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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pic.twitter.com/XpQzSPn1

0. 기본적으로 허모 씨의 '순진무구함'에 대한 개인적 평가를 별론으로하자. 여기에 대해선 할 말이 많지만... (참조: 양치기 소년의 진심)  

1. 민주주의 국가다. 정치에 대해선 누구나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이건 당위다. 하지만 왜 '선거 개입'이 부정적인 어감으로 단박에 느껴질까. 뭔가 나쁜 것, 피해야 할 것으로 '선거 개입'이라는 단어는 인식된다. 물론 제도와 문화 때문이다. 선거법은 여전히 억압적이고, 정치문화는 개판이다.

2. 현재의 선거법과 정치제도, 그리고 여기에 직접 영향 받는 정치 문화는 너무 '억압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달리 말하자. 시민들의 정치의식을 철저히 무시하고, 하잖게 평가한다. 시민을 누군가의 악의적이거나 무책임한 말장난으로 언제든 현혹될 수 있는 저열한 인식을 가진, 사리판단 안 되는 철부지로 보는 거다.

3.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작용한다. 최근 곽노현 사건에서 보듯 불명확하고, 크게 고민되지 않은 현실과 유리된 선거법(정치제도)이라는 존재와 이를 집행하는 국가기관(검경, 법원)의 이중성이다. 권력적 국가기관을 장악하고 있는 건 예나 지금이나 청와대 혹은 유력한 정치인들의 카르텔이다. 거기에 기업권력이 이에 못지 않은 영향력을 늘려가고 있다. 무슨 과학적인 통계나 깊이 있는 인식이 필요한 게 아니다. 세상 꼴에 조금만 관심이 있어도 체험으로 터득할 수 있다.

4. 선거가 코앞이다. 아직 인터넷 실명제 문제도 끝나지 않았다. 위헌 판결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대책이라는 게 코미디 수준을 넘어서 호러로 간다. 한 지인이 페북에 남긴 지적을 인용해보자. (신뢰할 만한 경로를 통해 입수한 관계 당국의 입장) 선거 실명제 문제도 끝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인터넷 실명제 위헌 후속대책으로 정부가 내놓은 대책

-가해자의 직접 처벌보다는 간접 규제를 강화
-즉, 만만한 포털사업자들의 책임을 묻는 부분 강화

-요점은 3가지
1)악성댓글 추적 끝까지 해서 엄중처벌 한다.
2)게시판 운영자, 즉 포털이 관리 제대로 못한 경우 포털에도 손해배상 책임 물을 수 있게 한다.
3)방통심의위에 온라인 분쟁조정제 도입한다.

5. 기본적으로 국가는 국민주권에 바탕한 하나의 형식적인 위임기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국가(권력, 그런 권력을 쥔자들)에게 국민은 철저히 대상이고, 도구이며, 수단에 불과하다. 그나마 좀 좋게 말하면 계몽 대상이다.

7. 우리 자신도 책임이 없지 않다.


1. 트위터와 블로그, 그리고 내러티브의 죽음에서 이어짐

11. SNS의 역설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SNS는 매체의 문턱을 낮췄다. 여전히 (협의의) 블로그가 뭔가 줄거리를 갖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거리가 있는, 비교적 소수의 지적 엘리트에게 친화적인 매체였다면, SNS, 특히 트위터와 같은 캐주얼한 스트리밍 미디어는 '단 한 줄'로 고전적인 내러티브가 지배하는 질서를 일순간 파괴하고, 해체했다. 한 줄은 나도 쓸 수 있으니까. 스마트폰으로 사진 한방 찍어서 올리는 건 나도 할 수 있으니까.

12. 하지만 트위터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목도했던 풍경은 만인 미디어로서의 다채롭고, 다양한 빛깔과 향기의 풍경이 아니라 소수에 대한 이목 집중현상이다. 만인이 참여할 수 있는 미디어임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네임드' 집중현상은 오히려 강화된다. 여기에 이고잉이 탁월하게 지적한 '진영의 비즈니스'화는 가속하고, 맞팔이라는 병맛 문화로 인한 노이즈는 미친듯 증가한다. 그래서 나는 초기 트위터의 매력을 상당 부분 이미 잃어버렸다.

