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가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기도 속에 있으며,
희생의 제사가 공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희생의 제사 안에 있듯이...
- 마르틴 부버, [나와 너] 중에서
'민노씨.네'에 백 번 째로 등록하는 글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에 대해 쓰고 싶어졌습니다.
저야 뭐 아는게 있나요, 그저 제가 느낀 바를, 그저 기억에 의존해서, 그리고 글을 쓰는 동안 제 안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순간의 목소리에 의지해서 적어봅니다.
책읽기의 황홀한 기억들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을 줄로 압니다.
제가 기억하는 가장 매혹적인 기억들은, 산문에 한정하자면, [나와 너]를 읽을 때, 그리고 [노동해방문학]을 읽을 때,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를 읽을 때였습니다.
그 체험들은 너무 황홀한 것이어서 마치 책 속의 풍경 속에 제가 빠져버린 것 같은, 말 그대로 그 속에서 또 다른 한 풍경으로 그렇게 있고 싶은.. 그런 마음을 생기게 한 것 같아요. 눈을 감으면 그 느낌들이 아주 어렴풋이나마 다시 피어납니다.
[나와 너]는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그저 그런 책이 아니에요.
여기에는 관계와 대화에 대한 심오한 성찰이 매혹적인 언어들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 언어들은 너무도 명징한 이성의 손길로 거듭 거듭 닦여져 아주 견고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사춘기 소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그렇게 부드럽고, 또 감미롭습니다.
제가 서두에 인용한 문장은 제가 [나와 너]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 중 하나인데요. 저는 소박하게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해석은 누구에게나 자유이고, 그렇게 해석을 통해서 '책읽기'는 완성되고, 다시 풀어지고(해체되고), 다시 또 구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각설하고..
부버는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조건에 대해 성찰합니다.
그것은 대화이고, 또 관계이고, 그 관계(사이)에서 생겨나는 어떤 의미들입니다. 그것은 쌍(관계)으로 존재하죠.
모든 존재들은 물질의 최소 조건인 공간과 시간에 의해 제약 받습니다.
그 조건을 떠나서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조차 없죠.
문명과 과학은 그렇게 존재의 조건을 규정합니다.
다만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그저 그렇게 물질의 최소 조건으로 규정된 시간과 공간이 아닙니다. 적어도 부버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물질적인 조건들을 적극적으로 역전시킵니다.
시간은 기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공간은 희생의 제사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부버는 말합니다. 그건 그저 공허한 말장난이 아닙니다. 정말 그러니까요. 저는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믿어요.
푸코는 르네상스 이후의 '발명품'에 불과한 인간이 마치 파도에 의해 지워지는 해변가의 낙서처럼 사라져가고 있다고 우울하게 진술합니다(말과 사물). 인간은 스스로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이성과 자아는 인간에 대한 배반을 스스로에게 학습시키는 또 다른 '억압'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자기는 이미 자기가 아니죠. 그 자기는 또 다른 '타자'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죽음'이 선언되는 시대를 우리는 통과하고 있습니다.
그런 시대에 부버의 [나와 너]는 그 시대를 견디는 든든한 방패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꼭 한번 읽어보시길 바래요.
이상입니다.
p.s.
커피와 캬라멜이 책읽기 친구가 된다면 좋겠네요.
제가 커피와 캬라멜을 굉장히 좋아해요. ^ ^
[참조]
"나와 너" (at 알라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