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잔상은 실연하고 난 뒤에 뭔가를 입 안으로 넣는 여자들이다.
그녀들은 국수를 먹거나(타락천사), 아이스크림을 먹는다(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그녀들은 이제 세상이 끔찍하게 싫어졌고, 정내미 떨어졌다.   
그는 떠났다.
이제 그 웃음도 그 따뜻한 공기들 사이를 떠돌던 봄날 햇빛 같은 음악도 그녀들 곁에는 없다.
그런데도 그녀들은 뭘 그렇게 꾸역꾸역 먹는걸까.
그건 희망인걸까, 아니면 환멸인건가, 아니면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던걸까.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실연은 스물살, 혹은 열아홉에 찾아왔다.
너무 오래 전 일이라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건 고등학교 3학년을 자퇴하고, 한 일이 년 사이에 생긴 일이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강렬한 설렘의 기억은 그 아이, 투명하게 노랗고, 푸른 햇빛, 파란 대문....
아무튼 내 쪽에서는 사랑이지만, 그 아이 쪽에서는 우정인 관계가 끝난 뒤에 나는 한동안 밥을 먹지 못했다. 그 때는 정말 밥맛이 없었다. 밥이란게 뭐지... 세상에 그런 것도 있나? 세상에 아무 것도 없었다. 지금은 생각나지 않지만, 그 때 어떻게 화장실에는 갔던거지? 숨은 쉬었던건가? 그런 궁금증이 생긴다. 아무튼 작은 골방, 그 어둠이 며칠인지 모르게 나를 위로할 뿐이었다.

다시 돌아가면, 그 뒤로는 실연, 혹은 그 비슷한 무엇을 하더라도, 밥 잘 먹는다...
물론 아주 가끔은 안 그럴 때도 있었다.
한 번, 혹은 두 번쯤.

사는게 점점더 재미가 없다.
왕가위 영화의 여인들은 여전히 사랑스럽지만, 그녀들은 여전히 실연한 뒤에 참 우아하게도, 사랑스럽게도 뭘 그렇게 꾸역꾸역 먹고 있지만.... 그게 이제는 별다른 감흥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왕가위를, 아니 그 이미지들을 정말, 그 날, 그 시간의 햇빛들처럼 애착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그런 건 별로 남아 있지 않은건지... 아무튼 왕가위의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를 벌써 세 번째 끊어서 보고 있다. 그 다음을 넘기기가 너무 아쉬워서가 아니라, 보기는 봐야겠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허와 무기력과 지루함 때문에 이제 겨우 이십 몇분쯤을 봤을 뿐이다.

이 영화는 아무래도...
한 한 달에 걸쳐서, 혹은 그 이상으로 시간을 두고 보게 될 것 같다.
물론 아예 보다가 말지도 모르겠지만...

참 식상하고, 지루하며, 문득 환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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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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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 2009/02/11 21:36

    저는 요즘도 혼자 방에서 뭔가를 꾸역꾸역 먹다가,

    혼잣말을 건네곤 합니다. "병신"..

    ... 민노씨 글 읽으니까.. 제 실연의 기억이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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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2/11 23:08

      몹시 의외네요.
      꽤 행복한 연애를 하고 계실 것 같은데 말이죠.

      그런 기억이 계시군요..

  2. Mr.Met 2009/02/11 22:03

    실제로 여자들이 많이 그러더라구요.
    근데 저는 실연도 안당했는데 왜 자꾸 먹을까요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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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2/11 23:09

      미툽니다...;;

  3. seevaa 2009/02/11 22:50

    참 식상하고, 지루하며, 문득 환멸스럽다...
    요즘 한창 시청률 상한가를 달리는 드라마 '아내의 유혹'을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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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2/11 23:09

      본의 아니게 TV가 망가져서요.
      겸사겸사로 TV는 이제 그만 볼까 싶기도 하구요.
      한 반년 이상된 것 같네요..;;;

  4. 미도리 2009/02/12 00:26

    블루베리 나이츠를 뉴욕행 비행기에 봐서인지 그 느낌이 참 좋았는데...
    그래도 왕가위 영화 중 그나마 실연이 다시 사랑으로 이어지는 희망적인 영화라서 좋던데요 ^^
    참 저 도메인 딴거 포스팅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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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2/12 11:17

