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줍은 욕망의 시대

2009/12/08 00:52

문화는 있어야 하는 것과 있는 것 사이의 긴장이다. 대개 있는 것은 있어야 하는 것을 압도하거나, 적어도 우세하다. 있는 것은 대부분 시스템의 관성이고, 있어야 하는 것은 대부분 시스템의 관성에 대한 저항이다. 표면에 등장하는 공식적인 문화는 있는 것 보다는 있어야 하는 것들을 위주로 보여준다. 있어야 하는 것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우선 도덕적으로 그래야 한다는 당위를 포함한다. 그것은 도덕적 지향이면서, 동시에 억압이다.  또 한편으론 있어야 하는 것은 대체로 사회생물학적인 욕망을 억압하거나 위장하는 성격을 갖는다. 양자는 긴장하면서 균형을 유지하게 된다. 수줍은 욕망의 시대다. 그리고 그 시대는 이제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

이제 우리 시대는 있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을 아무런 수줍음 없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해방시킨 시대다. 그렇지만 그 해방이 오히려 우리 사지를 옥죄는 쇠사슬이 되는 시대다. 이제 수줍은 욕망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그게 개뿔만큼의 위장이거나, 혹은 거지발싸개같은 현실에 대한 기만이었을지언정 이제 그 개뿔만큼, 그 거지발싸개만큼도 있어야 할 것은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아무도 이제는 있어야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있는 것의 관성이 있어야 하는 것의 저항을 무찌른다. 본능적 욕구와 사회적 욕구가 서로 완벽한 한몸으로 자가증식한다. 이제 욕망은 발기한 성기의 혈관처럼 터질듯이 무한 팽창한다. 바야흐로 문화의 종말, 문화라고 말해졌던 것들을 부관참시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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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icelui 2009/12/08 14:18

    민노 씨는 이상주의자인가요, 현실주의자인가요? 바꿔 말하면, 문학이 ─ 그리고 물론 제대로 된 모든 예술이 ─ 지향하는 전복적 변화가 실제로 일어난다면 그걸 기뻐해야 할까요, 이루어질 수 없는 만큼이나 사실 이루어져서는 안 되기도 한 그 변화를 경계해야 할까요. 저는 아마 후자일 거 같습니다. 시인이란 지상으로 유배당한 영혼이란 식의 표현을 들은 적이 있는데, 완전히 동일한 맥락은 아니지만 확실히 예술은 그 자체가 형벌에 가까운 무엇인 듯 해요. 기성의 틀을 깨고나면 결국 새로운 틀로 주저앉아 다시 새로운 사조를 통해 깨어지길 기다리는 그 숙명도 그렇고. 예술이 지향하는 세계 역시 영원히 돌아가고픈 이타카이면서도 결코 돌아갈 수 없는, 하나의 실재가 아니라 영원히 이미지로서만 기능해야 하는 유토피아라고 가정해보면, 이 모순이 일으키는 긴장도 (제게 흥미롭게 여겨지는 긴장은 있는 것과 있어야 하는 것 사이의 그것보다도, 있어야 하면서도 있을 수 없는, 또 있게 되서도 안 되는 99.99%쯤 되는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느껴지는 그런 긴장인데) 아주 지독한 형벌에 다름 아니겠지요. 시지프의 바위 굴리기는 이런 비유에 너무나 잘 어울립니다. 정상에 머물러서도, 그렇다고 산 밑자락에 내버려두어서도 안 되고 끊임없이 밀어올리고 굴러 떨어지는 것을 반복해야 하는 그 운명의 순간순간 조화가 실현된다는 느낌이죠. 정상에 올려보았자 다시 떨어지는데도 그것이 무의미한 고생이 아니라 가치 있는 행동이라는 지적은 명백히 창작을 가리켜 그 의미를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나름의 비유로 바꿔보자면, 너무 짙은 어둠이 우리의 눈을 가릴 뿐만 아니라 너무 밝은 빛이 또한 우리를 ─ 저 유명한 ─ 실명의 다른 상태, 백색실명으로 몰아넣기 때문에 우리는 그 둘을 모두 필요로 하며, 그 둘 사이의 불가능한 정적 평형을 꿈꾸면서도 실제로는 동적인 왕복을 통해 일시적인 균형을 끊임없이 찾아 헤매야한다는 식이 되겠네요.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도 마찬가지고. (...) 도덕적 지향이며 억압이라는 말이 슬며시 암시하는 모순성을 저는 참 좋아하는데, 따지고 보면 여기에 천착하는 것은 그냥 개인적인 망상에 웅크려 앉는다는 점에서 저답고, 반면 있는 것과 있어야 하는 것 사이의 긴장에 좀 더 주목하는 점이 저랑 다르게 민노 씨다운 것 같아서 주절주절 떠들어 봤습니다.

