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란지교(知蘭知交)

2012/07/04 02:54
우리는 흔히 우정이 돌맹이 같이 단단한 것이길 바라는데, 실은 대개 그 우정이라고 불리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서로에게 난초 같이 연약하고,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언제 그랬냐 싶게 사그러들고, 시들어버리는 그런게 아닌가 싶다. 언젠가 유안진이라는 에세이스트가 '지란지교를 꿈꾸며'라는 책을 쓴 게 기억난다. (맞나?) (찾아보니 맞다.) 물론 난 이런 제목부터 건전한 에세이에 별다른 취미가 없어서 안 읽었는데, 찾아보니 지란지교(芝蘭之交)라는 게 "지초(芝草)와 난초(蘭草) 같은 향기(香氣)로운 사귐"을 뜻하는 사자성어다. (이게 뭔가?) 갑자기 배반감이 일어나는데, 나는 지란지교의 '지'가 앎의 '知'인 줄로 지금까지 생각해왔다. (난초를 헤아리듯 사귐을 배워라 뭐 이런 뜻으로 알고 있었다능.) 뭐 이런 각설하고, 나는 이런 말랑말랑한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하지만 또 나란 인간이 워낙에 나이브하고, 감상적이라서, 떨치고 싶어도 이런 속류 감상주의에서 빠져나오기가 참으로 쉽지 않은데, 우정이란 게 돌봄이 없으면 정말 무용하다는 생각을 요즘들어 종종 한다. 그렇게 어느새 무심한 듯 떠나간 친구들이 참 많고, 지금도 알게 모르게 멀어지는 친구들이 있는 것 같다. 어떤 고귀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건 참으로 중요한데, 역시나 그 마음을 보여준다는 건 더 중요하다.

그냥 갑자기 화장실에서 일보고 멍하니 앉아있다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짧게 남긴다.


최진실과 디즈니랜드

2012/07/02 12:25
작년 말(11.24) 경희대에서 있었던 특강('인터넷과 윤리적 딜레마') 중 최진실과 인터넷 실명제 부분만 떼어서 자료 공유(CC BY-SA).


최진실과 디즈니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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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기쁜 일. 세계적인 매거진형 리더 앱서비스플립보드(Flipboard) 뉴스 섹션에 슬로우뉴스가 선정됐다. 호들갑 떨만한 일은 아니지만, 돈 한푼 생기지 않는(그렇다고 앞으로 돈을 적극적으로 안벌겠단건 아니지만 ㅎㅎ) 일에 열정적으로 참여한 열 여섯 명의 편집팀원들에겐 작은 선물 같은 일이다. 인정받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이건 정말 부정하기 어렵다. 그나저나 신나게도 조선일보는 이 뉴스 섹션에서 빠져있다. 플립보드 한국어판 큐레이터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언젠 기회가 되면 꼭 한번 만나고 싶구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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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에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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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패드에서 본 모습 (via 슬로우뉴스 페북 페이지)





* 스포일러 불안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불안한 독자는 읽지 마세요.

