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화술로서의 블로그

2012/04/11 09:34
총선 아침에 뜸금없이 이 무슨 자다가 봉창인지 모르겠지만, 문득, 글쓰기와 말하기의 경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레비스트로스는 말하기와 글쓰기를 다르다고 인식한 것 같다(해체비평. 고려원, 품절). 정확히 기억나지도 않지만, 한 미국 불문학자(혹은 영문학자)가 레비스트로를 비판하는 데리다를 묘사한다. 기억에 의존해 인상적인 문구를 옮기면 이렇다. '문명과 야만의 나눔이 없던 시절, 글쓰기의 폭력이 없던 시절...' 이야기인 즉, 레비스트로스는 글쓰기야말로 야생을 야만화하고, 야생을 이성의 타자로 만드는 야만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이 테마가 가장 대중적으로 히트한 게 앙리레비의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인 것 같다), 데리다는 말하기에 내재적으로 글쓰기가 담겨 있다고 레비스트로스를 비판한다는 뭐 그런 맥락이다. 정리하면 데리다가 생각하기에 레비스트로가 주장하는 말하기와 글쓰기의 이분법은 허구이며, 말하기에 대한 향수는 나이브하다... 뭐 이런게 아닌가 싶다.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레비스트로스에 좀더 가깝다(그렇다고 데리다의 비판이 의미 없다는 건 아니다). 말하기는 말초적이고, 외부-반응적이다. 글쓰기는 이성적이고, 내부-반응적이다. 양자의 성격을 명확하게 구별할 수는 없지만, 사유의 강이 흐른다고 할 때, 말하기는 마치 내 사유의 흐름들 그 전부에 훨씬 더 가깝지만, 그것은 외부-반응적이기 때문에 말초적인 형태로 튀어나온다. 반면 글쓰기는 그 사유의 강에 던져진 그물 같은 것이라서 사유의 흐름 중 극히 일부만을 포착할 뿐이지만, 그럼에도 내부-반응적이기 때문에 훨씬 더 조직이고, 정돈된 이야기의 형태로 재생산이 가능하다. 글쓰기라는 건 일종의 복화술 같은 것이 아닌가 싶다. 말하기의 욕망은 너무도 광범위하기 때문에 대부분 정돈된 언어적 형상이 아닌 비정형적인 웅엉거림으로 존재하는데, 글쓰기는 그걸 구체적이 문법과 단어로 포착해야 한다.

그동안 블로그란 게 뭔지를 나름으로 고민해왔다. 현재 상황에서 나에게 블로그란 일종의 복화술(말하기와 글쓰기의 괴리)이다. 뭔가 말하고 싶지만, 그건 항상 웅얼거림에 불과하고, 그걸 언어로, 문법으로, 명징한 단어로 포착하려고 하면 그 웅엉거림이 만들어진 외부-반응적 사유의 재료들은 이미 화석화하거나, 증발해버리고 만다.

언젠가 아거는 블로그를 '내러티브를 가진 인간의 목소리'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이 말을 아주 긍정한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내러티브로서의 완결성을 고려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름으로 블로깅 방법론에 대한 일대 결심인데, 왜냐하면 점점 더 웅엉거림이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걸 도무지 정확한 나만의 문법화된 언어로 포착하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러니 나는 그 웅엉거림이나마 그때 그때 적어둘 수 밖에는 없는 노릇이다....


2002년 대선이 끝난 뒤에 '인터넷이 대통령이 만들었다'는 환호가 있었습니다. 이른바 '세계 최초 인터넷 대통령 로그 온하다'(가디언)라는 칼럼이 노무현 대통령 취임의 역사적인 순간을 장식했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이 대통령을 만들었다는 풍문 뒤로 노무현 정권에서 최초의 '(선거운동기간) 인터넷 실명제'(2004년)이 만들어졌습니다. 우상호에 의해 (인터넷 전반의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킨) 저작권법이 개악되었고, 인터넷은 국가권력이 바라보기엔 여전히 통제와 감시의 대상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SNS가 국회의원 만든다는 호들갑이 세상을 떠돌고 있습니다. SNS가 대통령을 만든다는 풍문이 곧 도착할 예정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예측과 분석을 위해선 현재의 좌표에 대한 재료가 필요합니다. 이에 슬로우뉴스와 미디어유에서 설문조사를 준비했습니다.

