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와의 대화 2 : 친구와 관객

2011/06/11 06:44
* 관련글 : 신비와의 대화 : 감성의 발견, 혹은 시민운동의 미래 

신비님, 안식년이셔서 그런지 블로깅이 더 활발해지신 듯. : )
신비님 글 댓글창에서 있었던 짧은 대화 옮김.
* 일시 : 2011. 6. 11. 새벽
* 장소 : 각자의 집. 신비의 글 댓글창.

민노씨 : 테드 동영상은 처음에는 잠깐 보고 끊어야지(라는 마음으로) 보기 시작했는데, 궁금해서 끝까지 봤네요. 보면서 '촛불 문제' 같은 경우엔 뭔 소리인지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았는데, 다 보고 나서도 그 '촛불문제'는 뚜렷한 이미지를 남기지는 못하네요.

미국적 상황에선 '외적 인센티브'가 '내심의 동기'(자율성)보다 열등한(?) 효율성을 낼 수도 있겠다 싶은데, 우리나라에서도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한 것인지, 발제자는 40년 이상 사회과학의 검증으로 통해서 그 효율성의 격차가 증명되었다고 하지만, 뭐랄까 아주 다양한 조건과 변수들을 고려해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그럼에도 신비님께서 강조하시는 취지에 대해선 충분히 공감합니다. 다만 저로선 그 동기가 외적 인센티브냐 자율적인 내심의 자발성이냐, 이 두 가지의 조건은 양자택일이라기 보다는 좀더 복잡한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여진과 날라리 외부세력, 아주 멋지지만, 뭐랄까 김여진이라는 상징에 기대어야 하는 측면, 어떤 영웅적 전범(상징)이 굳이 '날라리 외부세력'을 대표로서 표상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선 약간 생각이 복잡해지네요.

신비 : 촛불 문제는, 조금 헷갈릴 수 있게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긴 해요. 두가지 실험결과가 나오는데, 한 그룹에겐 단순히 문제를 푸는 평균시간을 재겠다고 하고 다른 그룹에겐 빨리 푸는 이에게 금전적 보상을 하겠다고 한 것은 동일해요. 차이는 문제의 난이도에 있었어요. 첫번째 실험. 압정이 가득 담긴 상자가 놓여있을때는 한눈에 그 상자를 활용하겠다는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죠. 고정관념을 깨고 시야를 넓히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금전적 보상이라는 인센티브가 제시된 그룹은 인센티브에 대한 기대 때문에 오히려 시야가 좁아져서 문제를 푸는 데에 더 오래 걸렸구요. 두번째 실험은 상자가 비어있으니 곧바로 상자를 도구로 인식할 수 있어 문제풀이가 훨씬 간단한 상황이에요. 이처럼 문제가 단순해졌을때는 금전적 보상의 인센티브가 효과를 발휘했다는 것이구요.

이것이 전하는 인사이트는 인센티브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매우 단순한 일에 한해서 가능하고,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인센티브가 오히려 장애가 되며, 문제 해결 자체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이 자극될 때,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할때 더욱 창조적이며 효과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일거에요.

미국적 상황에 대해서는 저와는 반대로 느끼셨네요. 저는 기브 앤 테이크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자본주의/소비주의가 심화된 미국에서 내적 동기가 힘을 발휘하는 결과를 얻는 게 더 어려운 게 아닌가 싶었거든요. 우리 사회에선 어떤 변수들이 영향을 끼치게 될지는 더 이야기해보면 좋을 듯 해요. 한국 사회는 관계와 인정에 좌우되는 경향이 더 큰 편이니 내적 동기가 자극되기 더 쉽지 않을까 싶은데요. (이미 한국도 소비주의에 찌들어서 안돼! 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민노씨 : "인센티브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매우 단순한 일에 한해서 가능하고,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인센티브가 오히려 장애가 되며, 문제 해결 자체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이 자극될 때,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할때 더욱 창조적이며 효과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이렇게 정리해주시니 좀더 구체적으로 다가오기는 합니다. : )