13. 최근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생각하는 현상은 '유명인'의 몰락(?)으로 부를 수 있는 현상이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트위터가 행하는 것 같은 '위대한 복수'(니체)랄까. 가령 공지영 '의자놀이' 사건을 생각해보자. 나는 공지영이라는 꽤 훌륭한 작가(로 평가되는 어떤 유명인)가 트위터라는 새로운 매체에 투영될 때 드러나는 그 한심한 모습에 이미 오래 전에 '아웃 오브 안중'한 상태였지만, 최근의 사태(!)는 뭐랄까, 묘한 쓸쓸함까지 안겨주고 있달까. 여기에 진중권이 구원투수로 함께 망가져가는 모습을 보자니, 누군가 탁월하게 묘사한 바, 이게 대한민국 "진보 일진"의 일진스러움인가... 아주 슬픈 생각마저 들었다. (이번 사태를 훌륭하게 정리한 뗏목지기트윗 르뽀르따주)

14. 위대한 복수. 위대한 성취를 이룬 어떤 사람은 그 위대한 성취 때문에 언젠가는 망가지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 위대한 성취로 만들어진 그 사람에 대한 표상을 실제의 그가 계속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즉, 과거의 위대한 내가 오늘의 평범한 혹은 비천한 또는 욕망에서 허우적거리는 나에게 복수한다. 트위터의 즉각적인 대화 시스템은 대화의 맥락과 결을 거세시킴으로써, 즉 극단적으로 대화를 즉물화시킴으로써 자기의 즉각적인 감각적 본능만으로 그 대화를 조직하는 속성을 갖는다. 특히 1:1이 아니라 1:10, 1:20, 1:100... 이렇게 소수에게 집중되는 대화 메카니즘 속에서 소위 주목받는 유명인의 반응은 수동적인 공격성으로 표출되기 쉽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다.

15. 그럼에도 공지영, 진중권의 트위터에서 표출된 그들의 '일진스러움'에 대해선 일말의 연민도 생기지 않는다. 그네들 진보일진들의 행패를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트위터라는 이 가상이며, 환상인 민주주의적 광장은 진보 일진들이 심심하면 용돈 삥뜯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악몽이 모여 있는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여기서 다시 지적하지만, 트위터라는 '민주주의적 광장' 그 자체가 환상이며, 환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그게 지옥인 것보다는, 환상이더라도, 푸른 잔디인 것이 낫지 않겠나. 물론 방구나 뽕이나이긴 하다.


SNS 시대: 자기반영적 드라마로서의 사회운동

2012/08/23 04:27
지난 8월 16일 [더 많은 수다 2012] 포럼 중 '사회운동 더 창의적으로' 세션에서 발표했던 자료다(PPT). 참석자(청중)은 주로 시민단체 활동가들이었는데, 한 스무 명 쯤 되었을까. 강의나 발표를 많이 하지 않아서 아직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청중이 많은 쪽과 적은 쪽, 그 둘 모두에게 장단점이 있겠으나, 나는 아직은 청중이 적은 쪽이 좋다. 사소한 단상들.

1. 청중이라는 말. 오병일 님은 '청중'보다는 '참석자'라는 표현을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그리고 나도 수동적인 의미가 다소 강한 청중보다는 뭔가 능동적이고, 수평적인 느낌의 단어가 뭐 없나 궁리해보지만, 적당한 표현이 당장은 생각나지 않는다. '참석자'는 강사(발제자)와의 쌍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 개인적으론 별로다. 야학에선 교사를 '강학'(가르치면서 배운다)이라고 하고, 학생을 '학강'(배우면서 가르친다)고 한다.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컨퍼런스든 포럼이든 말하는 사람만 말하고, 듣는 사람은 듣는 그런 구도를 나는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대개는 그렇게 된다. 이번 발제에선 그런 느낌이 강해서 좀 아쉬웠다. 시민단체 활동가들이셔서 질문도 많고, 딴지도 많을 줄 알았는데...