<우먼 인 블랙>(제임스 왓킨스. 2012)는, 짧게 말하자, 재미 없는 공포물이다. 메시지가 나름 의미심장하긴 하다. 아이가 죽는 건 어른의 죄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이를 위해서 죽지 않는 어른들이 존재하는 한 아이들은 계속 죽을 수 밖에 없다. 독특한 메시지다. 그동안 접하지 못한 이질적인 플롯이라서 새롭긴 하다. 그리고 그 의미심장한 테마를 드러내는 방식도 장르의 관습에 길들여진 관객들의 기대를 비틀고 배반하는 방식이라서 어떻게 이 이야기를 끝낼지 정말 궁금하게 한다.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지만(주인공이 죽는다), 그렇다고 그 죽음이 과장된 죽음은 아니며(왜냐하면 주인공은 바로 구원받으니까), 또 영화가 나름으로 구상하는 테마(아이가 천당에 가려면 어른이 죽어야지)에 아주 잘 부합하긴 한다. 하지만 그 메시지는 너무 착해서, 뭐랄까 '에이씨, 이게 뭐야?'라는 생각이 들 만큼 허무하긴 하다. 비주얼은 예상가능한 수준으로 훌륭하다(특히 디테일이 훌륭하다). 물론 <불청객. Intruders>(후안 카를로스 프레스나디요. 2011)의 허무함 보다는 그래도 메시지가 있는 허무함인데, 그 <인트루더스>는 그 마저도 없다. 이 얼굴 훔치는 귀신이 나오는 공포영화는 끝내 관객들을 궁금증에 빠지게 하지만 그걸 해결하는 방식이 그야말로 상투적인 장르의 관습에 기대어 있어서(주인공의 유년은 딸에게 전이된다. 세대를 이어져 내려오는 귀신. ㅡ.ㅡ; ) 어떤 놀라움도 선사하지 못한다. 공포영화가 놀랍지 않다면 그건 두 시간 짜리 시간낭비지, 뭐. 그야말로 식상함 쩌는 관습적 내러티브를 뭔가 있어 보이게 만드는게 혼신을 다한 끝에 결국은 실패하고야 만다. 이 훌륭한 배우들을 가지고도 이 정도로 밖에 영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다니 아쉽다. 

사족. <불청객>에서 카리세 반 하위텐(Carice van Houten)은 평범한 엄마 역할이고, 연기도 아주 평범하지만, 개인적으론 정말 끌리는 배우다. <블랙 데스>(크리스토퍼 스미스. 2010)에선 <게임의 왕좌> 이미지 연장에서 캐스팅 됐는지 요부형 이교도로 나오는데 <불청객>만 못하다. 아직 (아마도 출세작인 듯한) <블랙북>(2006)을 아직 보지 못했는데, 나중에 꼭 챙겨봐야겠다. ㅡ.ㅡ; 


SNS 시대의 블로깅 0: 연재를 시작하며

2012/06/25 11:19

0. 블로그는 블로그고, SNS는 SNS다. 블로그도 광의로선 SNS라고 생각한다. 블로그 역시 소셜한 네트워킹 (의미생산,유통,소비) 서비스다. 역으로 웹에 기록한다는 의미에서 SNS 역시 블로그다. 하지만 이 연재에서 블로그와 SNS은 당연히 협의로서 쓰인다.

1. 그런데 SNS라고 다 같은 SNS는 아니다. 크게 트위터로 대표되는 단문 메시징 서비스가 있고, 페이스북(이하 ‘페북’)으로 대표되는 총체적 오프라인 재현 서비스가 존재한다. 트위터가 정보와 정서의 단편들을 조각 조각으로 중개/중계한다면, 페북은 오프라인 자체를 중계/중개한다. 오프라인을 온전하게 옮겨오는 걸 목적한다 점에서 그것은 총체적이다. 물론 그 온라인 상의 재현은 기존의 싸이월드가 과시적이고, 경쟁적인 소비문화에 최적화됐듯, 일정한 소비문화에 대한 친화적 경향을 갖지만, 그 재현 폭은 상대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확장한다. 스마트폰으로 상징되는 이동형 커뮤니케이션 도구, 콘텐츠 생산도구의 발전과 웹이라는 플랫폼의 수용성이 결합한 결과다. 이 연재에서 SNS라고 말하면 트위터 류의 단문 메시지 서비스와 페북 류의 총체적 실생활 재현 서비스를 공히 가리키며, 트위터와 페북이라고 굳이 따로 표기하는 경우엔 양자에 대한 구별적 특성을 특정해 표현할 때 쓰도록 한다.

