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상의 스승 달고나(임시 닉네임)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인터뷰 노하우 이야기가 나와서 서로 대화하면서 급 정리한 글에 살을 붙여서 옮긴다. 원래는 한 블로거 벗이 "인터뷰의 달인 민노씨 인터뷰 노하우 좀 알려주삼"하는 말도 안되는 아부드립을 치길래, '이눔아, 내가 너한테 묻고 싶다'는 심정이 되긴 했으나... 슬로우뉴스에서도 그렇고, 내 블로그에서도 그렇고, 인터뷰는 가장 중요한 취재 양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달고나 선생과 이야기해봤다. 나도 생각을 정리할 겸. 뭐 약간 뻔한 이야기이긴 하다.

<인터뷰 노하우>

1. 노하우는 없다.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유홍준) 준비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2. 최대한 친절하자. 그렇다고 알랑거릴 필욘 없다.
인터뷰이에게 친절하자. 처음 만난 사람이라더라도 일단 최대한 호감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하자. 인터뷰이가 좋게 써줄 거라는 믿음과 기대감을 갖는게 중요하다. 없는 이야기도 하고 싶게 만들자. 그렇다고 비판적인 관점을 잃어버리는 라는 건 아니다. 오히려 비판적인 관점을 잃으면 안된다. 그 순간 그건 인터뷰가 아니라 홍보가 된다. 세상에 이미 많은 빨아주는 인터뷰들이 즐비하다. 다만, 비판을 하더라도 인터뷰이가 호감을 갖고 이야기할 수 있는 태도를 유지하도록 노력하라는 얘기다. 비판적 관점 유지는 너무 당연하게 중요해서 아예 언급하지 않겠다.

3. 인터뷰(어)의 페르소나
개성있는 페르소나를 만들겠다는 컨셉도 좋다. 일정한 컨셉(유머, 시니컬, 쿨가이, 핫가이, 똘똘이 스머프 등등)에 따른 일정한 질문 코드, 자신만의 기승전결을 염두에 두면, 그 코드대로 어느 정도까지는 수월하게 인터뷰할 수 있고, 또 페르소나를 만들 수 있다. (좋은 예: 리수령 인터뷰)

4. 무엇보다 캐스팅
의미와 재미를 끌어낼 만한 캐스팅이 중요하다. 인터뷰어가 아무리 훌륭해도 인터뷰이에게 끌어낼 의미도, 재미도 없으면 인터뷰할 필요 자체가 없다. 여기서 좋은 캐스팅이라는 건 무슨 대단한 네임드와 인터뷰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고 시의성을 쫓으라는 말도 아니다. 또 세상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지 않은 사람도 없다. 누구에게나 이야기가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인터뷰어가 생각하기에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사람(인터뷰이)과 인터뷰해야 한다는 거다. 인터뷰이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없는 사람과 인터뷰할 필요는 전혀 없다. (참고: 슬로우뉴스 인터뷰

5. 인터뷰(이)의 입체성
리수령 인터뷰는 일정한 틀을 갖고 일정한 리승환식 유모를 적절하게, 반복적이고(그래서 그건 코드다) 활용하면서 독자들에게 읽는 재미와 더불어 안정감을 준다. 이 방식은 일정한 코드를 통해 독자들에게 그 코드의 즐거움과 몰입감을 높여주고, 인터뷰이 캐스팅만 괜찮다면, 평균적으로 퀄리티 있는 인터뷰를 왕성하게 생산할 수 있는 큰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인터뷰이를 그 코드 안에서 비슷비슷한 존재로 몰개성화할 수 있는 위험과 단점이 있다. 어떻게 보면 인터뷰이의 입체성을 섬세하게 살릴 수 있는 형식은 아니다. 이런 점도 고려해야 한다. (4.와 비교해 장점과 단점을 형량할 것)

6. 독자를 무시하면 안된다.
독자가 많이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애절한 바람을 갖고 인터뷰를 진행하고, 정리하자. '이해 못하는 니네가 부족한거야'라는 식 태도는 곤란한다.

