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NS 시대의 블로깅 0: 연재를 시작하며 에서 이어지는 글.
6. 국어사전(신어)은 내러티브(narrative)를 "인과 관계로 엮인 실제적·허구적인 이야기"로 정의한다. 블로깅의 쇠락과 트위터의 팽창이 갖는 의미론을 함축하는데 있어 중요한 단어들, 가령 목소리, 개성, 재현(의 위기 혹은 딜레마), 인과관계, 완결성은 모두 '내러티브'의 문제에 다름 아니다. 이제 세상을 둘러싼 의미들, 의미들로 둘러쌓인 세계는 트위터라는 실시간 이동형 단문 메시지 서비스를 통해 즉각적으로 재현된다. 하지만 그렇게 재현된 표현들은 대개 순간적인 찰나와 표피, 토막으로서의 이야기다. 그래서 그 토막 이야기들은 "원인과 결과"를 생략한 즉각적이고, 감상적인 반응으로서의 경향성을 갖는다.
7. 블로깅을, 아거의 관점을 빌어, '진짜 사람의 목소리를 가진 내러티브 쌓아가기'라고 정의할 때, 트위터는 진짜 사람의 목소리를 가진 내러티브라는 블로깅의 고전적인 의미구조를 해체시킨다. 트위터는 '진짜 사람'이 쓰는 짧은 글들이지만, 거기에서 '목소리'를 구별하기 어렵고, '내러티브'를 발견하기란 더 쉽지 않다. 내 주관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해보자. 내가 트위터에서 팔로잉(구독)하는 사람은 모두 300여 명 정도다. 이들 가운데 글쓴이를 가리고(블라인드), 각각 10개의 트윗들을 묶어서 그 글이 누가 쓴 글인지 가려내보라고 한다면, 나는 아마도 300여명 중에서 채 3,40명도 가려내기가 어려울거다. 가령 주낙현, 아거, 써머즈, 펄, 강정수, 캡콜드, 이고잉, 메탈돼지, 이승환, 임예인, 이정환, 뗏목지기, 최상국, 정혜승, 촉촉핸드, 김우재, 한사, 신비, 조아신, 독초(doccho), 이대팔, so_picky, 주성치, 최우형 등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트위터들을 나는 아마도 그들의 트윗들만으로는 구별해내지 못할 것임에 분명해 보인다. 이들을 구별해낼 수 있는, 혹은 있을 것이라고 믿는,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의 블로깅을 오랫동안 지켜봤기 때문이지, 트위터를 통해서 이들이 만들어내는 '인간의 목소리(개성)'에 익숙해졌기 때문은 아니다.
8. 블로깅이 정보를 매개로 사람의 관계를 만들어갔다면, 트위터는 사람의 관계를 매개로 정보의 유통 시스템과 메커니즈을 만들어가는데, 문제는 트위터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의 관계은 지극히 한정적이라는 점이다. 블로그는 상호 관심있는 정보, 그게 문학이든, 철학이든, 시사든, 아니면 방송연예든, 신변잡기든 간에, 그 정보를 통해 조금씩 그 글쓴이와 점진적으로 교류하는 모델이다. 트위터는 오히려 반대다. 이미 있었던 관계에 기반해 정보를 매개하는데, 문제는 그 수는 대단히 한정적일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어느 시점 이후로 확장되는 관계는 '형식적이고, 표피적인 관계'의 한계를 뛰어넘기 어렵다. 이는 트위터의 기술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본래적인 관계가 갖는 그 제한성에 기반한다. 즉, 아무리 수 천, 수 만과 팔로잉, 팔로워 관계(소위 '맞팔')을 맺더라도, 그 관계는 숫자일 뿐이지, 어떤 의미도 아니다. 특히 실존성을 띤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차원에서 그 무의미성은 더 명료해진다.
9. 아거가 가짜 블로그("회사의 제품이나 서비스 혹은 브랜드를 판촉할 목적으로 회사의 마케팅 부서에서 만든 블로그(들)", '비즈니스워크'에 의한 정의)를 이야기하면서 언급하는 블로깅의 화자와 내러티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좀 길지만 인용해보자.
