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순 사건, 연쇄살인마와 카사노바

2009/02/02 13:47

강호순 사건, 두 번째 글.

0. 이슈 유통의 제로섬(zero-sum) 현상 : 식상한 이야기

늘 반복되는 소리지만 간단히 하고 넘어가자.
이슈 유통의 제로섬 현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강호순 이슈는 그 이슈가 갖는 실질적인 중요성 보다 훨씬 더 소모적인 방식으로 다른 이슈(MB 악법 이슈, 미네르바 이슈, 용산 참사 이슈)를 잡아 먹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선과 중앙의 얼굴공개'는 수구적 담론권력으로서의 전략적 고려가 강하게 개입되었으리라 추정한다. 이들의 선정적인 도발에 편승해 독자 알 권리 운운하는 건, 뭐랄까, 알면서 그러는 건지, 모르면서 그러는 건지... 너무 순진하다.

언제부터 공익과 국민의 알 권리에 그토록 민감했던 신문사였나?
조중(동)은 이런 '선정적인 흥미 요소'에 대해서는 어떤 신문들보다 '용감한 신문'으로 둔갑한다. 거기에 자신들이 '지워야 하는 이슈'(MB악법, 용산참사 등등)이 있으면, 타이밍도 참 절묘하지, 아주 올인한다. 이들은 언론사라기 보다는 일종의 정치 파파라치다. 독자들이 정말 고민하고, 관심을 가져야 하는 그 본질적인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봉사하지 않고, 독자들의 '세속적 호기심'을 '정치적인 의도'에 의해 왜곡하고, 조절하기 위해서 그 정치 파파라치는 움직인다.

물론 강호순 사건 자체에도 다양한 흥미 요소, 고민 요소들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강력한 흥미 요소가 있다고 해도 저널리즘은 그 흥미 요소를 사회적인 고민이 필요한 공적 요소와 비교형량해야 한다. 내가 조선과 중앙의 '얼굴 공개'를 비판하는 이유는 이상에서 간략히 이야기한 맥락적인 고려, 관계적인 고려에 기반한다.

하지만 난감한 게 있다.
이런 선정성 매우 강한 이슈에 대한  '몰입적 감수성'(냄비근성)은 한번 불 붙으면 자기 운동적으로 확산하는 경향을 갖는다. 강박적인 심리기제가 작동한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렇다. 여기에 대해 '우리 강호순에 대해 그만 떠듭시다'라는 류의 '순진한 설득'은 그다지 유효하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강호순 이슈를 냉정하게 분석하고, 고민한 뒤에 가급적 빨리 놓아주는게 좋을 것 같기도 하다. 취할 건 취한 뒤에, 다른 공적 이슈들에 할당된 사회적인 고민를 위한 '뇌세포'를 사용하는게 좋겠다는 말이다. 혹은 강호순을 이야기하면서, 또 용산과 미네르바와 MB 악법, 좀더 거시적이고, 본질적인 차원에서는 담론권력의 정치적인 작동기제들을 더불어 문제삼을 수 있다면 좋으리라.


1. 조선일보, 중앙일보의 얼굴 공개에 대해

공익을 위해서라고?
알 권리를 충족하기 위해서라고?
삼성 X파일 같은 사건, 삼성 비자금 사건 같은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사건에 대한 알권리나 제발 좀 충족시켜주시지?  

공익이나 알 권리나 모두 꽃 같은 소리다. 정치적인 담론권력으로의 전략적인 고려가 없었다면 어느 정도 긍정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고려 없이 "조선일보, 중앙일보가 장사 잘한다"는 류의 인식에 대해선, 글쎄, 꽃 같은 건 꽃 같다고 얘기해야지, 무슨 거기에 장사 잘한다는 소리를 하는건지, 그게 무슨 저널리즘의 의무라고 이야기하는건지 모르겠다. 독자의 변덕스럽고, 별로 존중하고 싶지도 않은 요구에 잘 적응한다고 상찬하는지 나로선 알 길 없는 거다. 지들이 '비판할 때는 '냄비근성'이고, 지들이 장사하기 위해선 그 냄비근성도 '알권리'로 둔갑한다.