      한 이십분을 봤을 뿐인데도 중경삼림과 타락천사를 짬뽕한 것 같은 느낌 때문에.. 그 인위적인 조명과 색감들도 예전엔 참 좋았는데, 블루베리에선 좀 부담스럽고 말이죠... 아무튼 뭐랄까... 왕가위가 변한 건지, 아니면 제가 변한 건지.. 아니면 세상이 변한건지... 모두 변했겠습니다만, 예전의 감흥이 쉬이 생겨나지 않는군요.

  5. 책읽는키노 2009/02/12 01:01

    그리고 <중경삼림>의 금성무도 꾸역꾸역 과일 통조림을 먹었지요. 저도 우울할 때 마구 먹는 성향인데, 토할 정도로 먹고나면 이전의 우울함이 잊혀질 만큼 우울해지거든요. 꽤 효과가 좋습니다. ^^
    왕 감독 영화는 <화양연화> 이후론 전혀 안 봤는데, 작년 말에 <아비정전>과 <중경삼림>을 다시 봤더랬습니다. 아비는 가슴이 터질 만큼 좋았고, 중경삼림은 신물이 올라와서 도저히 못보겠더군요. 음, 왕 감독 영화 중에 민노씨 님은 뭘 제일 좋아하실지 궁금하네요, 갑자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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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2/12 11:25

      제가 가장 좋아하는 왕가위의 작품은... 그게 영화적으로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여전히 '열혈남아'입니다.

      http://kino21.com/72

      아비정전도 몹시 좋아하지요...
      아비정전은 영화적으로만 본다면 왕가위의 최고 작품이 아닌가 싶네요.
      많은 분들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처럼 말이죠.

      저 역시 이상하게 '화양연화' 이후로는 좀 망설여 진달까... 예전의 열정이 식어버린 느낌이랄까... 그런 걸 많이 느꼈는데요. 그래도 2046은 꽤 재밌고 흥미롭게 관람했죠. 그런데...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추.
      궁금하던 점이 있는데요.
      책읽는 키노에서 그 키노는 '종이 키노'와 관련이 있는건가요?

    • 책읽는키노 2009/02/12 14:15

      그럼 2046은 봐야겠네요. 민노씨 님 영화 글들을 읽어봤는데, 아마 저랑 거의 같은 세대신 거 같군요. 읽다가 가슴이 짠 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키노는 존 스타인벡의 <진주>의 원주민 아빠에게서 따왔습니다. 그리고 엄청 후회했죠. 키노라는 필명을 쓰는 분이 수천 명 쯤 되더라고요. '책읽는'은 영화 느낌을 희석해보려고 붙였습니다. 물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민노씨 2009/02/12 19:19

      열혈남아는 그 당시에 직접 본 것은 아니고요. ^ ^;
      좀더 뒤에 봤습니다.. 극장에선 당근 못봤죠.
      당시에는 재개봉관에서 보신 분들이 있다고는 알고 있지만요.

      키노는 그런 사연이 있으셨군요. : )
      저는 영화잡지 '키노'를 좋아하셨던건가..
      뭐, 그런 추측을 했었습니다.
      저는 굉장한 펜이였거든요

      2046은 제가 장쯔이를 꽤 좋아하기 때문에...;;;

  6. nooe 2009/02/12 09:37

    저도 꾸역꾸역 먹는 걸로 한탄을 대신할 때가 많답니다. 주로 싸구려 음식이 목을 거칠게 긁으며 넘어가게 만드는 뭐 그런 행동을 벌이는데요.^^;
    전 왕가위 영화중엔 동서서독과 아비정전을 젤 좋아해요. 말씀하신 영화는 아직 안봤네요.
    '딱딱'과 '말랑'을 오가는 글들의 이어짐이 재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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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2/12 11:28

      동사서독을 좋아하시는군요. : )
      동사서독은 올해 4월에 재편집판이 개봉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동사서독을 극장에서 놓친 저로선 몹시 기다려지는 개봉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댓글 한방 날려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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