SNS와 총선의 상관관계에 대한 설문조사~!

http://bit.ly/I7gRuH (오늘까지!!)  

클릭 한방~!!!



슬로우뉴스팀은 주로 두 가지 온라인 툴을 소통수단으로 사용한다. 일상적인 접근성을 고려해서 페북 비밀그룹을 사용하고, 그 중에서 중요하게 기록해야 하는 것들을 구글 스프래드시트로 만들어서(문서 하나에 탭을 만드는 방식으로) 쓴다. 나는 페북 그룹 소개란에 구글문서 주요탭 단축 URL을 짧은 메모와 함께 기록해서 중요한 문제들에 팀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그 소개란을 그때 그때 갱신해왔다. 사이드바 우측 상단에 구글문서로 연결되는 링크가 생긴 셈이어서 나 자신도 많이 그 링크 단추를 눌러서 구글문서에 가보고, 전체적인 스케줄이나 주요 안건들의 진행상황들을 살펴보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그룹소개란이 사라져버렸다. +_+; 이게 뭔 일인가 싶어서 한참을 두리번 거렸더니 중앙의 메뉴탭 중 하나로 숨겨졌더라. 내가 생각해볼 수 있는 몇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가급적 외부링크로의 연결을 차단해서 안에서만 놀게 한다. ㅡ.ㅡ;
2. 사이드바의 친구찾기 기능과 관련 제휴(광고)링크들의 노출도를 높인다.
3. 사이드 여백의 미를 강조한다.

페북은 확실히 편리한 툴이고, 접근성이 높은 공간이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사용자들의 수동성을 조금씩 조금씩, 이런 자유분방한 제멋대로의 UI 변경을 통해 내면화시킨다. 페이스북은 일견 다양한 선택권을 주는 것 같지만(그 복잡 미묘한 설정들), 한편 그 설정에 대한 학습을 조금씩 강요함으로써 사용자들을 알게 모르게 페이스북에 길들인다. 특히 사이드바 '그룹소개' 실종사건은 정말 짜증이 이빠이 치솟아 오르는 짓거리인데.... 써머즈님 권유처럼 베이스캠프로 논의 공간을 옮겨야 하는 게 아닌가.. 최근 페북의 뻘짓거리를 접하면서 아주 실감하게 된다.

* 페이스북은 아다시피 검색이 무용지물인 공간이다.
* 한번 지난 게시물은 그야말로 못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나는야 오늘도 술래~! ㅡ.ㅡ;


창간사와 초대사

2012/03/31 23:32
존경하는 주낙현 신부님께서 댓글로 남긴 가벼운 권유 말씀 때문에 쓰는 글입니다. ^ ^;

"슬로우뉴스" 창간 축하해요. 애 많이 썼어요. 갈 길이 더 멀긴 하지만.  그나저나, 원래 썼던 창간사 초안을 이 블로그에 올려놔도 되지 않을까요? 뒷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지. 대화와 성찰의 터널, 시작과 끝을 엿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할테고요. ;-) (주낙현)

독자들께서 이런 것까지 궁금해할까 싶긴 하지만, 그래도 저 스스로에게 기억될만한 추억인 것은 분명해서, 저 스스로와 더불어 항상 깊은 위로와 격려를 주시는 주신부님을 위해 씁니다.

