상당히 완화되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성의 자유화가 풍요한 사회의 억압적이고, 침략적인 권력을 위한 본능적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는 모순에 직면한다.
체제 자신의 도덕성에 대한 자유화가 효과적인 통제의 틀 안에서 일어나고, 이 틀 속에서 유지되며, 자유화가 전체의 통합을 강화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면 이러한 모순은 해결될 수 있다. 금기의 완화는 죄의식을 경감시키고, 상당한 정도로 양면성을 갖고 있다해도, 자유로운 개인을 제도화되어 있는 아버지들에 속박시킨다. 그들은 강력하지만 동시에 관대한 아버지들이고, 국가와 그 경제를 관리함으로써 시민에게 자유를 부여하고 보호한다.
한편 금지를 위반하는 정도가 성의 영역을 넘어서 거부와 저항에까지 이르게 되면, 죄의식은 경감되거나 억제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된다. 즉, 우리가 아닌 아버지들이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관대한 것이 아니라 잘못을 범하게 되어 그들 자신의 죄를 모면하기 위하여 우리 아들들을 유죄로 만들고자 한다. 그들은 우리가 살고 싶지 않은 위선과 폭력의 세계를 창조했다. 본능적 항거는 정치적 저항으로 변화하여 이에 대항하고 체제는 그 힘을 최대한으로 동원한다.
이 아버지들의 연합이 그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 저항이 현재의 발전 단계에서 사회적인 변화의 비전과 급진적인 정치적 실천을 내포하고 있는 문화적 전복의 범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저항세력들이 현 사회에 제기하고 있는 거부는 과거의 문화에 의해 배반당해 온 인간적인 약속을 실현시킬 새로운 문화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부정이 아닌 긍정이다. 정치적 급진주의는 이런 이유에서 도덕적 급진주의를 의미한다. 이것은 자유를 위한 전제조건을 인간에게 제공해줄 도덕성의 출현이다. 이 급진주의는 인류에게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도덕적 기초를 활성화시킨다.
특정의 사회적 기준에 따른 모든 도덕적 행위 이전에, 또 모든 이데올로기적 표현 이전에, 도덕성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하나의 '성향'이고, 이는 공격성에 반대하고, 더욱 더 큰 통일적 삶을 창조하고, 보존하려는 에로스적 충동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모든 가치의 이러한 측면을 인간들의 연대성을 위한 본능적 기초로서 획득하게 될 것이다.
- H. 마르쿠제, '해방론'(An Essay on Liberation, Boston: Beacon Press,1969.), 청하신서 16, 1991. pp.18~20,
마르쿠제의 전복적인 역설의 연장에서, 장자연 사건 속에 등장했을 그 룸살롱이 음란한 것이 아니라, 경찰의 수줍고 겸손한
수사결과 발표가 음란하고, 우리 언론의 갑자기 드높아진 도덕성과 윤리의식이 음란하며, 우리 사회의 침묵과 그 침묵의 나선들을 조종하는
'죄 없는 권력의 경건한 훈계'가 음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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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연우의 해가 지는 거리
2009/04/26 11:27
del.
대한민국 네티즌 망명지 홈페이지 일부 캡처화면
(캡처내용 링크-https://www.exilekorea.net/71193)
장자연 사망사건. 결국 우려했던 대로 됐다.
우리가 그동안 헌법에서 보장된 '표현을 자유'를 인터넷상에서 한계를 체험하면까지 말했던 것이 결국 빛을 바래고 말았다.
경기도 분당경찰서는 지난 24일 장자연 사
댓글
댓글창으로 순간 이동!다른 이면의 조명이군요.
어둡고 분란스러운 것은 저편에?
우리사회는 경건하고, 도덕적인 사회니까요.
경찰도 새색시처럼 수줍고, 겸손하기 짝이 없고 말이죠.
고귀한 권력자들께서는 조만간 승천이라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음란함'에 대한 '생각엮음'(trackback) 하나 드립니다.
[여성의날] 여성들의 대답 - 아네스 바르다
http://nooegoch.net/130
예전에 재밌게 읽었던 글인데 이렇게 트랙백으로 엮어주셨군요.