2. 자기 표절에 대한 불안. 유사하거나 중복되는 테마로 강의, 발제를 준비할 때 처음부터 새로운 자료들, 시나리오를 써야 하는지, 아니면 기존에 썼던 자료를 업데이트해서 써도 되는지 좀 헷갈릴 때가 있다. 이번 발제 테마는 총론적인 차원에서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웹과 SNS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강의였는데(처음 오병일 님께서 발제를 맡기셨을 때는 좀 다른 취지셨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미 기존에 학부생의 교양강좌(특강) 자료로 대학생들이 웹과 SNS을 어떻게 바라보면 좋을지를 내 나름으로 구성해본 발제가 이미 있어서, 이번 '수다 포럼'에선 그 자료를 상당히 많이 썼다. 2/3 정도는 이미 있는 자료를 썼고, 새로운 내용은 1/3 정도 뿐이다. 그게 좀 마음에 걸리더라. 물론 기존 자료들도 다시 모두 한장 한장 손보긴 했다.

아무튼 누가 볼지, 점점 더 독자들도 줄어드는 판에, 댓글이라도 하나 달릴지 모르겠지만, 누군가 한 명이라도, 잠시 동안이라도 시간과 관심을 선물할 거라는 기대로 올린다. 슬라이드 쉐어에 올렸는데, 임베드로 공유한다. 물론 여기서 공유는 내용 공유와 다운로드 참조용이지(뭐 그다지 참조할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전적인 의미의 공유는 아니다. 발제 자료에 한정해선 앞으로 CC-BY-NC-SA(출처-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정도로 좀 타이트하게 정책을 가져갈 생각이다. 내 블로그의 CC 라이센스는 BY-SA(출처-동일조건변경허락)이다.










<수술 덜 된 논현동 언니들>을 그리는 무명만화가께서 저에게 작품에 대한 소감을 부탁하셨습니다.
이에 짧게, 작품을 한 번 다시 쭉 감상한 뒤에 생각나는 대로의 단상을 답장드렸습니다.
그 답장을 사소하게 퇴고해 올립니다.



1. 컨셉 / 스토리

기본적으로 아주 훌륭합니다. 특히나 매회 다음 회를 궁금하게 만드는 장치들을 배치한 깨알같은 추리극의 요소들은 멋진 기법이라고 봅니다.

2. 미시적인 에피소드

다만 캐릭터에 기반한 에피소드의 풍성함은 다소 약한 느낌입니다. 저 개인적으론 <논현동>은 사회풍자적인 느낌으로 많이 다가오는데요. 전체적으로 그 풍자는 인물들의 내밀한 에피소드를 통해 드러나지 않고, 경제적인 조건이나 구조적인 인식(남/녀의 사회정치적 조건)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현재로도 아주 상징적인 에피소드지만, 예상가능한 에피소드라서 마치 사회, 경제적인 조건들을 이야기화한 느낌이지, 이야기 속에서 사회,경제적인 조건들이 드러나는 느낌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표현방식이 다소 거칠고, 직설적이라서 좀더 비유적인 방식이나 숨겨진 방식으로 드러날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가령, 유년이나 중고등학교 시절의 체험들이 좀더 미시적으로 표현되면 그 풍자가 오히려 더 큰 설득력을 가질 수 있지 않나 싶어요. 제가 좋아하는 문구를 굳이 인용하자면, "브레히트의 교훈적인 희곡보다 랭보나 보들레르의 시 속에 현실을 변혁하는 더 큰 정치적인 잠재력이 숨겨져 있다"는 마르쿠제의 전언이 떠오릅니다.