지난 3월 26일 '슬로우뉴스'가 창간되었습니다. 2월 말부터 한달 동안의 창간 준비 기간은 그야말로 시행착오의 연속이고, 폐기되는 아이디어들의 무덤이었습니다. 의욕은 넘치는데 재주는 없어서 마음과 몸이 모두 고생이었죠.(물론 창간 첫주가 끝나가는 지금, 창간 첫 주간은 그야말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지경입니다.) 아래 보이는  창간사 초고 역시 그랬습니다. 주낙현 신부님께 문장 하나 하나, 표현 하나 하나 빨간펜 선생님 첨삭지도를 받았지만, 역시 글이라는 게 아무리 좋은 선생님께 배운다고 한들, 어쩔 수 없이 '자기'가 나오게 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괜히 주신부님께는 폐만 끼쳤어요. 주신부님 소중한 시간을 뺏고 말이죠. 죄송합니다, 신부님! ^ ^

첫 창간사에 대해선 편집진에서도 이견이 많았어요. 우리 슬로우뉴스는 편집팀원들이 동시에 대부분 필자이기도 한데, 다른 글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특집에 관한 글은 구글문서에 글을 한데 올려서 서로 의견을 나눕니다. 첫 창간사에 대해선 펄 님께서 "멋지다"고 해주셨던 게 참 의지가 됐지만, 펄 님도 보충의견으로는 "너무 장엄하다"(ㅎㅎ)는 써머즈님 의견에 한 표를 던지셨죠. 필로스 님께선 직격탄을 알리셨는데, 취지를 뭉뚱그려서 표현하자면, '뭘 그렇게 어렵게 썼어?' 였죠. 사람이란게 칭찬에는 관대해도 비판에는 옹색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때는 내심 좀 야속한 마음도 있었지만(ㅜ.ㅜ;), 지금 다시 읽어보니 아주 적절하고, 합리적인 조언이셨던 것 같습니다(ㅎㅎ).

결국 처음 쓴 창간사는 실리지 못했고, 창간일 새벽이 되어서야 세어필 님의 조언(제발 좀 쉽게 써라! ㅎㅎ)을 받아서 그저 담담하게 제 마음을 전하는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게 현재의 창간사죠. 그런데 그 현재의 창간사에 주낙현 신부님께서 이런 축하와 격려를 주셨더군요.

“슬로우뉴스” 창간을 축하합니다.
정말로 훌륭한 글들이 많아서 행복할 지경입니다. 고민과 성찰의 터널을 지나 새로운 모험을 즐길 수 있게 해 주셔서,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민노씨의 ‘창간사’ 혹은 ‘초대사’에서 이 슬로우뉴스의 마음을 알게 되니 더욱 반갑습니다.

- 주낙현 (여기)


창간사라는 말은 뭔가 거창하고, 딱딱한 느낌이라서 저 역시 마음이 가지 않는 표현이었는데, 주낙현 신부님께서 "초대사"라고 하니 참 좋았습니다. 여기에 '장엄해서'(ㅎㅎ) 결국 실리지 못한 창간사와 창간 당일 새벽에서야 쓰여진 '초대사'를 함께 기록합니다.

1. 실리지 못한 창간사 초고


사유의 귀환 : 슬로우뉴스 창간에 부쳐

"말에는 그 최초의 말도 그 최후의 말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있는 어떤 의미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 모든 의미들은 언젠가 찬란한 귀향의 축제를 맞이할 것이다."(미하일 바흐친)


속도의 유토피아, 새로운 가이아
인류에게 기적으로 말이 생겨났다. 어머니 말은 자식이고, 동시에 아버지인 글을 세상에 낳았다. 글로 기록되지 않은 시간을 우리는 역사 이전이라는 의미에서 선사라고 부른다. 글은 모든 것을 지배한다. 이제 인간의 거의 모든 행위가 실시간으로 기록된다. 실시간으로서의 역사가 지금 이 순간에도 만들어지고, 유통된다. 웹의 발명과 블로그의 출현은 인류 최초로 누구나 스스로 미디어가 될 수 있다는 놀라운 진보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트위터와 페이스북, 모바일 기기와 무선통신망의 진화는 새로운 차원으로 우리를 이끈다. 생각의 속도와 기록이 일치하는 시대, 말과 글이 실시간으로 유통되는 ‘속도의 유토피아’에 우리는 이미 도착한 것만 같다. 이제까지 서로 떨어져 있던 섬들은 가이아(Gaia) 여신이 축복하시여 하나의 단일한 생명체로 다시 태어난다.
실시간 이동형 하이퍼-커넥티드 월드의 탄생이다.