한국 상황이라고 함은 말씀해주신 미국 상황(기브 앤 테이크 문화)이 여전히 문화 그 자체로는 흡수되지 않은 사회랄까, 특히 저나 신비님이나 함께 고민을 공유하는 '시민운동'의 영역 내에선 미국식 '계약 문화'랄까, 기브 앤 테이크 문화랄까, 그런게 거의 없지 않나요? 기브 앤 테이크는 '소비주의'와 연계하는 문제라기 보다는 '계약법' '계약문화'와 연계하는 것 같아요. 일정한 조건으로 계약을 맺을 때 생기는 권리의무 관계가 여전히 우리나라에선 대단히 모호하게 취급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시민운동의 영역에선 특히요).

물론 이것은 제 지극히 제한적인 체험에 바탕한 이야기인데, 가령 그저께 '시민사회단체 연대회의' 심포지엄 토론회만 해도, 이런 자리인줄 알았으면 안갔을 거에요. 6시부터 있는 후원행사를 위한 사전 요식행위에 가깝다는 점은 차지하고, 제 시간과 노고를 빌려주는 자리인데 이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 점은 무척 아쉽습니다. ㄱ. 저는 자리 그 자체가 주는 기회가 굉장히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 참석비(?)는 크게 고려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시민단체들에서 시간을 빌려달라는 자리에선 주면 좋고, 안줘도 이해하는 편이죠. 그런데 이에 대한 설명이 아예 없는 건 아쉽더라고요. ㄴ. 발제/토론회에 참여하신 분들 또 준비하신 분들께서 얼마나 고생하셨을까는 별론으로, 그 행사 자체는 정말 이렇게까지 건성으로 할 거면 왜하나...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더만요. 저로선 오히려 준우씨와 함께 한 뒷풀이 시간(연대회의와는 전혀 상관없는)이 없었다면 정말 시간낭비했구나 하는 마음만 들었을 자리였어요. 그 뒷풀이 자리에서 환경정의 연재씨, 진희씨와 주로 이야기를 했는데, 그 대화가 토론회의 대화보다 훨씬 더 재밌고, 의미있었죠. '인주찾기'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자리였는데요.

결론적으로 다시 말하면 한국 상황과 미국 상황의 차이를 논함에 있어서 주된 상수와 변수는 '계약'(기브 앤 테이크)에 관한 관념과 관습, 그리고 어떻게 그 계약 참여자로 하여금 확실하게 '테이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수 있을까가 아닐까 싶습니다. 미국식 참여란 그 계약 관계에서 출발하면, 그 테이크의 질과 양이 확장할 수 있는 유인책이 다만 물질은 아니고, 거기에 '더해서' 자율성과 자기만족, 자유 등등이라는 이야기인데, 우린 아직 '기브'만 강조하는 문화이지 않나 싶은 거죠.

신비 : 김여진 님의 존재가 말씀하신 '영웅적 전범' 또는 '상징'으로 역할을 한다는데에 대해서는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효과의 내용은 다르다고 봐요. 포인트가 위대한, 유명한, 특별한 어떤 사람에 있다기보다는 그를 통해 경험하게 되는 인간적 매력, 재미에 있는 것 같아요. 사회적이고 공익적인 성격을 띠는 팬덤이랄까요. 그는 김여진이어도 되고, 조국이어도 되고, 고은태여도 되고, 민노씨여도 되는 거지요. 그 매력이 계기가 되고, 계기를 통해 스스로 경험하고 느끼는 부분이 커지고 나면 애초의 계기가 더이상 그렇게 중요한 요인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 같아요. 실제 날라리 외부세력에 참여하는 분들이 김여진 님을 자신들을 표상하는 대표로 생각하는지 어떤지 확인해볼 수도 있겠죠.

