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누군가와 사랑한다는 것

2012/07/23 04:59
사랑한다는 건 그녀의 외모라던가, 목소리에 길들여지고, 중독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오히려 그녀가 만들어내는 어떤 공간이다. 그 공간은 결핍한 당신을 위로하고, 당신의 공허가 항상 꿈꾸던 그런 곳이다. 거기에서 피어나는 풀잎 하나에도 당신은 기뻐 눈물 흘린다. 거기에 있는 작은 오두막을 지키기 위해 당신은 목숨 마칠 각오가 되어있다. 하지만 당신을 감싸던 그 풍경은 쉽게 사라진다. 그녀는 그 풍요를 언제라도 지워버릴 불안과 결핍을 만들어낸다. 덧없는 신기루처럼, 너무 쉽게, 기쁨은 사라진다. 그리고 당신이 영원히 알지 못할 슬픔이 세상을 가득 채운다. 그게 비정하리만큼 냉정한 세상의 법칙이다. 대부분의 당신은 어느새 더 공허하고, 굶주린 자기를 발견한다. 세상이 존재하는 동안 그 저주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세상이라는 건, 원래 그렇게, 인간에겐 아무런 애정도 없는 신에 의해 만들어졌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그녀를 탓해선 안된다. 당신도 이미 그녀에게 똑같은 결핍과 슬픔을 선물했으니까.

당신은 그녀를, 목적어로서, 사랑할 수 없다. 부버의 말이 맞다면, 다만 사랑은 당신과 그녀 사이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당신은 그녀와 함께 작은 피난처를 만들 수 있을 뿐이다. 그녀의 눈동자, 목소리들은 어떤 풍경을 만든다. 그 눈동자, 목소리가 머무는 곳은 당신의 깊은 그림자 속이다. '그녀'라는 존재는, 신비로운 마법처럼, 당신의 결핍을 일꾼 삼아 소망의 풍경을 만든다. 그리고 당신과 그녀는 '그 곳'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잠시, 우리를 둘러싼 이토록 잔인한 세계를 잊는다. 그리고 함께 영원을 소망한다. 그건 한없이 외롭고, 덧없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운 섬이다.

* 발아점: Ederlezi


에델리지(Ederlezi): 내가 늘 돌아가던 거기

2012/07/20 22:17
기형도를 빌자면, "단 한 줄"(오래된 낙서) 혹은 그르니에식으로 말하면, '다시 돌아가서 늘 바라보게 되는 그 순간'을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방치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내가 어떻게 널 그토록 잊고 지내왔던 걸까...  




내가 가장 좋아했던 시와 낱말

2012/07/15 05:44

deulpul의 글, “시인 이상이 가장 좋아했던 시와 낱말”을 읽고 

나는 시를 참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봤자 ‘시의 시대’로 불렸던 80년대의 시들에 한정되긴 하지만. 특히 황지우(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그 전까지만 읽었다)와 박노해('참된 시작'은 별로였고, 노동해방문학의 르뽀시들도 그땐 참 우와! 했는데, 지금이나 그때나 ‘노동의 새벽’이 여전히 좋다)가 참 좋았다. 하지만 가장 반복해서 여러 번, 그 여러 번은 한 쉰 번 이상, 어쩌면 백 번 이상 일텐데, 그렇게 여러 번 읽은 시집은 이성복(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남해금산)과 기형도(입 속의 검은 잎)가 거의 유일하다. 정현종의 서늘하지만 따뜻한, 여전히 어쩔 수 없는 도회적 감성이 좋았고, 장정일의 ‘서울에서 보낸 3주일’이나 ‘길 안에서의 택시 잡기’는 그 객기와 뒤틀림의 감성이 꽤 공감 어리게 신났던 기억이 난다(햄버거에 대한 명상은 별로). 오규원, 황동규, 그리고 황인숙과 유하, 김지하, 이상, 김수영, 함민복 등은 그냥 그때 그때 읽었다. 유하 시집(아마도 ‘바람 부는 날엔 압구정동에 가야한다’)에 김지하를 인사동 찻집에서 보고 ‘지하 형’이라고 부르는 어떤 후배를 묘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러니까 내가 기억하는 잔상은 그런 세속적인 편린들일 뿐이다. 그 밖에 유명하다는 랭보, 보들레르, 발레리, 로트레아몽, 네루다 등의 시를, 물론 한국어로 번역된 책으로 읽었다.