독자들의 파괴적이고, 세속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일이 저널리즘의 사명이라면 잘하는 일 맞다.
그런데 혼자서 근엄한 척 다하고, 별별 사회적인 고민은 혼자 다하는 것 처럼 설레발치고,  국가의 앞날을 혼자서 짊어지고 나갈 것처럼 호들갑 떠는 우리나라 소위 '일등' 신문, '이등' 신문이 이런 짓거리를 한다. 언론의 공공성이라는 그 최소한의 기준으로 볼 때 "용기있는 도전으로 한국사회에 새로운 규범을 만드는 노력의 일환"(미디오늘 김창룡 칼럼)이라고는 도저히 못 봐주겠다(김창룡은 도무지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거지같은 칼럼을 쓰는건지 모르겠다).

강호순 신상공개, 세가지 전제조건 (2009년 01월 31일 (토) )
[김창룡의 미디어창] 연쇄살인범 신상공개 논란에 대해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76862
짧게 부연하자면 김창룡 칼럼에 있는 논리적 모순은 정말 심하다. 특히 개별 사안의 구체성에 대한 고려가 없이 논거들을 무분별하게 대입하는 모습들에선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굳이 그 처참한 논리적 오류들을 확인하려면 한번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무슨 공익? 무슨 놈의 용기있는 도전?
수구 담론권력의 선정주의적 도발일 뿐이다.
이를 합리화하려는 꽃 같은 논리들이 지랄같이 피어나지만, 꽃 같은 건 꽃 같은 거고, 지랄은 지랄일 뿐이다. 

이에 대해선 더 떠들어봐야 입 아프다.
사안의 여러 논점들을 잘 정리한 새드개그맨과 행인을 참조하기 바란다.

강호순의 얼굴(1) : http://sadgagman.tistory.com/85 :
강호순의 얼굴(2) : http://sadgagman.tistory.com/86 : 특히 강추(후반부).
그놈 얼굴 : http://blog.jinbo.net/hi/?pid=1131
사자성어 : http://blog.jinbo.net/hi/?pid=1132


2. 강호순 사건과 남인수 사건 : 연쇄살인마와 카사노바

카사노바 남인수 사건이라는게 있다.
검색해보면 다음과 같은 사건 개요를 얻을 수 있다.

1년간 70여명의 미혼 여성을 농락한 혐의로 기소됐던 박인수(당시 26세)가 혼인빙자 간음죄에 대해 무죄.

1955년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라는 희대의 명판결문에 의해 면죄부를 받은 카사노바 박인수 사건은 남성적 시각에서 바라본 정조 개념..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情操)만을 보호할 수 있는 것...."
- 재판장 권순영, 선고 중에서

웬 뜬금없는 남인수?
김창룡 칼럼의 마지막 구절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남의 인권을 유린하고 이를 인정한 범인들에게까지 인권의 이름으로 신원을 공개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은 일종의 사치에 불과하다. 법은 보호할만한 가치가 있는 권리만을 보호해야 한다."

그 구절 때문에 남인수 사건이 연상됐다.
남인수 사건 선고문에서 권순영은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일부 극우 논객들에 의해 '법은 지킬 가치 있는 표현의 자유만을 지킨다'는 엉뚱한 주장의 논거로 사용되고 있더라. 그러니 사이버 모욕죄나 MB 언론악법을 찬성하는 논거로 둔갑해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법은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권리만 보호해야 한다는 김창룡의 주장과 남인수 사건에서 권순영이 이야기한 '법은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할 수 있다는 주장이 가능하게 한 당대의 사회적인 인식과 어떤 담론권력 혹은 제도권력이 작동하는 '구조적 관점'은 몹시 유사하다.

참조. 남인수 사건의 무죄 배경.
물론 사안의 구체성에서 강호순 사건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남인수 사건은 당시의 사회적인 인식 - 권력 작동(최후적 권력 장치인 법제도)구조에서 결론적으론 합리적인 판단을 이끌어내고 있다. 하지만 논거로 그 당대의 인식, 즉 봉건적인 가부장의 인식이 사용되었다.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이라는 관점으로 볼 때 남인수의 무죄는 타당하다. 하지만 재판부의 판단 근거는 남인수와 관계한 여성들이 법에 의해 보호받을 가치가 없는 여성라고 봤을 뿐이다(즉, 범죄의 객체가 되지 않는다고 봤다. 물론 혼빙간에 대해선 비범죄화가 맞다.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의 자유를 부정하는 봉건적인 입법의 잔재는 사라져야 마땅하다.

물론 '정조'와 '인권'을 동일 평면에서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다만 '인권'이건, '정조'건 간에 그 당대의 지배적인 인식('상식' 혹은 '관습', '법제도')의 한 유형이다.
그러니 인권 역시도 역사적으로 '발명된 개념'이다.
노예에게 인권이 있었나? 
하나의 물건, 주인의 재산일 뿐이지 무슨 인권?

