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회의

2009/10/27 05:16

1. 내가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교훈적인(?) 이야기 중에 이런 게 있다. 많이들 들어봤을텐데, 기억에 의지해 옮기면 이런 내용이다. 악마들이 모여서 회의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을 더 불행하게 만들 수 있을까. 인간 마음에 어떤 걸 심어 놓으면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까. 여러가지 제안들이 나왔다. 어떤 악마는  시기심을, 어떤 악마는 지배욕을, 어떤 악마는 폭력성을 제안했다. 그리고 결국 가장 좋은 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인간에게 이런 마음을 심어주는거야, "내일 하지 뭐..."

2. 나는 그 이야기가 대단히 근사하다고 생각했었다. 약간 코믹하면서도 냉소적이랄까, 아주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게 왜 그렇게 근사했던거지? 방금 전에 문득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이 이야기가 떠올랐다.

2-1. 화장실에서 나는 주로 책을 읽는데(이게 꽤 효과가 좋다, 왠지 막 부지런한 느낌도 들고, ㅎㅎ), 요즘 (한 십 년만에 다시) 읽는 책은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민음사)이다. 책제목인 그 짧은 '보고서'는 얼마전에 다 읽었고, '포스트모던이즘이란 무엇인가의 질문에 답하며'를 지나, 지금 읽고 있는 부분은 '재현을 넘어서'라는 또 다른 부분인데, 그러니까 이 책은 서로 다른 짧은 논문들을 묶어서 펴낸 책이다,  이건 써놓고 보니 전혀 관련이 없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는군, 아무튼 그 책 어떤 구절이 아마도 연상효과에 영향을 준건 아닐까 싶어서 써봤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3.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소설, TV드라마 속 캐릭터들 가운데 손가락에 뽑히는 캐릭터가 있다. 블로그에도 몇 번 썼던 빨강머리 앤이다(내가 좋아하는 건 일본 TV판이다, 소설은 아직 읽지 않았다. ㅡ.ㅡ; 이것도 참 이상한 일이긴 하다, 그렇게 좋아하면서 왜 원작소설로는 아직도 읽지 않았을까...아무튼). 화장실 연상이 빨강머리 앤을 불러왔다. 빨강머리 앤이 퀸 스쿨(맞나?) 시험을 준비하면서, 혹은 '장학금 꼭 타야지' 다짐하면서 이런 취지의 마음 속 이야기를 한다. "야망을 갖는다는 건 참 가슴을 들뜨게 하는 일인 것 같아."

4. 뭔가 성취를 한다는 건, 부지런하다는 건 대단한 미덕으로 칭송받고, 그건 일견 당연하다. 내가 애착해마지 않는 앤의 당찬 포부도 참 흐뭇한 느낌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좀 못나면 어때? 좀 덜 부지런하면 어때서? 라는 못나고 게으른 생각도 든다. 뭔가 부지런해야 하고, 뭔가 성취해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그렇게 못하면 뭔가 낙오한 느낌... 그게 대한민국이라는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가장 강력한 동인들 가운데 하나이리라. 물론 나는 항상 그 시스템의 구심력에서 아주 멀리 멀리 변방에 있기는 하다.

5.  지금도 그렇지만, 그 이야기를 듣던 당시에 내 가장 큰 특기(?)가 " "내일 하지 뭐..."였다.  그래서 더욱 그 이야기가 인상적으로 기억되었을테고.. 물론 나는 지금도 여전히 "내일하지 뭐... " 이런 생각을 뼛속에 묻어두고 그런 게으르고, 나태한 태도로 하루 하루 살아가고 있긴 하다.

7. 마지막으로 한두 줄만 더 보태면, 이런 이야기들이 한편으로는 성취 지향의 경쟁적인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또 하나의 신화는 아닐까라는 의심도 생긴다. 게으름이 미덕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덕도 아닌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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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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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icelui 2009/10/27 08:36

    교휸적인(?) ... 이라고 쓰신 건 의도적 오타인가요? 제가 모르는 맥락이 숨어 있는 듯.