7. 마지막으로, 인터뷰에서의 관점: 인터뷰는 마치 다큐영화와 같다.
인터뷰는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와 비슷하다. 객관적인 것 처럼 보이지만 실은 객관적인 인터뷰라는 건 세상에 없다. 촛불집회가 있다고 치자. 촛불 든 우리 쪽에서 전경을 비추는 카메라와 전경 쪽에서 우리 쪽을 비춘 카메라는 전혀 다른 촛불의 의미를 들려줄 것이 뻔하다. 형식적으로 열쇠를 쥔 건 인터뷰이가 아니라 인터뷰어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말하면, 인터뷰이는 일종의 배우와 같은 존재다. 훌륭한 감독이라면 별 볼 일 없는 배우를 멋지게 연출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어쩌면 가능하다. 하지만 인터뷰이를 배우로 취급하는 인터뷰는 재밌는 인터뷰일 수는 있어서 훌륭한 인터뷰는 될 수 없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함께 감독이자, 배우로서, 또 스탭으로서 자신의 철학과 관점으로 밀당(밀고당기기)하는, 혹은 전투(?)하는 인터뷰야 말로 가장 훌륭한 인터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터뷰는 (연인간의) 밀당이 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적대적인) 전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는게 중요하다(예: 프로스트/닉슨, Frost/Nixon). 인터뷰어가 인터뷰이의 말을 그대로 '전해주는 사람'이 아니듯, 인터뷰이 역시 '인터뷰어의 인형(배우)'은 아니다. 다만 위 6.에서 말했듯, 인터뷰어는 무엇보다 자신이 들려주고 싶은 인터뷰의 독자들, 그 독자들의 가정적 시선과 관점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사랑하는 영화음악들

2012/07/12 09:12
정현종은 자신의 시에서 이런 취지로 말한다. 젊은이는 현재를 살기 위해 미래에 집착하고, 늙은이는 현재를 살기 위해 과거에 집착한다. 물론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뮤즈랑'은, 정현종의 어투를 빌자면, 아, 나는 살기 위해 과거를 바라볼 수 밖에 없구나, 벌써 그렇게 되어버렸네... 절실하게 깨닫게 한다. 그게 그렇게 비참하거나 쓸쓸한 것만은 아니다. 추억은 대개는 따뜻하다. 그땐 일상이 마법이 되고, 연애가 세익스피어 뺨치게 낭만적으로 비극적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땐, 그 비참한 청춘의 한 가운데서도, 아, 살아있었구나...
오래 전부터,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이상한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난, 그런 질투어린 회고의 감정에 젖는다.



내가 사랑하는 영화음악들:  굿바이레닌(인트로), 열혈남아(만남/이별), 중경삼림(왕페이가 나오는 두 개의 노래), 그리고 길을 떠나는 정복자 펠레 (제목 클릭하면 들을 수 있다)

*추.
뮤즈랑 플레이리스트가 블로그에서 자동플레이할 수 있는 HTML 임베드 코드를 제공하면 참 좋을텐데, 앞으로 개발 예정인지는 몰라도 아직 그런 기능은 없는 듯.


늘 큰 웃음 선물하는 김순덕 여사의 칼럼. 마침 정말 오랜만에 따끈따끈한 칼럼을 읽었다. 발행한지 2시간도 안되는 정말 훈훈한 칼럼이다.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김순덕 여사. 

[김순덕 칼럼]“그분들은 다 누렸습니다” 동아일보, 2012년 7월 9일 (클릭 당근 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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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 마지막 문단이다. 용감무쌍한 우리의 김 여사께서, 정말 호탕하게도, 헌법상 보장된 거주이전의 자유(헌법14조)에 대한 훼손을 장려하고 있다. 대통령이 되면 친인척에게 해외로 꺼지라고 명령할 수 있는건가? 그런 대통령 권한이 새롭게 생긴건가? 나만 몰랐나? 김순덕이 보기엔 대통령 되면 친인척 쯤 해외로 꺼지셈, 이렇게 명령할 권한이 자동으로 생기나 보다. 나는 대통령에게 그런 권한이 있다는 말은, 오늘, 김 여사에게, 처음 듣는다.

'조중동'의 끝을 잡고 있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언론회사 논설위원께서, 아무리 의견을 전하는 칼럼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멋대로 써도 되는건지 난 정말 모르겠다. 대한민국 저널리즘이 흑흑 운다.

김순덕 식이라면, 누구든 대통령되면 김순덕이 자칫 (한국 저널리즘의)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으니 해외로 내보냈으면 좋겠다. 대사가 아닌 사인으로 내보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써도 되나? ㅡ.ㅡ;

참고.
헌법 제14조에 정한 거주·이전의 자유의 의미와 그 구체적 내용
거주·이전의 자유란 국민이 자기가 원하는 곳에 주소나 거소를 설정하고 그것을 이전할 자유를 말하며 그 자유에는 국내에서의 거주·이전의 자유 이외에 해외여행 및 해외이주의 자유가 포함되고, 해외여행 및 해외이주의 자유는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여행하거나 이주할 수 있는 자유로서 구체적으로 우리나라를 떠날 수 있는 출국의 자유와 외국 체류를 중단하고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올 수 있는 입국의 자유를 포함한다. (2008. 1.24. 선고 2007두10846 판결 【여권발급거부취소】 중에서)



* SNS 시대의 블로깅 0: 연재를 시작하며 에서 이어지는 글.