10. 트위터의 팽창과 블로그의 쇠락으로 세계는 진짜 인간의 목소리를 가진 이야기(내러티브)를 잃어가고 있다. 반면, 많은 이들이 트위터라는 '낮은 문턱'을 통해 어쨌든 자신의 목소리를 웹과 모바일에 쏟아내고 있다. 바야흐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소통 가능성은 직접적으로 팽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환상을 얻었을 뿐이다. 블로깅이 제한된 정보에 대한 공통 관심를 매개로 인간의 관계를 점진적으로, 아주 천천히 실제적으로 확장했다면, 그렇게 비가시적인 '사람의 형상(목소리)'를 구체화했다면, 트위터는 그 반대로 구체적이고, 생동하는 실존의 인간을 전면에 내새우는 것처럼 일반 대중에게 착시를 불러일으키지만, 대부분 서로에게 무의미한 정보(하지만 그 무의미성이야말로 의미성이다. 이건 아도르노가 이야기한 '서정시의 정치성'의 맥락으로 해석해야 한다)를 매개로 인간 관계를 확장한다는 환상을 구축(構築)한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여전히 '목소리 없는' 숫자들에 불과한, 뿌연 안개 속에 갇힌 희미한 존재로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
6. 국어사전(신어)은 내러티브(narrative)를 "인과 관계로 엮인 실제적·허구적인 이야기"로 정의한다. 블로깅의 쇠락과 트위터의 팽창이 갖는 의미론을 함축하는데 있어 중요한 단어들, 가령 목소리, 개성, 재현(의 위기 혹은 딜레마), 인과관계, 완결성은 모두 '내러티브'의 문제에 다름 아니다. 이제 세상을 둘러싼 의미들, 의미들로 둘러쌓인 세계는 트위터라는 실시간 이동형 단문 메시지 서비스를 통해 즉각적으로 재현된다. 하지만 그렇게 재현된 표현들은 대개 순간적인 찰나와 표피, 토막으로서의 이야기다. 그래서 그 토막 이야기들은 "원인과 결과"를 생략한 즉각적이고, 감상적인 반응으로서의 경향성을 갖는다.
7. 블로깅을, 아거의 관점을 빌어, '진짜 사람의 목소리를 가진 내러티브 쌓아가기'라고 정의할 때, 트위터는 진짜 사람의 목소리를 가진 내러티브라는 블로깅의 고전적인 의미구조를 해체시킨다. 트위터는 '진짜 사람'이 쓰는 짧은 글들이지만, 거기에서 '목소리'를 구별하기 어렵고, '내러티브'를 발견하기란 더 쉽지 않다. 내 주관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해보자. 내가 트위터에서 팔로잉(구독)하는 사람은 모두 300여 명 정도다. 이들 가운데 글쓴이를 가리고(블라인드), 각각 10개의 트윗들을 묶어서 그 글이 누가 쓴 글인지 가려내보라고 한다면, 나는 아마도 300여명 중에서 채 3,40명도 가려내기가 어려울거다. 가령 주낙현, 아거, 써머즈, 펄, 강정수, 캡콜드, 이고잉, 메탈돼지, 이승환, 임예인, 이정환, 뗏목지기, 최상국, 정혜승, 촉촉핸드, 김우재, 한사, 신비, 조아신, 독초(doccho), 이대팔, so_picky, 주성치, 최우형 등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트위터들을 나는 아마도 그들의 트윗들만으로는 구별해내지 못할 것임에 분명해 보인다. 이들을 구별해낼 수 있는, 혹은 있을 것이라고 믿는,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의 블로깅을 오랫동안 지켜봤기 때문이지, 트위터를 통해서 이들이 만들어내는 '인간의 목소리(개성)'에 익숙해졌기 때문은 아니다.