새로운 선사, 봉인되는 소통
하지만 우리는 새로운 선사 시대를 목격한다. 쏟아지는 말과 글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한 점으로 수렴한다(아거, 아이폰과 침묵의 소용돌이. http://gatorlog.com/?p=1950). 바야흐로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끼고, 말과 글이 가득한 세계에서 점점 더 깊은 소외의 심연 속으로 빠져든다. 어떤 의미도 우리 안에 스며들지 못하고, 어떤 말도 내가 당신을 만날 수 있는 징검다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속도는 모든 것들을 기록하지만,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는 이율배반을 만들어낸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저 현상을 카피(copy)할 뿐이니까. 존재와 의미는 지워지고, 미친 속도감만 남는다. 그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파블로프의 개가 되어 간다. 종소리에 침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각종 이슈들에 침을 흘리며 말들을 짖어 댄다. 거기에 사유의 쉼표는 들어설 곳 없다.

우리를 둘러싼 그 무수한 의미들은 이내 타임라인의 희미한 잔상이 되어 사라져버린다. 외침은 있지만 공감은 없고, 진영은 있지만 토론과 대화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온갖 소문들이 진실을 압도하지만, 누구도 그 소문이 불러올 어둠을 근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어떤 도지사가 119에 전화해 관등성명을 묻듯 "당신은 우리 편인가?"라고 지긋지긋하게 동어반복할 뿐이다. 그리고  "선팔했어요. 맞팔 부탁해요~!" 쿨한 선팔을 날린 뒤 깔끔한 마무리 인사를 하는 쿨한 트위터리언이 되어버렸다. 소통은 알 수 없는 난수표가 되고, 결코 해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숫자로 변한 채 망각 속에 봉인된다.

'성찰의 터널'
15 명의 블로거가 '슬로우뉴스'라는 이름으로 여기 모였다. 우리는 속도가 지배하는 시대에 그 속도의 정체를 자문하고자 한다. 우리는 속도를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속도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그 속도를 지배하는 무엇이 과연 무엇인지를 탐색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그 속도 속에서 잃고 있는 어떤 것, 폐기되고 있는 어떤 가치를 고민하고자 한다. 그것이 무책임 속보 경쟁은 아니었는지, 정의를 빙자한 진영논리는 아니었는지 고민하고자 한다.

그 속도에 대한 성찰적 방법론으로서 우리 슬로우뉴스 편집팀은 '성찰의 터널'이라는 장치를 마련했다. 우리는 우선 블로기즘의 자율성과 미디어로서의 책임 개념을 깊이 숙고했다. 필자는 자신의 체험과 관점을 자유롭게 글로 쓴다. 자율성은 무엇보다 존중되어야 한다. 이 당연한 명제를 우리는 긍정한다. 하지만 그 자율성은 '성찰의 터널'을 통과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슬로우뉴스 편집팀은 '성찰의 터널'이라고 할만한 ‘대화의 그룹'을 만들었다. 그 '대화 그룹'은 실은 편집팀 전부가 참여하는 협업시스템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그 터널을 통과한 뒤에야 '슬로우뉴스'라는 이름으로 내보내는 글을 여러분들은 만날 수 있다. 그 상호 비판적 협업의 모니터링 시스템이야말로 슬로우뉴스의 경쟁력이자 슬로우뉴스가 이 속도의 시대에 존재해야 하는 의미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우리는 스트림이 아니라 체계적 아카이브를 추구한다. 우리가 쌓아갈 이 모든 것들은 또 다른 기억을 위해 기억할 필요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의미의 귀환을 위하여
여기, 저 드넓은 가이아의 대지 위에서 '슬로우뉴스'의 깃발을 세우고, 우리는 모험를 시작한다. 우리는 이 모험이 무수히 많은 '나와 너'를 이어줄 징검다리가 되길 희망한다. 우리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있는 힘을 다해 당신에게 다가갈 것이다. 우리가 만든 사유의 쉼터에 씨앗들이 자라고, 그 씨앗들이 더 많은 빗방울과 햇빛을 만난다면, 그렇게 당신이 당신이 소중한 구름과 태양이 되어준다면, 그때 비로소 세상에 흩어진 의미들의 찬란한 귀향이 축제처럼 우리 앞에 펼쳐 질 것으로 우리는 믿는다.