6. 국어사전(신어)은 내러티브(narrative)를 "인과 관계로 엮인 실제적·허구적인 이야기"로 정의한다. 블로깅의 쇠락과 트위터의 팽창이 갖는 의미론을 함축하는데 있어 중요한 단어들, 가령 목소리, 개성, 재현(의 위기 혹은 딜레마), 인과관계, 완결성은 모두 '내러티브'의 문제에 다름 아니다. 이제 세상을 둘러싼 의미들, 의미들로 둘러쌓인 세계는 트위터라는 실시간 이동형 단문 메시지 서비스를 통해 즉각적으로 재현된다. 하지만 그렇게 재현된 표현들은 대개 순간적인 찰나와 표피, 토막으로서의 이야기다. 그래서 그 토막 이야기들은 "원인과 결과"를 생략한 즉각적이고, 감상적인 반응으로서의 경향성을 갖는다.

7. 블로깅을, 아거의 관점을 빌어, '진짜 사람의 목소리를 가진 내러티브 쌓아가기'라고 정의할 때, 트위터는 진짜 사람의 목소리를 가진 내러티브라는 블로깅의 고전적인 의미구조를 해체시킨다. 트위터는 '진짜 사람'이 쓰는 짧은 글들이지만, 거기에서 '목소리'를 구별하기 어렵고, '내러티브'를 발견하기란 더 쉽지 않다. 내 주관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해보자. 내가 트위터에서 팔로잉(구독)하는 사람은 모두 300여 명 정도다. 이들 가운데 글쓴이를 가리고(블라인드), 각각 10개의 트윗들을 묶어서 그 글이 누가 쓴 글인지 가려내보라고 한다면, 나는 아마도 300여명 중에서 채 3,40명도 가려내기가 어려울거다. 가령 주낙현, 아거, 써머즈, , 강정수, 캡콜드, 이고잉, 메탈돼지, 이승환, 임예인, 이정환, 뗏목지기, 최상국, 정혜승, 촉촉핸드, 김우재, 한사, 신비, 조아신, 독초(doccho), 이대팔, so_picky, 주성치, 최우형 등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트위터들을 나는 아마도 그들의 트윗들만으로는 구별해내지 못할 것임에 분명해 보인다. 이들을 구별해낼 수 있는, 혹은 있을 것이라고 믿는,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의 블로깅을 오랫동안 지켜봤기 때문이지, 트위터를 통해서 이들이 만들어내는 '인간의 목소리(개성)'에 익숙해졌기 때문은 아니다.

8. 블로깅이 정보를 매개로 사람의 관계를 만들어갔다면, 트위터는 사람의 관계를 매개로 정보의 유통 시스템과 메커니즈을 만들어가는데, 문제는 트위터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의 관계은 지극히 한정적이라는 점이다. 블로그는 상호 관심있는 정보, 그게 문학이든, 철학이든, 시사든, 아니면 방송연예든, 신변잡기든 간에, 그 정보를 통해 조금씩 그 글쓴이와 점진적으로 교류하는 모델이다. 트위터는 오히려 반대다. 이미 있었던 관계에 기반해 정보를 매개하는데, 문제는 그 수는 대단히 한정적일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어느 시점 이후로 확장되는 관계는 '형식적이고, 표피적인 관계'의 한계를 뛰어넘기 어렵다. 이는 트위터의 기술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본래적인 관계가 갖는 그 제한성에 기반한다. 즉, 아무리 수 천, 수 만과 팔로잉, 팔로워 관계(소위 '맞팔')을 맺더라도, 그 관계는 숫자일 뿐이지, 어떤 의미도 아니다. 특히 실존성을 띤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차원에서 그 무의미성은 더 명료해진다.

9. 아거가 가짜 블로그("회사의 제품이나 서비스 혹은 브랜드를 판촉할 목적으로 회사의 마케팅 부서에서 만든 블로그(들)", '비즈니스워크'에 의한 정의)를 이야기하면서 언급하는 블로깅의 화자와 내러티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좀 길지만 인용해보자.