8. 블로깅이 정보를 매개로 사람의 관계를 만들어갔다면, 트위터는 사람의 관계를 매개로 정보의 유통 시스템과 메커니즈을 만들어가는데, 문제는 트위터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의 관계은 지극히 한정적이라는 점이다. 블로그는 상호 관심있는 정보, 그게 문학이든, 철학이든, 시사든, 아니면 방송연예든, 신변잡기든 간에, 그 정보를 통해 조금씩 그 글쓴이와 점진적으로 교류하는 모델이다. 트위터는 오히려 반대다. 이미 있었던 관계에 기반해 정보를 매개하는데, 문제는 그 수는 대단히 한정적일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어느 시점 이후로 확장되는 관계는 '형식적이고, 표피적인 관계'의 한계를 뛰어넘기 어렵다. 이는 트위터의 기술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본래적인 관계가 갖는 그 제한성에 기반한다. 즉, 아무리 수 천, 수 만과 팔로잉, 팔로워 관계(소위 '맞팔')을 맺더라도, 그 관계는 숫자일 뿐이지, 어떤 의미도 아니다. 특히 실존성을 띤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차원에서 그 무의미성은 더 명료해진다.
9. 아거가 가짜 블로그("회사의 제품이나 서비스 혹은 브랜드를 판촉할 목적으로 회사의 마케팅 부서에서 만든 블로그(들)", '비즈니스워크'에 의한 정의)를 이야기하면서 언급하는 블로깅의 화자와 내러티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좀 길지만 인용해보자.
가짜 블로그들을 보면 이야기체의 글(narrative)의 구성 요건을 비교적 잘 갖추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한가지만 빼고요... 이들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링컨 프라이 블로그는 "오늘 나는 링컨 모양을 한 프렌치 프라이를 맥도널드에서 봤다"라고 전합니다. 시간과 공간이 들어있고 이야기의 화자가 있지요. 캐릭터 블로그인 캡틴 마틴 블로그는 "나는 요즘 리얼리티 TV쇼같은 유치한 것을 보지 않는다. 그 시간에 밖에 나가 taco salad만들기 같은 의미있는 일을 즐긴다"라고 기록합니다. 모두 이야기를 전하지만 결정적으로 빠진게 있습니다. 바로 화자가 진짜냐 가짜냐 여부(authenticity)입니다.
이 곳 GatorLog에 글을 올리는 "아거"는 캐릭터(악어를 소재로 한 캐릭터)지만, 아거가 쓰는 블로그는 캐릭터 블로그나 flog가 아닙니다. 필명이지만 온라인을 통해 상호작용을 하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아거라는 사람이 로봇도 아니고 회사의 마케팅 부서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바쁘면 자기 멋대로 휴가도 내고, 개천절 무렵에 온다고 했다가 갑자기 자신이 기록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휴가 도중에 불쑥 찾아오는 진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블로그의 진짜 화자란 바로 자신이 경험한 혹은 경험하고 있는 (주관적, 개인적) 역사를 사회적인 이야기거리로 바꿔놓는 사람입니다. 이런 점에서 탈리반 치하에서 자신이 경험한 일을 전하는 아프가니스탄 여성 블로거는 미국에 앉아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삶에 대한 칼럼을 쓰는 뉴욕타임스 기자보다 더 authentic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진짜 여부는 신뢰도와 관련이 있지만 반드시 신뢰도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 아거, 가짜 블로그(Flog) 무엇이 문제인가?, 2005년 4월 24일
10. 트위터의 팽창과 블로그의 쇠락으로 세계는 진짜 인간의 목소리를 가진 이야기(내러티브)를 잃어가고 있다. 반면, 많은 이들이 트위터라는 '낮은 문턱'을 통해 어쨌든 자신의 목소리를 웹과 모바일에 쏟아내고 있다. 바야흐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소통 가능성은 직접적으로 팽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환상을 얻었을 뿐이다. 블로깅이 제한된 정보에 대한 공통 관심를 매개로 인간의 관계를 점진적으로, 아주 천천히 실제적으로 확장했다면, 그렇게 비가시적인 '사람의 형상(목소리)'를 구체화했다면, 트위터는 그 반대로 구체적이고, 생동하는 실존의 인간을 전면에 내새우는 것처럼 일반 대중에게 착시를 불러일으키지만, 대부분 서로에게 무의미한 정보(하지만 그 무의미성이야말로 의미성이다. 이건 아도르노가 이야기한 '서정시의 정치성'의 맥락으로 해석해야 한다)를 매개로 인간 관계를 확장한다는 환상을 구축(構築)한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여전히 '목소리 없는' 숫자들에 불과한, 뿌연 안개 속에 갇힌 희미한 존재로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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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창으로 순간 이동!10.에 대한 사소한 퇴고(불명료한 부분을 한 줄 정도 보충)
김우재와 관련 대화
https://twitter.com/minoci/status/221402845440774144
위 트윗 이후 열 개 정도의 대화들.
