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은 없다 (소나타)
나더러 어디 있었냐고 묻는다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돼서……”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돌들로 어두워진 땅이라든가
살아 흐르느라고 스스로를 망가뜨린 강에 대해 말할밖에;
나는 다만 새들이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알고,
우리 뒤에 멀리 있는 바다에 대해, 또는 울고 있는 내 누이에 대해서만 알고 있다.
어찌하여 그렇게 많은 서로 다른 장소들이, 어찌하여 어떤 날이
다른 날에 융합하는 것일까? 어찌하여 검은 밤이
입 속에 모이는 것일까? 어째서 이 모든 사람들은 죽었나?
나더러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가진 것들 얘기부터 할 수밖에 없다.
참 쓰라림도 많은 부엌 세간,
흔히 썩어 버린 동물들,
그리고 내 무거운 영혼 얘기부터,
만나고 엇갈린 게 기억이 아니다,
망각 속에 잠든 노란 비둘기도;
허나 그건 눈물 젖은 얼굴들,
목에 댄 손가락들,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그런 것:
어떤 날의 어두움은 이미 지나가고,
우리들 자신의 음울한 피로 살진 어떤 날의 어두움도 지나가고,
보라 제비꽃들, 제비들,
우리가 그다지도 사랑하고
시간과 달가움이 어슬렁거리는
마음 쓴 연하장에서 긴 꼬리를 볼 수 있었던 것들.
허나 이빨보다 더 깊이 들어가지는 말고,
침묵을 싸고 자라는 껍질을 잠식하지도 말자,
왜냐하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니까,
죽은 사람이 참 많고
붉은 태양이 흔히 갈라놓는 바다 제방이 참 많고,
배들이 치는 머리들이 참 많으며,
키스하며 몸을 감는 손들이 참 많고,
내가 잊고 싶은 게 참 많으니까.
- 파블로 네루다 (Pablo Neruda)/번역 정현종,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민음사, 1989)
1.
알지 못하더라도, 아는 것.
느낄 수 없더라도, 느껴지는 것.
아프지 않더라도, 아픈 것.
모순은 오월 꽃동산처럼 삶 속에 만발한다.
그 모순을 숙주 삼아 자라는 삶 속에서 시는 그 삶을 껴안는다.
시는 모순 위에 서 있는 마법이 아니며,
그저 그 모순 자체다.
그 모순들이 내지르는 절규이고, 숨죽인 흐느낌이며,
그리하여 그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말’로서 시는 존재한다.
그것이 모순이라면,
그리고 모순인데, 그것이 내 뼈처럼, 살처럼 굳어져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도무지 알 수 없다면,
그래서 내가 지금 왜 울고 있는지,
왜 웃고 있는지,
왜 소망하는지,
그 소망은 어떤 상처 속에서 키워졌는지...
대답할 수 없더라도
나는 안다.
그것들이 있다는 걸.
그리고 시는 그저 그 있는 것을 언어라는 공간 위에 놓아둔다.
그럼으로써 거기에 들어가 함께 위로하고, 달래고, 보듬을 수 있는 성채를 만든다.
2.
다시 오월이 찾아왔다. 다시 아무런 아픔 없이 5.18을 통과한다. 다시 노무현의 노란 풍선이 하늘을 가득 채운다. 그 기억과 풍경이 네루다를 다시 불러온다. 네루다의 ‘망각이 없다’는 이 아름답고, 처연한, 가슴 터지도록 쓸쓸하지만, 따뜻한 시를 다시 불러온다.
3.
나는 "잊고 싶은 게 참 많"지만, 세상은 잔인하게도 '망각이 없는' 세계다. 이것은 이중적이다. 내가 기억하지 않더라도 세계는 그 상처들을 그 자체로 보존한다. 그러니 그 쓸쓸함, 그 고통을 우리는 있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런 뒤에야 화해가 온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우리에게 잊을 수 있는 권리가 생기고, 그 기억을 망각으로 떠나 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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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창으로 순간 이동!5.18과 노무현과 무슨 상관?
노무현에게 5.18이란 지역주의의 또다른 형상화된 모습 자체 아닌가?
그가 5.18을 계승하거나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을 한 적이 있었나?
없었지 않나? 그런데 5.18이 되면 노무현의 노란 풍선이 떠올라?
친노나 깨시들의 이런 미친 놈의 망상질을 언제까지 지켜보아야 하지?
내가 말해줄게.. 노무현하고 5.18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어...
일리있는 지적이십니다. :)
저 역시 5.18과 노무현은 그다지 큰 연관은 없다 여겨집니다.
다만 제 단상이 그 둘을 함께 불러왔다면, 그 둘(5.18과 노무현의 죽음)이 시기적으로 단순히 인접해 있고, 5.18과 노무현이 서로 관련이 있든 없든 간에 그 둘이 저에겐 겹쳐져서 다가왔던 까닭입니다.