3. 짝패로서의 캐릭터

현재 주요 등장인물은 모두 성형의 불가피함을 온몸으로 절절하게 체화한 인물들인데, 즉, 성형중독자 혹은 성형워너비들인데요. 이런 인물들의 짝패로서 성형수술을 아주 반대하는, 혹은 성형수술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진 친구들, 주변인물들이 배치되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 인물 배치가 처음부터 이뤄졌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는데, 앞으로도 충분히 그런 인물들을 일종의 '파트너' 혹은 전략적인 '짝패'로 구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 독자가 애착할 수 있는 캐릭터의 구현

현재로선 4인방의 캐릭터가 아직 명시적으로 구현된 단계는 아니라 봅니다만, 저 개인적으로 그 4인방 중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인간적인 호감이나 또는 연민을 구체적인 감정의 단계로 체험한 인물은 아직 없습니다. 각각의 인물이 갖는 의미론적인 요소들을 좀 더 분명 가져가면 좋을 것 같아요. 더불어 그 인물들에게 '인간적인 알리바이'(독자와의 공감대)를 만들어주시면 어떨는지요? 현재로선 다소 머리가 텅 빈 성형수술 워너비들의 수다에 치중한 느낌이 강해서, 그 인물 하나 하나에 공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4인방 중에 문학이나 영화에 관심이 많은 친구도 있을 수 있고, 사회운동에 의외로(?) 관심이 있는 친구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단순한 성형미인 워너비의 캐릭터에 좀 더 입체감을 부여할 수 있지 않을는지요? 더불어 사회가 성형미녀들을 바라보는 선입견이나 이중적인 시선들도 드러낼 수 있다 보고요. 

저는 성형 미인 워너비들 나쁘다 생각하지 않고, 그네들의 '병맛' 대화에 담긴 고민이 폄하될 필요도 없다 봅니다. 그 4인방은 자신이 원하는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여자들이고, 그게 사회의 부조리가 만들어놓은, 혹은 주입한 '병맛'스러운 것이라고 해도, 그러니 좀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자본주의적 육체를 세뇌당한 '불쌍한 파블로프의 개'에 불과한 존재라고 해도, 그녀들의 집념과 노력, 그리고 용기 그 자체는 저 같은 유치하고, 이기적이며, 관념적인 사람이 보기엔 아주 훌륭하고, 멋지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녀들을 그저 '병맛 4인방'으로 기억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병맛 4인방'으로만 기억될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그녀들을 구원해주세요.
저는 그녀들이 스스로 구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저도 조금은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부탁드립니다.


일단 제 단상은 이 정도입니다.
제 단상은 그저, 마땅히 그러실테지만, 사소한 참조로만 삼으시길.
제 부족한 단상이 조금이나마 작품활동에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민노씨 드림.


여행 1. 혹은 그 바다에 떠 있던 구름

2012/08/01 14:55

여행은 항상 나에겐 이중적이다. 설렘과 실망의 이미지. “미로 속의 공간은 신비”롭지만, 거기에 들어가면 “시간이 신비롭게 느껴”지는(정현종) 그런 느낌이랄까. 설렘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행복한 일이지만, 그 설렘 속으로 들어가면 언제든 나는 아이처럼 실망을 만나지는 않을지 조바심을 낸다. 내가 만들어내는 실망이 훨씬 더 공포스럽지만, 내가 만날 실망도 항상 염려가 되는 건 사실이다.

소중한 사람들과의 여행은 항상 행복과 두려움의 이미지들이 교차한다. 우리는 낯선 공간, 낯선 시간 속에 빠져서 여행이라는 새로운 곳을 흘러가니까… 하지만 내가 어디로 흘러갈지 도무지 알 수 없으니까.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낯선 공간과 시간은 하나의 무대 같은 느낌이라서, 그 무대는 너무 사랑스럽고, 너무 행복한 공간이지만, 하지만 난 노련한 배우는 아니니까. 실수하지 않을까 마음 속에서 심장이 콩콩 뛰는, 그렇게 심장이 뛰는 설렘과 두려움을 누군가 발견하지 않을까 안절부절하는 아이가 된다.

그 바다, 거기에 떠 있던 구름이 마구 마구 몰려온다.
거기에는 너무 커다란 행복의 이미지와 너무 너무 깊은 슬픔의 이미지가 겹쳐져 있다.
그건 너무 아름다워서, 너무 소중해서, 난 아마도 그 구름들을 잊을 수 없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