인권의 개념요소로서의 보편성,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인권이 있다(천부인권)는 그 인식은 생겨난지 얼마 되지 않은 거다. 양반이나 지주나 귀족에게만 있었던게 인권이다. 왜냐하면 그들만 사람이었으니까. 역사 시간에 배우지 않았나? 그러니 '인권'은 하나의 역사적인, 사회적인 인식일 뿐이다. 그것은 생성, 발전, 그리고 소멸할 수도 있는 역사적인 어떤 것이다. 위 남인수 사건의 '정조'개념이 점차로 사라져가는 하나의 관념, 그 관념에 엉킨 관습과 제도의 총체인 것처럼 그런 것일 뿐이다. 

인권은 인간이라는 가치를 지탱시키는 궁극의 가치, 포기할 수 없는 어떤 것인 것처럼 '이제서야'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적어도 대외적으로, 교과서적으론 그렇게 떠든다.
그 고생 고생을 거쳐 여기까지 온거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대한민국에 과연 인권이란 어떻게 대접받고 있나?
용산 참사에서 그 떨거지들에게 인권이 있었나?
미네르바 사건에서 국가공권력이 발동하는 방식은 어떤가?
거기에 인권이라는 요소가 눈꼽만큼이나 있었던가?

아가리 권력과 정치권력과 담합한다.
그 위에서 돈지랄 권력이 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이런 대한민국판에서 인권은 무슨 인권?

그저 아가리 권력들이 현실을 가리는 환상기제로 사용하는 '표피적인 인권'이 있을 뿐이고, 강호순 같은 '명백한 공적'이 등장하면, 그 만만한 놈을 재물삼아 인권 그 자체에 대한 '반동'적인 시도들이 자행된다. 미국이니, 일본이니, 프랑스니 하는 아리까리한 수사를 동원해서 말이다.

대한민국 '인권' 개념이 5, 60년대 '정조' 개념보다 뭐 그리 나아졌나?
그 양자간 인식적 성숙도는 얼마나 서로 다른가?
우리는 얼마나 진지하게 인권에 대해 고민했고, 또 그 인권이라는 인식을 고양시켰나?
뭐, 정조 관념 논하는 수준이나 조선과 중앙에 편승하는 수준이나 방구나 뽕이나인 것 같다.

그러니 '저 쳐죽일 놈'이라고 분노하는 그 당연한 감정이 과연 그 감정을 만들어낸 '인간애' 와 '휴머니즘'에 얼마나 가까운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극도로 정치화하고, 상업화한 이기적인 언론집단의 감언이설이 당신의 인권과 알 권리에 얼마나 보탬을 줄 수 있는지 정말 냉정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안된다.

권력의 야만이 작동하는 기제로서 '지식'은 그 당대의 관습과 인식에 개입하여 그것을 '조종'한다.
주로 그것을 담당하는 기구는 거대 담론집단, 강호순 사건을 통해 본다면,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다.
그들은 '알 권리'와 (당신들의 인권)을 위해 복무할 생각 전혀 없다.
권력과 담합하거나, 스스로의 권력을 확대재생산하기 위해 복무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당하고도 모르겠나?

하지만 그들은 당신의 그 알량한 세속적 호기심에 불과한 '알 권리'를 위해 복무하겠노라고, 아리까리한 논리의 떡칠을 한 이런 저런 꽃 같은 근거을 앞세우고, 다 함께 저 '살인마'를 쳐부수자고 당신의 '극도로 분노한 감정'을 선동한다(전두환이라는 희대의 살인마에게는 역사와의 화해, 김대중 잘한다고 상찬했던 바로 그 신문사들이다!! 제발 좀 기억하자).
당신은 기꺼이 편승한다.
그건 우리의 알 권리이자, 사회적인 정의라고 굳게 믿는다.

참 쌍으로 화기애매하게 놀고들 있다.



* 관련글
강호순 사건, 중앙일보은 "유권해석"의 근거를 당장 제시하라.


* 관련 추천 포스트
강호순의 얼굴(1) :  : 강추.
강호순의 얼굴(2) :  : 특히 미디어오늘의 김창룡 칼럼 부분과 후반부 강추
그놈 얼굴
사자성어 
흉악범죄자 얼굴 공개 떡밥



* 이 글은 예외적으로 정체불명의 유사 저널리즘 유통매체에 송고합니다.