2. 글이 뭔가 전문적이거나 딱딱해지려고 하는데, 나는 전문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딱딱한 건 참 싫어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느낌이 내 블로그의 페르소나와 닮아 있다면, 뭐 그건 또 내가 결정할 수 없는 것이긴 하다. 이 글에서 나는 내가 공개할 수 있는 사유의 흐름들 가운데 가장 빈번하게 나에게 머무는 몇몇 단편들을 생각나는대로 옮겨올 생각이다. 물론 그 사유의 재료들은 블로그와 SNS를 매개로 한 것들에 한정한다. 여담이지만 나에게 가장 많이 머무는 잔상들, 사유의 재료들은 역시나 사람들이다. 사람들, 그 중에서 여자들이고, 그 중에서도 대부분, 나는 속물이니까, 아름다운 여자들이다. 물론 아름답다가 예쁘다는 아니다. 내가 아는 여자들과 내가 모르는 여자들, 내가 만났던 여자들과 내가 만나지 않은 여자들 까지를 통틀어 여자들은 내 사유의 많은 순간들, 공간들을 채운다. 그건 낭만적인 단편소설의 느낌이기도 하고, 포르노그래피를 통해 표출되는 노골적인 욕구처럼 원색적이기도 하다. 빛 바랜 수채화처럼 추억에 기대어 있기도 하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텅 빈 집처럼, 공허하게 가득하기도 하다.

3. 연재를 시작하는 이유는 역시나 나는 누군가의 말처럼 ‘블로그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게 지나간 시대를 애써 붙잡는 시대착오적인 집착이든, 아니면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원칙에 대한 고수이든 간에, 나는 블로그를 통해 성장했고, 사유했으니까. 나는 블로깅을 통해 사람들을 만났고, 무엇인가를 함께 꿈꿨으며, 또 지금도 그러고 있으니까. 그러니 아무리 블로그의 시대가 가고, SNS의 시대가 도래했더라도, 블로깅한다는 것에 대해 내 나름의 회고를, 그것이 블로그의 죽음이라면, 조사를 남기고 싶은 거다. 물론 나는 블로그가 죽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고, 다만 죽음에 가까운 방식으로 숨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긴 하다.

4. 체계에 대한 집착이 없지 않는 편이라서 나는 이 연재가 체계적으로 구성되길 원한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 나는 내 그때 그때의 사유가 허락하는 한도에서 체계적인 구성을 염두에 두겠지만, 초고를 쓴다거나, 혹은 언제 끝날지 모를 사유를 목차 구성하고, 그 테마를 미리 한정해 글 쓰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저 흘러가는대로 내버려둘 생각이다. 그 사유가 불러오는 시간이 과거이고, 누군가의 사유에 빚지고 있는 것이라면, 그 출처를 확인해야겠으나, 사유의 흐름을 끊어버리는 단점이 있으니 글을 쓴 뒤에 확인할 생각이다. 그리고 부정확한 기억이 고정하지 못한 채 달리 연주할 변주의 풍경들이 아마도 곳곳에 만발하겠다 싶다. 각 번호는 어떤 하나의 사유, 그게 가령 빛깔이라고 하면, 노란 색 사유가 시작되어 확연하게 다른 색으로 바뀌지 않는 순간까지를 담을 뿐, 특정한 주제 단위는 아니다. 물론 그러려고 노력하겠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게 뻔하다.

5. 지난 블로깅을 돌이켜보면, 어떤 목적을 설정한다는 것의 부질없음을 이미 여러 번, 아주 여러 번 나는 경험했다. 그래서 이 글의 목적은 나도 잘 모르겠다. 연재를 시작하는 이유를 잠깐 적기도 했지만, 그건 지금, 그저 떠오른 어떤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모든 글에는 나름의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이 가시적이든, 혹은 보이지 않게 숨겨져서 글쓴이 조차도 헷갈리게 모호한 어떤 것이든 간에, 모든 글에는 자신의 운명이 있고, 그게 글이 갖는 신비로움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편이다. 글은 자신의 운명을 가진 채로 체험과 상상이라는 부모 속에서 태어나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모든 예술이 그렇듯, 어떤 (예술) 작품에 대해 작가는 그저 산파일 뿐, 아버지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며, 형제도 아니고, 그 자신도 아니다. 글쓰기는 가장 많은 이들이 사는 동안에 시도할 수 있는 가장 민주적인 형태의 예술 양식이다.

*이어지는 글: SNS 시대의 블로깅 1: 트위터와 블로깅, 그리고 내러티브의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