부끄럽구요. 좋은 주말 보내세요.
앗, 아거님이다! ㅎㅎ
올 하반기엔 꼭 건강과 체력을 강건하게 회복하시길!!!
내러티브는 한 개인의 히스토리라고 생각합니다. 개개인의 히스토리를 공유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할 것 또는 기대하지 않을 것을 구별해낼 수 있는 것 같아요. 파편으로 흩어진 문구에서 히스토리를 읽어내기란 힘든 게 당연하겠죠. 히스토리 없는 개인의 목소리란 듣는 사람 입장에서도 와닿지 않을 테니까요. 이게 민노씨 글이 더 공감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
아주 공감합니다.
양지 님의 히스토리가 문득 궁금하네요. : )
안녕하세요. 오늘 스릉흔드 페스티벌에서 토론식 뮤지컬 시간에 민노씨께서 건네신 공을 얼떨결에 받아서 발언했던 자입니다^^.
좀 혼란스러웠던 상황에 말을 하게 되서 엄청 횡설수설했었는데
제가 인터넷을 이용하면서 겪어왔던 혼란들이 몰려와서 상당히 당황했던 상태였어요.
내러티브를 제거하는 실시간 이동형 미디어로 인해 관계를 둘러싼 환상이 뿌옇게 짙어진다는 이해에 매우 공감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 존재 자체가 그 뿌연 환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고 그러한 저의 상태가 무척 고민입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꽤 많은 변화의 계기들이 인터넷 상에서 만들어졌고
현재 저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상당 부분 역시 인터넷에서 접하는 정보에 의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삶이 지속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사람의 정체성이 점점 더 뚜렷해진다고 전제했을 때,
저는 이러한 전제에 역행하는 제 모습에 어쩌면 공포라고 말할 수 있을 '관계맺기의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인터넷의 폭발적인 정보, 익명성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 삶의 시간이 축적되어갈수록, 다시 말해 인터넷에 머무는 시간이 쌓여갈수록
내 목소리를 가지기가 너무나 어려워짐을 느낍니다.
인터넷에서 많은 관점들과 사람들을 접합니다.
그런 정보들 덕분에 더 없는 풍요로움을 느끼고 삶을 지속시킬 힘을 얻은 기억도 있습니다만,
그 풍요로움이 반복적인 사래를 들리게 하고 '관계 포기'라는 위험수준의 섭식장애까지 유발할 수 있다는 걸 느끼곤 합니다.
7번의 '진짜 사람의 목소리를 가진 내러티브 쌓아가기'라는 블로깅의 정의가 무척 매혹적입니다.
십육세 때부터 '블로그'라는 매체를 이용해오긴 했지만 생각해보니 단 한 번도 블로깅을 해본적이 없다는 걸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제 블로그들로 말할라치면 '순간적인 찰나와 표피, 토막들의 negrative'라고 할 수 있겠네요.
물론 의도적으로 언어적인 내러티브를 넣지 않으려 했던 것도 있고 그 컨텐츠들이 무작적 단절된 표피들 뿐만은 아니라고 확신합니다만,
중요한 건 현재 제가 언어적인 내러티브에 대한 욕구를 강하게 가지기 시작했단 점인 것 같습니다.
주변에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왕왕 듣고는 합니다.
("페이스북은 그만받아보기하면 되고 트위터는.. 그거 왜하는지 모르겠더라고? 근데)블로그는 하고 싶어."라고 하면서
자신의 내러티브에 대한 욕구를 표현하시는 분들을 보는게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스릉흔드 페스티벌에서 여러 주제를 다뤘지만 저는 그 시간을 제가 블로깅과 관계에 대해 막연하게 가졌던 단상이나 공포심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계기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터넷과 관련된 모임이 오프라인에서 열리는 점이 가장 좋았어요 :)
이렇게 누추한 곳에서 진지한 논의를 이어주시니 멀리서 찾아온 벗처럼 반갑기 짝이 없습니다. : )
앞으로도 종종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고요. 그 시간이 빨리 왔으면 좋겠네요. 또 뵐 수 있길 바라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