지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를 뽑자면, 그건 아마도 황지우나 박노해의 시는 아닐 거다. 아마 네루다의 ‘망각은 없다’나 이성복의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를 뽑을 것 같다. 하지만 제목에서처럼 내가 오래전 가장 ‘좋아했던’ 시는 황지우의 ‘나는 너다. 17’이다.

나는 너다. 17

내가 먼저 대접받기를 바라진 않았어! 그러나
하루라도 싸우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없으니.
다시 이쪽을 바라보기 위해
나를 대안으로 데려가려 하는
환장하는 내 바바리 돛폭.  
만약 내가 없다면
이 강을 나는 건널 수 있으리.
나를 없애는 방법.
죽기 아니면 사랑하기 뿐!
사랑하니까
네 앞에서
나는 없다.
작두날 위에 나를 무중력으로 세우는
그 힘.

지금 읽으면 그때만큼 좋진 않지만, 그땐 참 환장하게 좋았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했던 낱말들은 너, 바람, 풍경, 무지개, 아이…다. 그 어감이나 조어 자체의 물질감이 좋다기 보다는 그 낱말이 지시하는 이미지의 빛과 투명함이 좋다. 아, 그리고 요즘은 ‘달고나’도 좋더라. 하얗고, 귀엽고, 달콤하다.



내 사상의 스승 달고나(임시 닉네임)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인터뷰 노하우 이야기가 나와서 서로 대화하면서 급 정리한 글에 살을 붙여서 옮긴다. 원래는 한 블로거 벗이 "인터뷰의 달인 민노씨 인터뷰 노하우 좀 알려주삼"하는 말도 안되는 아부드립을 치길래, '이눔아, 내가 너한테 묻고 싶다'는 심정이 되긴 했으나... 슬로우뉴스에서도 그렇고, 내 블로그에서도 그렇고, 인터뷰는 가장 중요한 취재 양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달고나 선생과 이야기해봤다. 나도 생각을 정리할 겸. 뭐 약간 뻔한 이야기이긴 하다.

<인터뷰 노하우>

1. 노하우는 없다.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유홍준) 준비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2. 최대한 친절하자. 그렇다고 알랑거릴 필욘 없다.
인터뷰이에게 친절하자. 처음 만난 사람이라더라도 일단 최대한 호감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하자. 인터뷰이가 좋게 써줄 거라는 믿음과 기대감을 갖는게 중요하다. 없는 이야기도 하고 싶게 만들자. 그렇다고 비판적인 관점을 잃어버리는 라는 건 아니다. 오히려 비판적인 관점을 잃으면 안된다. 그 순간 그건 인터뷰가 아니라 홍보가 된다. 세상에 이미 많은 빨아주는 인터뷰들이 즐비하다. 다만, 비판을 하더라도 인터뷰이가 호감을 갖고 이야기할 수 있는 태도를 유지하도록 노력하라는 얘기다. 비판적 관점 유지는 너무 당연하게 중요해서 아예 언급하지 않겠다.

3. 인터뷰(어)의 페르소나
개성있는 페르소나를 만들겠다는 컨셉도 좋다. 일정한 컨셉(유머, 시니컬, 쿨가이, 핫가이, 똘똘이 스머프 등등)에 따른 일정한 질문 코드, 자신만의 기승전결을 염두에 두면, 그 코드대로 어느 정도까지는 수월하게 인터뷰할 수 있고, 또 페르소나를 만들 수 있다. (좋은 예: 리수령 인터뷰)

4. 무엇보다 캐스팅
의미와 재미를 끌어낼 만한 캐스팅이 중요하다. 인터뷰어가 아무리 훌륭해도 인터뷰이에게 끌어낼 의미도, 재미도 없으면 인터뷰할 필요 자체가 없다. 여기서 좋은 캐스팅이라는 건 무슨 대단한 네임드와 인터뷰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고 시의성을 쫓으라는 말도 아니다. 또 세상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지 않은 사람도 없다. 누구에게나 이야기가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인터뷰어가 생각하기에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사람(인터뷰이)과 인터뷰해야 한다는 거다. 인터뷰이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없는 사람과 인터뷰할 필요는 전혀 없다. (참고: 슬로우뉴스 인터뷰