2. 최종적으로 실린 초대사


“말에는 그 최초의 말도 그 최후의 말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있는 어떤 의미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 모든 의미들은 언젠가 찬란한 귀향의 축제를 맞이할 것이다.”(미하일 바흐친)

속도의 시대, 속도의 유토피아

속도의 시대입니다. 미친 듯 정보가 쏟아집니다. 그 속도는 마약 같습니다. 미끈하고 탐스런 스포츠카 같습니다. 한번 취하면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빠져나오기 싫습니다. 그야말로 속도의 황홀경입니다. 세상 온갖 목소리들이 나와 연애하자고 유혹합니다. 그렇게 매일 매일 새로운 사랑에 빠집니다. 서핑하고, 트윗합니다. 페북하고, 카톡합니다.

트윗 한줄도 아주 소중한 언론 행위입니다. 유명인이나 공인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네 평범한 삶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뉴스’가 될 수 있을테니까요. 놀라운 신세계가 이미 실현된 것 같습니다. 테크놀로지는, 마치 상투적인 광고 문구처럼, 우리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이미 상상하고 실현했습니다. 이제 손바닥 안에 세계가 담깁니다. 스마트폰 속에 인터넷이 있고, 그 안에 세상 모든 풍경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한줄 트윗이 세상에 퍼져갑니다. 페북으로 연결된 친구들이 온 세상을 가득 채웁니다.

이 모든 것들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합니다. 이 다정한 재잘거림이 불현듯 깊은 적막을 만들어냅니다. 갑작스런 정전처럼 모든 게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내가 세상을 그려가지 않고, 세상이 나를 물감 삼아 나도 모르는 세상을 그려가는 것 같습니다. 나는 점점 더 희미하게 지워집니다. 하지만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내 목소리가 나에게조차 낯섭니다. 내가 글을 쓰지 않고, 글이 나를 씁니다. 내가 세계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세계라는 알 수 없는 시선들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어느새 나는 이슈와 속도라는 괴물의 의미없는 부속품으로 전락해갑니다. 더 이상 존재의 좌표도 나침반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습니다.

당신도 누군가에겐 소중한 뉴스

그토록 신났던 재잘거림이 듣기 싫은 소음이 되어 나를 괴롭힙니다. 소박한 대화들은 사라지고, 선동이 난무합니다. 과연 무엇이 옳은지 생각할 겨를도 없습니다. 누군가를 감정적으로 비난하는 나를 발견하고 나조차 놀랍니다. 페북의 다정한 친구들도 어느새 감시자가 되어버렸습니다. 내 안에 있는 작은 소망들을 이야기하기엔 다른 페북 친구들은 너무 화려합니다. 그렇다고 모난 돌이 되는 것도 싫습니다. 우리는 점점 더 개성 없이 무난한 평균인이 되어갑니다. 그렇게 점점 작고 초라해집니다. 나를 다르게 보여주는 건 멋진 학벌과 직장, 그리고 근사한 해외 여행 사진들 뿐인 것 같습니다.

마치 죽음을 예감하는 마지막 몸부림 같습니다.