    있는 것과 있어야 하는 것은 제가 들었던 강의에서는 존재와 비존재의 문제로 표현되었습니다. 비존재를 인식함으로써 존재와 존재의 존재방식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도덕적 지향과 상통하겠고, 존재를 생각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비존재 자체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혹은 이미 존재하는 그것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은 그 억압과 맥이 닿겠지요. 저는 거의 매 학기 서로 다른 강의들을 통해, 단순한 수준에 머무르긴 했어도 여러 각도에서 이 문제를 접근해볼 기회를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부정적으로 생각되지는 않아요. 이 땅에서 문학이 치열했던 시절은 이제 지나도 한참 지난 것 같지만 좋은 글을 찾아 읽고, 나름의 사유를 펼쳐 성실하게 글로 옮기게끔 가르치는 사람이나 그런 가르침을 찾는 사람이 여전히 있으니까요. 그런 것도 있고, 비관주의적인 제 사고방식에서도 같은 결론을 얻게 되는 것은, 세상이 이전보다 더 나빠질 수가 없을 만큼 사실 처음부터 그저 그런 곳이기 때문에, 이제 와서 뭐가 더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아서 그래요. 혹시 우리 시대가 그에 비교할 만한 어떤 시대에 비해 유난히 더 추하고 게으르고 어리석다고 느끼게 한 어떤 최근의 사건이 있다면 알고 싶네요(전반적인 시대 인식이 그렇다면 그렇게 느낄 만도 한 세상이라는 점에 동의를 표하고요). 제 짐작에는 세상 어딘가가 전에 비해 유난히 더 나빠졌다면, 다른 어딘가는 그만큼 더 나아진 면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음. 오늘 글은 일단 글에서도 대명사에만 의존해서 진행된 만큼 세세한 얘기를 할 수가 없고, 이 새벽에 별안간 드는 생각들을 난삽하게 늘어놓으니 더욱더 리플이 상관이 없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본문과는 동떨어지게 되었네요. 이럴 때가 참 난처해요. 대충 읽어봐도 필요 이상으로 늘어놓은, 게다가 의미가 중복되는 말이 너무 많아 올리기도 그렇고, 그러나 막상 지우려면 이것도 저것도 아까워서 지우기도 그렇고. 그럴 때 저는 항상 올리는 쪽을 택합니다. ㅇ_ㅇ;

    덧. 제가 찾는 블로그의 공통점이라면 아무래도 솔직함이 아닐까 싶어요. 늘 재치있게 글을 풀어놓는 그 지성에 부러움을 느끼는 곳도 있고, 쉽게 동의할 순 없지만 항상 다르게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곳도 있고, 여기처럼 동의할 때도 있고 그럴 수 없을 때도 있지만 어느 때라도 성실하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곳도 있는데, 아무래도 일치점은 자기 의견을 두루뭉술하게 말하지 않는다는 점밖에는 떠오르질 않네요. (...) 다양한 의견이 모두 존중되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다양한 의견을 들어는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1) 특별한 계산을 깔지 않고 자기 글에 최소한의 성실성을 보이는 블로그, 2) 그런데 지루하지 않고 읽는 맛이 나는 블로그라면 다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앞서 제시하신 기준 중 ㄹ과 ㅁ은 저로서는 일관성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습니다. 자기의 지식을 과신하고 자기 생각만을 중시하더라도, 그런 원칙을 분명히 밝히고 충실히 따르고 있다면 블로거로서 할 도리는 다 했다고 보고, 거기서 취할 것과 버릴 것을 스스로 가려내는 것은 방문자로서의 예의라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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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12/10 06:25

      뤼님 논평은 여러번 읽었습니다. : )
      역시나 블로깅하는 즐거움과 보람을 주는 논평이시네요.
      이 논평에 대해선 따로 글을 써야지 하면서 있다가 계속 엉뚱한 글만 쓰다 이렇게 답글마저 늦어졌네요... ㅡ.ㅡ;
      여기 댓글에 좀더 쓸지, 아니면 따로 글을 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짧게나마 고마움을 전합니다.

  2. 윤초딩 2009/12/08 11:04

    읽고 또 읽어 보아도 글과 댓글의 내용을 이해할수 없다. 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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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12/10 06:22

      제가 표현력이 딸려서...ㅎㅎ
      좀 길게 쓸걸 그랬나봅니다. : )

  3. 의리 2009/12/08 12:34

    이 글과 댓글은 우선 배를 채운 후 천천히 읽어야겠군요. 슬쩍 훑어봐서는 머리가 붕 뜨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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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12/10 06:23

      사유의 재료들이 좀더 풀어야 하는데, 그걸 제대로 제시하지 못해서(귀차니즘 때문에..;;) 제가 읽어도 너무 추상적으로 붕 뜬 느낌이 없지 않네요. ㅎㅎ.

가벼운 마음으로 댓글 한방 날려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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