트랙백

트랙백 주소 :: http://minoci.net/trackback/718

  1. Subject : 공개불가

    Tracked from 레이의 행복공작소 2009/02/03 17:57 del.

    이야기 배경 : 흉악범 강호순이 체포되면서 사회 이슈가 되고 있다. 이 와중에 조선일보, 중앙일보가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하게 되었다. 얼굴 공개에 대한 찬반양론이 드세지고 있다. 이미 범죄자의 이름이 공개된 터이고, 흉악한 일이 하도 자주 일어나서(아직 용산의 아픔이 남아있다) 이름을 살짝 밝히지 않으면 혼돈이 될 듯하기도 해서 한 번만 사용하기 한다. 연일 TV에서 흉악범죄인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범인이 검거된 뉴스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아내에..

  2. Subject : 증오

    Tracked from 몽상연구소™ 2009/02/04 16:03 del.

    아주 오래 전에 읽은지라 제목도 작가도 기억이 안 나지만, 이런 이야기가 있다. 정확히 언제인지 알 수 없는 미래에 범죄자를 잡아 처벌하는 내용인데, 그 처벌이란 것이 범죄자를 잠실종합경기장 같은 곳에 무대를 만들어서 세워놓고는 사람들이 모여 온갖 욕과 저주를 퍼부으며 분노를 그에게 쏟아붇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날을 마치 커다란 축제나 운동 경기처럼 여기고. 집단이란 가면 뒤에 숨어서는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는 이에게 악다구니를 퍼부으며 희열에..

댓글

댓글창으로 순간 이동!
  1. Draco 2009/02/02 14:32

    아 정말이지 이래서 민노씨 글을 좋아한다니까요. 잘 읽고 갑니다.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9/02/02 16:29

      드라코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 )
      지금 다시 읽어보니 오타, 비문 투성이네요.. ;;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2. koreasee 2009/02/02 16:37

    뭐라 할말이 없는 사건이라 조용히 읽고 갑니다.
    잘보고 갑니다 . 아참.. 구정연휴 잘보내셨지요?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9/02/03 01:05

      한국씨께서는 설 잘 보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 )
      안부 말씀 반갑습니다.

  3. 명이 2009/02/02 20:00

    참...쌍으로 화기애매하게 놀고 있습니다...>> 완전 대박 공감...!!! +_+
    바로 그것입니다요~ 그쵸잉? 후아..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9/02/03 01:06

      명이행님 와주셨군용.
      저도 뭐 거기에 들러리 서서 놀고 있다는 느낌도 살짝 들고요...^ ^;;

  4. 2009/02/02 23:22

    잘보고갑니다 ^^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9/02/03 01:06

      꺅.. 이거 필명으로 쓰면 참 좋겠는데요? ㅎ
      고맙습니다.

  5. 붉은바람 2009/02/03 17:13

    호심탄회하게 잘 써주셨네요
    근데 오타가좀많으시다능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9/02/03 22:02

      앞 절반쯤은 어제인가 오타를 수정했는데요.
      그 뒤 절반에도 오타가 많은 것 같네요.

      '허심탄회'에 관한 오타도 그 중에 하나인갑보죠?
      곧 다시 추고하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

  6. 레이먼 2009/02/03 17:58

    민노씨의 글에 자극을 받고 쓴 글을 트랙백 걸고 갑니다.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9/02/03 22:03

      오, 반갑운 트랙백이군용. : )

  7. silent man 2009/02/04 16:03

    강호순의 저칼럼은 박수치며 읽었습니다. 너무 재밌어서.
    ㅡ,.ㅡ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9/02/05 03:56

      김창룡의 칼럼을 말씀하시는건가요?

      추.
      그나저나 드디어(?) 티스토리 쪽 트랙백이 제대로 오나보네요.
      싸일맨님 트랙백이 근 몇 달동안 튕겨내던 트래백 오류가 정상화된 신호탄이었으면 좋겠고만용.

    • silent man 2009/02/06 01:33

      예, 강호순에 대한 그 칼럼이요. 하하.

      오오, 그럼 제가 트랙백 문제를 해결한 거로군요(퍽-).

    • 민노씨 2009/02/06 07:31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ㅎㅎ
      완전히 해결된 것이라면 좋겠는데 말이죠... : )

가벼운 마음으로 댓글 한방 날려주세요. : )

댓글 입력 폼
[로그인][오픈아이디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