+ 하나 찾았는데, 홍대 청소노동자 지지 바자회 기획에 참여했던 분이 썼다는 후기를 보면 김여진 개인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어요. http://kimyeojin.tistory.com/27 ... 덧글에는 무지 많이 보입니다만.. :)


민노씨 : 마침 새벽에 일어나서 답글 쓰고 있었는데, 신비님께서도 깨어계신가 봅니다. : )

저는 상징은 대해선 아주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게 사람인 경우엔 생각이 좀 복잡해지죠. 어떤 시스템 자체, 어떤 운동의 경향성 자체에 상징성이 부여되고, 그 구체적인 운동(방식)이 다양한 상징의 자양이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새로운 상징으로서 그 운동 안에서 전범적 인간형이 다양하게 태어나는 경우라면 아주 좋겠지만, 기성 상징(유명인? 이름값?)이 이입(이식)되는 경우는 위험성도 없지 않아 보입니다. 그게 단순히 나쁜다, 피해야한다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고, 그런 상징인들이 갖게 되는 운동의 피동성에 관한 문제인데, 이게 솔직히 제 관념적인 추론에 불과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김여진씨에 대해선 아주 호감을 갖고 있지만, 조국에 대해선 비교적 실망감이 누적되고 있고, 그 밖에 문성근씨나 기타등등(김제동, 정혜신 등등)에 대해선 그 역할을 아주 긍정하고, '관객'으로서 지지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그들의 어떤 액션에 적극적인 '동지/친구'로서 동참하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아요. 제가 의심이 많아서 혹은 삐뚤어진 인간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요...ㅎㅎ(슬프지만 진실)

아 지금 막 괜찮은 비유가 생각났는데, '친구'로서의 전범과 '관객'으로서의 전범은 확실히 다르지 않을까요? 김여진씨나 김제동씨나 조국씨나 암튼 그 유사의 경우에들에 있어서는 시민들이 여전히 '관객'으로서 스스로를 피동적인 위치로 포지셔닝하는, 자신을 '관객'으로 한정하고 (바라보는) 전범들에 훨씬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함께 하면서 생겨나는 '친구'로서의 전범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게 처음 생각했을 땐 괜찮은 비유인줄 알았는데, 써놓고 보니 다소 모호하네요. (+) 물론 김여진은 조국이나 문성근 등과 비교하면 훨씬 더 '친구'로서의 전범에 가깝기는 하겠네요.

곰탱(박준우) : 그 '친구' 이야기.. 언제 한 번 정리하려고 했는데 민노씨가 말을 꺼내주셨네요. 소위 386이 주도하던, 시민운동이 잘 나가던 시기에, 시민운동의 동력이 되어준 '회원'들, 그리고 시민들(특히 젊은 화이트칼라들)은 대개 활동가들의 (문자 그대로) '친구'들이었죠. 이미 동질감을 느끼고 있고 공감하는 친구가 던지는 메시지는 비록 그 방식이나 내용이 권위적이거나 배제적이거나 폐쇄적이거나 엘리트주의적이거나 하더라도 큰 문제가 안 되었던 거죠.

그러나 그 이후 세대로 넘어오면서, 활동가들의 '친구'의 범위는 대단히 협소해졌고 '회원'들은 (민노씨 표현을 빌면) 좀 더 '관객'의 위치로 이동하게 되죠. 관객의 입장에서는 메시지를 던지는 메신저가 매우 매력적이어야 하는데.. 그러나 기존 운동사회의 활동가들은 별로 매력적이지 않고.. 심지어 이런저런 사고도 터지고.. 그런 상황에서 훨씬 매력적인 메신저들이 나타난다면 관객들은 그 메신저들과의 소통을 더 선호하게 되겠죠.

물론 민노씨 말대로 '관객'으로서 갖는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단순히 매력적인 메신저로서의 존재를 넘어 친구가 되어가고, 친구를 만들어가고 있는 김여진, 박혜경, 김남훈 같은 분들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기존 활동가들의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든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친구'의 범위는 협소하고 '관객'을 모으기는 매력이 없고.. 어느 쪽, 하나를 택해서 개선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사실은 다른 쪽의 문제가 발목을 잡는 악순환에 빠지기도 하고..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는 알렉산더의 칼처럼 뭔가 필요한 것 같긴 한데...