5. 인터뷰(이)의 입체성
리수령 인터뷰는 일정한 틀을 갖고 일정한 리승환식 유모를 적절하게, 반복적이고(그래서 그건 코드다) 활용하면서 독자들에게 읽는 재미와 더불어 안정감을 준다. 이 방식은 일정한 코드를 통해 독자들에게 그 코드의 즐거움과 몰입감을 높여주고, 인터뷰이 캐스팅만 괜찮다면, 평균적으로 퀄리티 있는 인터뷰를 왕성하게 생산할 수 있는 큰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인터뷰이를 그 코드 안에서 비슷비슷한 존재로 몰개성화할 수 있는 위험과 단점이 있다. 어떻게 보면 인터뷰이의 입체성을 섬세하게 살릴 수 있는 형식은 아니다. 이런 점도 고려해야 한다. (4.와 비교해 장점과 단점을 형량할 것)

6. 독자를 무시하면 안된다.
독자가 많이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애절한 바람을 갖고 인터뷰를 진행하고, 정리하자. '이해 못하는 니네가 부족한거야'라는 식 태도는 곤란한다.

7. 마지막으로, 인터뷰에서의 관점: 인터뷰는 마치 다큐영화와 같다.
인터뷰는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와 비슷하다. 객관적인 것 처럼 보이지만 실은 객관적인 인터뷰라는 건 세상에 없다. 촛불집회가 있다고 치자. 촛불 든 우리 쪽에서 전경을 비추는 카메라와 전경 쪽에서 우리 쪽을 비춘 카메라는 전혀 다른 촛불의 의미를 들려줄 것이 뻔하다. 형식적으로 열쇠를 쥔 건 인터뷰이가 아니라 인터뷰어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말하면, 인터뷰이는 일종의 배우와 같은 존재다. 훌륭한 감독이라면 별 볼 일 없는 배우를 멋지게 연출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어쩌면 가능하다. 하지만 인터뷰이를 배우로 취급하는 인터뷰는 재밌는 인터뷰일 수는 있어서 훌륭한 인터뷰는 될 수 없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함께 감독이자, 배우로서, 또 스탭으로서 자신의 철학과 관점으로 밀당(밀고당기기)하는, 혹은 전투(?)하는 인터뷰야 말로 가장 훌륭한 인터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터뷰는 (연인간의) 밀당이 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적대적인) 전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는게 중요하다(예: 프로스트/닉슨, Frost/Nixon). 인터뷰어가 인터뷰이의 말을 그대로 '전해주는 사람'이 아니듯, 인터뷰이 역시 '인터뷰어의 인형(배우)'은 아니다. 다만 위 6.에서 말했듯, 인터뷰어는 무엇보다 자신이 들려주고 싶은 인터뷰의 독자들, 그 독자들의 가정적 시선과 관점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사랑하는 영화음악들

2012/07/12 09:12
정현종은 자신의 시에서 이런 취지로 말한다. 젊은이는 현재를 살기 위해 미래에 집착하고, 늙은이는 현재를 살기 위해 과거에 집착한다. 물론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뮤즈랑'은, 정현종의 어투를 빌자면, 아, 나는 살기 위해 과거를 바라볼 수 밖에 없구나, 벌써 그렇게 되어버렸네... 절실하게 깨닫게 한다. 그게 그렇게 비참하거나 쓸쓸한 것만은 아니다. 추억은 대개는 따뜻하다. 그땐 일상이 마법이 되고, 연애가 세익스피어 뺨치게 낭만적으로 비극적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땐, 그 비참한 청춘의 한 가운데서도, 아, 살아있었구나...
오래 전부터,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이상한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난, 그런 질투어린 회고의 감정에 젖는다.



내가 사랑하는 영화음악들:  굿바이레닌(인트로), 열혈남아(만남/이별), 중경삼림(왕페이가 나오는 두 개의 노래), 그리고 길을 떠나는 정복자 펠레 (제목 클릭하면 들을 수 있다)

*추.
뮤즈랑 플레이리스트가 블로그에서 자동플레이할 수 있는 HTML 임베드 코드를 제공하면 참 좋을텐데, 앞으로 개발 예정인지는 몰라도 아직 그런 기능은 없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