그 와중에도 온갖 미디어들은 몸이 무너지고, 근육이 터지도록 뉴스들을 만들어냅니다. 마치 죽음을 예감하는 마지막 몸부림 같습니다. 온갖 현란한 제목으로 미끼질합니다. 쏟아져나오는 루머와 음모들은 어느새 우리의 사유능력을 무장해제했습니다. 오보라도 상관없습니다. 팔리기만 하면 장땡입니다. 이제 성찰과 사색은 배부른 고민입니다. 우리는 당장 선택을 강요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내 편 아니면 적일 뿐이니까요. 그래서 한편 침묵 속에 나를 가둬두고 스스로를 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말과 글은 욕망 그 자체입니다. 욕망은 한번도 스스로 쉰 적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새 다시 욕망하는 자기를 발견합니다. 종소리에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각종 이슈에 침을 흘리며 말들을 짖어댑니다. 우리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습니다…

속도와 테크놀로지라는 새로운 형태의 감옥

우리는 무수히 많은 개혁과 정의를 리트윗하지만….

우리를 둘러싼 그 무수한 의미들은 이내 타임라인의 희미한 잔상이 되어 사라져버립니다. 외침은 있지만 공감은 없고, 진영은 있지만 토론과 대화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온갖 소문들이 진실을 압도하지만, 누구도 그 소문이 불러올 어둠을 근심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혼돈의 속도에 취해 우린 마치 기계처럼 열심히 ‘좋아요’를 누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개혁과 정의를 리트윗하지만 실은 더 많은 월급과 더 좋은 차와 더 넓은 아파트를 원할 뿐입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입니다. 우리가 사랑한 테크놀로지와 속도의 유토피아가 어쩌면 디스토피아는 아닌지 고민할 시간입니다. 속도라는 먹이를 먹고 자라는 이 괴물 같은 시스템이 어쩌면 우리 시대가 만들어 낸 새로운 형태의 감옥은 아닌지 따져볼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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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AweofGod'sCreation (CCL: BY 2.0)

보십시오. 우리는 놀랄만큼 많은 이들과 관계 맺고 있지만, 점점 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어갑니다. 우리는 과거에 비해 놀랄만큼 많은 말들을 쏟아내지만, 점점 더 공감과 조화의 능력을 빼앗기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 거대한 시스템의 부속품이 되어갑니다. 그것도 기꺼이 좀 더 많은 페북 친구를 위해, 좀 더 많은 트위터 팔로워를 위해 경쟁적으로 그러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들려오는 올드미디어의 마지막 신음소리는 이제 듣기 괴로운 비명입니다. 그들은 불편부당의 주술같은 주문을 외우고 있지만 자극적이고, 무책임한 고발과 선동을 아무런 고민도 없이 반복합니다. 유언을 남기듯 미친 듯 이슈를 찍어냅니다. 성찰과 사유를 위한 시간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금 도착한 새로운 모험의 땅, 슬로우뉴스

그 세계의 한 모퉁이에서 고민을 이어왔습니다. 그게 벌써 족히 7,8년은 된 것 같습니다. 그동안 몇몇 실험을 통한 성공과 더 많은 좌절의 연대기를 만들어왔습니다. 그 짧지 않은 연대기를 통과해 지금 도착한 새로운 모험의 땅은 ‘슬로우뉴스’입니다. 사유와 성찰을 담을 수 있는 속도는 ‘패스트’가 아니라 ‘슬로우’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열 다섯 명의 창간 발기인들이 모여 편집팀을 만들고, 누군가에겐 여전히 소중한 뉴스인 바로 그 당신을 위한 뉴스를 준비해왔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험을 떠나고자 합니다.