가짜 블로그들을 보면 이야기체의 글(narrative)의 구성 요건을 비교적 잘 갖추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한가지만 빼고요... 이들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링컨 프라이 블로그는 "오늘 나는 링컨 모양을 한 프렌치 프라이를 맥도널드에서 봤다"라고 전합니다. 시간과 공간이 들어있고 이야기의 화자가 있지요. 캐릭터 블로그인 캡틴 마틴 블로그는 "나는 요즘 리얼리티 TV쇼같은 유치한 것을 보지 않는다. 그 시간에 밖에 나가 taco salad만들기 같은 의미있는 일을 즐긴다"라고 기록합니다. 모두 이야기를 전하지만 결정적으로 빠진게 있습니다. 바로 화자가 진짜냐 가짜냐 여부(authenticity)입니다.

이 곳 GatorLog에 글을 올리는 "아거"는 캐릭터(악어를 소재로 한 캐릭터)지만, 아거가 쓰는 블로그는 캐릭터 블로그나 flog가 아닙니다. 필명이지만 온라인을 통해 상호작용을 하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아거라는 사람이 로봇도 아니고 회사의 마케팅 부서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바쁘면 자기 멋대로 휴가도 내고, 개천절 무렵에 온다고 했다가 갑자기 자신이 기록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휴가 도중에 불쑥 찾아오는 진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블로그의 진짜 화자란 바로 자신이 경험한 혹은 경험하고 있는 (주관적, 개인적) 역사를 사회적인 이야기거리로 바꿔놓는 사람입니다. 이런 점에서 탈리반 치하에서 자신이 경험한 일을 전하는 아프가니스탄 여성 블로거는 미국에 앉아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삶에 대한 칼럼을 쓰는 뉴욕타임스 기자보다 더 authentic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진짜 여부는 신뢰도와 관련이 있지만 반드시 신뢰도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 아거, 가짜 블로그(Flog) 무엇이 문제인가?, 2005년 4월 24일

10. 트위터의 팽창과 블로그의 쇠락으로 세계는 진짜 인간의 목소리를 가진 이야기(내러티브)를 잃어가고 있다. 반면, 많은 이들이 트위터라는 '낮은 문턱'을 통해 어쨌든 자신의 목소리를 웹과 모바일에 쏟아내고 있다. 바야흐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소통 가능성은 직접적으로 팽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환상을 얻었을 뿐이다. 블로깅이 제한된 정보에 대한 공통 관심를 매개로 인간의 관계를 점진적으로, 아주 천천히 실제적으로 확장했다면, 그렇게 비가시적인 '사람의 형상(목소리)'를 구체화했다면, 트위터는 그 반대로 구체적이고, 생동하는 실존의 인간을 전면에 내새우는 것처럼 일반 대중에게 착시를 불러일으키지만, 대부분 서로에게 무의미한 정보(하지만 그 무의미성이야말로 의미성이다. 이건 아도르노가 이야기한 '서정시의 정치성'의 맥락으로 해석해야 한다)를 매개로 인간 관계를 확장한다는 환상을 구축()한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여전히 '목소리 없는' 숫자들에 불과한, 뿌연 안개 속에 갇힌 희미한 존재로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



우리들의 연애가 대개 비참하거나 쓸쓸한, 그렇지만 놀랍게도 그 비참함과 쓸쓸함이 다시 따뜻한 추억으로 결실을 맺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의 그 순결한 욕망에도 불구하고 그 쾌락원칙은 대개의 경우 현실원칙과는 조화할 수 없는 그 모순, '나쁜 제비뽑기'라는 평범한 보통 존재의 굴레 안에 존재한다. 하지만 이 비참한 세계에서 우리는 어쨌든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뮤즈랑(muzrang.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새롭게 추가된 뮤즈랑의 플레이리스트)은 내 노래방 18번을 불러오고, 내 서툰 연애를 불러오며, 거기에 담긴 어떤 간절함을, 비참함과 소망의 가녀린 편린들, 그 편린들이 만발한 벚꽃처럼 나부끼던 내 청춘의 거리를, 그 노래방에서 노래하던 그 아이를, 그 눈동자를, 눈물을, 결국 불러온다. 이건 정말 너무 비참하게 상투적이고, 비정하리만큼 속물적이며, 그래서 감상적인 기억의 리스트다.

종종 인용하는 화이트헤드, "사물 본성의 핵심에는 청춘의 꿈과 비극의 결실이 있다." 아, 이건 정말 진실이구나... 

뮤즈랑: http://www.muzrang.com/
내 노래방 18번: http://www.muzrang.com/P004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