언젠가 여성영화제에서 안네스 바르다의 '끌레오, 다섯시에서 일곱시까지'를 꽤 인상깊게 본 적 있는데.. 문득 그 (영화 속의 불안한 실존에 이끌려 거리 이리저리를 헤메며 부유했던) '끌레오'는 지금 어떤 모습일지 궁금합니다.
!@#... 뻔한 말이지만, 이번 사건의 핵심교훈은... "죽지말자" 라고 봅니다. 죽음으로 무언가를 호소하며 남긴다, 그런 거 좀처럼 소용 없음. 악착같이 증거를 남기고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고 상대를 결국 조져놔야 뭐가 조금 움직이든 말든 합니다.
여튼 경찰 발표로 "고인이 착각했을" 가능성 운운한 것으로 보아 유서에 해당언론사 사장이 올라온 것은 팩트 인증을 한 것이고, "김대표의 스케쥴에는 있지만" 운운한 것으로 보아 유력 용의자였던 것도 팩트 인증. 이제 이종걸 의원 등 조선일보사의 고소와 협박을 받은 이들이 무고죄로 역관광 크리를 태워주기를 간절히 바랄 따름입니다.
죽음을 통해 전해지는 메시지라는 것은 그 자체로 최후적인 성격을 갖고, 그 만큼 강렬한 에너지를 갖는 것이기는 하다는 생각을 여전히 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은 그 죽음으로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분께도 몹시 안타까운 일일 뿐더러,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불행한 방법(물론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면요.. 물론 죽음은 그 자체로 죽음일 뿐이지만... )이겠지요. 죽음을 권하는 사회가 되어서는 더더욱 곤란하겠고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김현의 문구 중에서 "자살은 어떤 식으로든 용납될 수 없다. 살아서 별별 더러운 꼴을 다 봐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삶이니까."라는 김현답지 않은 의지적인 자기반복의 선언적 문구가 있는데... 캡콜님 말씀처럼 '살아남은 사람'이라도 별별 더러운 꼴을 다 보면서 이 고결한 사회와 싸워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추.
리승환 동무와의 인터뷰는 참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
생각보다 너무 말끔(물론 소품으로 가려지긴 했지만요)하셔서 솔직히 좀 놀랐다능...
김현씨의 문구 속에서 '살아서! 반드시 살아서! 살아서 죽이되든 받이되든 종지부를 찍어라'는 완결의 중요성을 느끼면서 자신 외의 다른 이를 믿어 봤자 손해라는 시니컬한 의미를 느낍니다.
좀 정당 공정한 세상이 되었으면..
얍.
좋은 살인방법을 알려줬으니 실천하면 되는겁니다.
너무 짧아서 잘 해석이 안됩니다.
저알 음란한 자들은 다들 멋진 옷과 가면을 걸치고 있죠. 다른 이의 무지와 음란을 탓하면서.
크게 기대도 안 했지만(...), 역시나였네요. 계좌를 살펴 보니 돈 거래가 없어 스폰이니 어쩌니 하기 힘들다는 발표는 좀 웃겼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성매매하면서 카드라도 쓰나 보죠. 상호까지 확실하게 밝히면서. 하하하하하하하하...
리승환 동무처럼 저역시 성매매를 증오하지는 않습니다만, 물론 개인적으론 피하고 싶기는 하지만요, 제발 좀 고상한 척은 안했으면 좋겠다는 강렬한 바람은 갖고 있습니다. 막 욕이 튀어나오려고 합니다, 그네들의 그토록 경건한 이야기들을 듣고 있노라면...
저도 성매매를 증오하진 않아요. 외려 양지로 끌어내 노동자 혹은 사업자로서 줄 권리는 주고, 져야 할 책임은 제대로 지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만 개인적으론 존혀 이용하고픈 생각은 없습니다. 정 애인이나 관계를 가질 파트너가 없다 해도 차라리 손을 쓰고 말지. 그 돈이면 할 수 있는 게, 어휴.
역쉬 (애인님께 사랑받을 충분한 이유가 있는) 멋진 청년이쉬고만용.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