우리 자신 그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망각의 구조를 재편하려고 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이 세계가 우리에게 추억할 능력을 빼앗고, 기억으로부터 의미를 불러와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앗아가고 있진 않은지 슬로우뉴스는 고민해나갈 생각입니다. 이 속도의 시대 속에서 잊혀진 채 봉인된 기억들을 불러와 새로운 사유의 재료로 삼을 생각합니다. 물론 슬로우뉴스는 속도를 무조건 배격하는 우를 범할 생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속도 속에 들어가 그 안에서 사유할 작정입니다. 그 속에서 함부로 버려지는 가치를 걷어 올리고, 우리 자신 그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망각의 구조를 재편하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슬로우뉴스 편집팀은 ‘성찰의 터널’이라고 할만한 대화 그룹을 만들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 슬로우뉴스 편집팀은 ‘성찰의 터널’이라고 할만한 대화 그룹을 만들었습니다. 대화 그룹은 기획부터 집필까지 상호 비판적 협업의 모니터링 시스템을 통해 작업을 이어갑니다. 전화와 문자, 이메일, 오프라인 미팅과 일대일 인터뷰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대화합니다. 우리는 이 대화들을 페북 비밀그룹에 쌓아놓기도 하고, 구글 공유문서에 보관하기도 합니다. 이 대화들은 언젠가 또 다른 방식으로 여러분과 공유할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쌓아갈 이 모든 것들은 당신이 준비해야 하는 모험을 위해 기억할 필요 있는 것이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험들이 이어지고, 서로 만난다면, 그때 비로소 세상에 흩어진 의미들의 찬란한 귀향이 축체처럼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을 믿습니다.

지금 우리는 당신에게 새로운 속도를 제안합니다
그 속도는 ‘슬로우’입니다.



* 슬로우뉴스로  클릭 한방!
많은 격려와 비판 부탁드립니다...(_ _)




부족한 소시민입니다. 보잘 것 없는 블로거입니다. 그래도 세계의 정체를 근심합니다. 저널리즘의 정체를 질문합니다. 나와 당신의 관계를 염려합니다. 공동체의 방향을 그려봅니다. 과연 우리는 이렇게 쉽게 잊고, 또 잊혀진 채 살아가도 되는지 고민합니다. 속도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가 내면화되는 사회에서 그 반대 지점으로 돌아가 과연 '존재가 온전히 담길 수 있는 속도'는 무엇인지 지난 한 달 남짓 대화하고, 토론했습니다. 우리들은 그 대안으로 '슬로우'를 제안합니다.

2012년 3월 26일
열 다섯 명의 발기인들이 모여 슬로우뉴스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 벅찬 항해를 시작합니다.

미친 속도의 시대에 '슬로우'를 표방한 이 어리석고, 우둔하며, 미련해 보이는 프로젝트를 감히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저는 너무도 감격스럽습니다.

지켜봐주십시오.
그리고 '슬로우'라는 속도는 단순히 느린 속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증거로 남아주십시오.
그래서 어느 날, 우리와 함께 아주 느린, 하지만 전혀 새로운 차원의 모험을 떠날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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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 Library of Ireland on The Commons (알려지지 않은 저작권 제한, 자유롭게 쓸 수 있어요)


이번 창간 특집호는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여기에서 왜 슬로우뉴스인가?


<고민의 근거 : 우리 자신에게 질문하기> 3월 26일
0. 당신에게 제안하는 새로운 속도 (민노씨)
1. 속보와 특종은 과장되었다 (캡콜드)
2. 뉴스의 미래 1: 저널리즘 시스템의 위기 (강정수)
3. 기술적 관점에서 본 미디어의 변화 (써머즈)
4. 네트워크를 떠도는 유령, 언팩트 (뗏목지기™)

<한번 더 의심하고, 회의하기> 3월 27일 (화)
5. 언론 신뢰 좀먹는 '얼굴 없는 네티즌' (들풀)
6. 특종와 오보, 그 아슬아슬한 경계 (이정환)

<본격 사례 비판> 3월 28일 (수)
7. 대기업 임원 이명준씨는 실존 인물인가? (이병찬)
8. 삼성·애플 오보경쟁, 또는 '바르기'와 '빠르기' (엔디)
9. 엉터리 의료기사들 (임예인)

<항변과 고백 : 데블스 애드버킷와 컨페션> 3월 29일 (목)
10. 언론을 위한 변명. (인터뷰. 이승환+필로스)
11. 직무유기를 반성하며 : 독자는 과연 진실을 원하나 (펄)

<정리 토론 및 특집 후기> 3월 30일 (금)
12. '특집: 왜 슬로우 뉴스인가?'를 돌아보며 (정리 토론)

참고 : 좀더 자세한 특집에 소개는 '왜 슬로우뉴스인가?[특집 안내]'를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