(대화가 이어지면 업데이트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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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곰탱 2011/06/12 13:36

    그 '친구' 이야기.. 언제 한 번 정리하려고 했는데 민노씨가 말을 꺼내주셨네요. 소위 386이 주도하던, 시민운동이 잘 나가던 시기에, 시민운동의 동력이 되어준 '회원'들, 그리고 시민들(특히 젊은 화이트칼라들)은 대개 활동가들의 (문자 그대로) '친구'들이었죠. 이미 동질감을 느끼고 있고 공감하는 친구가 던지는 메시지는 비록 그 방식이나 내용이 권위적이거나 배제적이거나 폐쇄적이거나 엘리트주의적이거나 하더라도 큰 문제가 안 되었던 거죠.

    그러나 그 이후 세대로 넘어오면서, 활동가들의 '친구'의 범위는 대단히 협소해졌고 '회원'들은 (민노씨 표현을 빌면) 좀 더 '관객'의 위치로 이동하게 되죠. 관객의 입장에서는 메시지를 던지는 메신저가 매우 매력적이어야 하는데.. 그러나 기존 운동사회의 활동가들은 별로 매력적이지 않고.. 심지어 이런저런 사고도 터지고.. 그런 상황에서 훨씬 매력적인 메신저들이 나타난다면 관객들은 그 메신저들과의 소통을 더 선호하게 되겠죠.

    물론 민노씨 말대로 '관객'으로서 갖는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단순히 매력적인 메신저로서의 존재를 넘어 친구가 되어가고, 친구를 만들어가고 있는 김여진, 박혜경, 김남훈 같은 분들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기존 활동가들의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든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친구'의 범위는 협소하고 '관객'을 모으기는 매력이 없고.. 어느 쪽, 하나를 택해서 개선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사실은 다른 쪽의 문제가 발목을 잡는 악순환에 빠지기도 하고..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는 알렉산더의 칼처럼 뭔가 필요한 것 같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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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1/06/12 15:08

      본문용 댓글이구먼요. : )
      본문에 바로 인용하겠습니다.

    • 신비 2011/06/23 15:49

      (민노씨, 제 블로그에 뒤늦은 댓글 짧게나마 달았어요)

      @곰탱: (민망하지만 아무리해도 곰탱이랑은 서로 존대하며 대화하긴 어려워서 반말 양해바래요 ㅠㅠ) 나도 비슷한 생각인데, 기존 활동가들의 매력이 떨어지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최근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어. 생각이 막혀있거나 이런저런 사고가 터지고 한 거는 오히려 부수적인 것이고, 어떻게 보면 자기 색깔을 더 강하게 드러내지 않고 반은 의무감 반은 기대감으로 변화의 흐름에 올라타보려고 애쓰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닐까 싶어. 운동의 변화는 이전의 것들을 죽이는 게 아니라 각자의 역할을 더 발전시키면서 확장되어가는 게 아닌가 싶고. 2000년 앞뒤로 치열했던 민중운동 vs 시민운동 논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비디오가 라디오를 죽일 거라던 노래도 당장은 맞는 듯 했지만 오히려 새로운 영역이 확장되었던 것처럼. 궁극적으로 한 운동이 생애주기를 갖고 언젠가 사그라진다고 할지라도 억지로 노선을 갈아타기보다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게 밀고나가되 세상의 변화에 민감하게 조응하는 정도라면 충분하지 않을까.

  2. 민노씨 2011/06/12 15:07

    * 제목 수정
    신비와의 대화 2 : 친구로서의 전범, 관객으로서의 전범
    >>> 신비와의 대화 2 : 친구와 관객

    : '관객으로서의 전범'이란 표현은 의미와 표시가 불일치하는 듯.

    perm. |  mod/del. |  reply.
  3. 민노씨 2011/06/12 15:12

    * 곰탱의 논평 본문에 보충.

    perm. |  mod/del. |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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