끝으로 ㅋㅋㅋ님께 한말씀 올립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인터넷 공간에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최소한 예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점을 한번 생각해주시고, 또 흔히 하는 말로 '역지사지'도 한번 생각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원칙적으론 지워야 마땅한 댓글인데, 요즘은 댓글이 흉년이라 이런 무례한 댓글도 마음 한편에선 정겹네요.
다음에 찾아주시면 꼭 부탁드립니다....
님의 감성은 이해합니다.
노무현 지지자였던 이들에게 그의 죽음은 좀체로 설명되지 않는
불가해한 부분으로 남아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님의 감성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것이 님이 언급했듯 '시기적'인 일치점? 때문일까요? 그런데 왜 5.18입니까? 왜? 5.16이나 5월 1일- 메이데이는 될 수가 없을까요? 아마도 님은 5.18이 상징하는 민주화의 '성지'와 구체적으로는 김대중이 있을 것이고, 실제로도 정치적 계승자이기도 하지요. 뭐, 정말 계승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깊히 들어가 속 내용을 보면 전혀 그렇지도 않지요. 그런데 이를 계승했다고, 감성적으로는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겠죠. 그렇게 노무현은 민주화의 적자다라고 하나의 역사적 인간으로 형상화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감성을 그 안에 부여하고픈 열망은 저도 이해하는 겁니다... 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으면 이런 댓글 교환도 없었을 테지만,
...제 댓글이 예의가 없었던 것은 분명하죠. 그러나 님은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사실을 마치 자기 감성을 빌미로 어떤 오해를 감행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 않나요?
누가 진정 예의가 없는 걸까요?
님이 이 글을 쓰기 전에 먼저 역지사지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5.18은 어떤 숭고한 대상이 아닙니다. 님의 열망인 노무현에 대한 부여하는 '숭고의 의미;를 그것 - 5.18에 동질화시켜 대상화하지 마세요.
이것이야말로 진정 예의가 없는 짓이죠.
P.S. 이 댓글이 님을 불편하게 한다면 지워도 상관이 없습니다. 지운다고 해도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다시는 님의 블로그에 찾아오는 일도 없을 겁니다.
댓글을 지우는 원칙은 저 개인에게 불편해서가 아닙니다. 혹시라도 독자에게 불필요한 폭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 ) ㅋㅋㅋ님께서 남겨주신 이 댓글은 당연히 그런 댓글이 아니라서 지울 일 없습니다.
솔직한 말씀 고맙습니다.
말씀처럼 정치인 노무현에 대해선 양가적인 감정이 있죠. 다만 노무현을 "민주화의 적자"라고 판단하지 않고, 더군다나 "(제) 열망"은 더더욱 아닙니다. 물론 누군가에게 그렇다고 한들 저는 그 마음을 탓하고 싶은 생각 전혀 없지만요. 다시 올 일 없는 블로그라서 읽을 기회가 없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짬나시면 지난 글도 한번 살펴봐주시면 고맙겠습니다.
http://minoci.net/865
http://minoci.net/866
ㅋㅋㅋ 님의 말씀을 접하니 예의가 있고 없고를 판단하는 게 참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비아냥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 )
정치적 인물과 관련해서 다소 감상적인 글을 쓰는 경우, 그 대상이 누구든 간에 혹자에게 불편하게 느껴질 지점은 늘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해, 이런 식의 서술은 어떤 인물의 실체를 희미하게 만드는 효과가 강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런 희미해짐은 무비판적으로 편리하게 받아들이기 좋은 이미지라는 생각도 들고... 누군가가 박정희나 이승만을 동원해서 이런 비슷한 글을 썼다면(주제는 달랐겠지만), 글쓴이의 의도가 어땠는지와는 별개로 수용자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편한 느낌이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어떤 누가 어떤 글을 써도 그 글 자체로 '해석의 정답'이 있다 생각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글쓴이가 정답을 갖고 있지도 않고, 또 그렇다고 독자에게 정답이 있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권위있는 평론가에게 정답이 있다 여겨지지도 않고, 그저 다만 그 '매개'(텍스트)를 둘러싼 대화의 풍경만이 있다 생각하는 편입니다.
말씀 고맙습니다.
ㅋㅋㅋ 님과 밑닦자님의 댓글을 일년도 지난 싯점에서 읽네요
나름 논리적이지만... 한 개인의 블로그 내용까지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나무랄 것은 못되는 듯...합니다..
우리나라 인구 모두 각각의 정치적 성향이 있고 모두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 공통분모를 위해 투표라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너무들 하시네요.
민노씨 님께 공감의 글을 보냅니다.
우연히, 갑자기 황지우의 시를 다시 읽어보고 싶어서(가까이 시집이 없어)
웹 검색으로 들렀다 갑니다.. 건승하시길..
아이코~!! 이게 얼마만입니까???????
혹시 짬나시면 메일 skymap21@gmail.com 로 근황이라도 간단히 보내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