    버트란드 러셀이 쓴 글로, 국내에는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란 제목으로 발간된 책이 있는데, 너무 오래 전에 읽어서 지금은 내용이 잘 기억나진 않습니다(옆에 있긴 한데...). 거기서 읽었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본 것인지 분명치는 않지만, 제 기억에 '근면'이란 산업사회를 더 잘 돌리기 위해 고용주가 피고용인에게 불어넣은 신화에 불과하다는 식의 지적이 있었던 것도 같습니다.

    덧. 저는 화장실이 아니면 좀처럼 책을 손에 들지 않는데, 반갑네요. =) 요즘엔 대학교 강의 들을 때 샀던 '과학 철학의 이해'란 걸 보고 있는데 딱 흄과 귀납, 인식론적 회의주의를 파고드는 시점부터 곤경에 처해 그냥 페이지만 넘기고 있습니다.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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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10/27 19:50

      아이코, 민망하게시리..^ ^;; 그냥 단순한 오타입니다. 새벽에 블로그 편집기(WLW)에 낙서처럼 써서 올린 글이라 그런겁니다. 그 밖에도 오타가 많네요. 오전에 아이스님 댓글 읽고 부랴부랴 고쳤습니다.

      논평 주신 바에 대단히 공감합니다.

      러셀의 그런 책이 다 발간되었었군요.
      저는 언젠가 '유행'했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피에르 쌍소)를 떠올렸는데 말이죠. ( http://www.minoci.net/33 )

      추.
      우연히 유사한 제목의 책('과학기술의 철학적 이해')이 바로 서가에 꽂혀 있던 터라, 처음에는 같은 책인 줄 알았는데 다른 책인 것 같네요. 펼쳐보지도 않았던 책인데, 문득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 )

  2. 로뿌호프  2009/10/27 09:52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저는 빨간머리 앤 소설을 읽었는데요.
    소설 속에 여러가지가 있지만, 공부에 대한 앤과 길버트의 열정을 생각해보면
    여느 다른 아동소설(혹은 만화)하고는 달랐던 점 같아요.

    (말이 샜네요. ^^;) 게으름을 변명해야하고, 야망을 찬양할 수 밖에 없는 세태가
    양지바른 햇살을 그대로 받고 서 있는건, 오히려 정정당당할 공동체의식이 저만치
    그늘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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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10/27 19:52

      별말씀을요, 이런 낙서같은 글에 공감을 표하시니 반가움 한편으로 민망뻘쭘해지네요. ㅎㅎ 말미 말씀에 크게 공감합니다. 즐거운 경쟁과 자기존중의 성취감은 좋겠지만, 그게 수월성이라는 이름하에 배타성이나 강박이 되면 참 세상사 깝깝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우리나라는 이미 그런 사회이긴 하지만요...;;

  3. 세어필 2009/10/27 10:13

    전 화장실은 최대한 일찍 탈출하고픈 장소라 책은 무리더군요ㅎ
    저 경우엔 지하철처럼 반강제적인 장소가 필요합니다.
    내일로 미루고 싶으나.. 그러기 힘든(심심한) 불가항력인 상태로 책을 보는 거죠--;
    도저히 뭔가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지하철)를 만들어 버리면.. 내일 할일도 땡겨서 하게 될 듯합니다.
    어찌보면 민노씨 경우엔 화장실이 그 상태이겠네요^^;

    PS.
    화장실은 내일로 미루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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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10/27 19:53

      세어필님께선 화장실과 친하지 않으신 편이시군요.
      저는 이상하게 화장실에 가면 뭐랄까 이런 저런 공상들도 많이 하게 되고, 마음도 차분해지고... 그런 편입니다. ^ ^;;

  4. 허수  2009/10/27 20:02

    스크랩 관련 글 찾아왔다가 좋은 글이 많아서 자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

    prostration 이라는 책이 있었는데 (미번역) 지금 생각해보니 잘 읽어보면 좋았을 걸 싶네요 (머리말에 이 책의 저자들이 나태에 대해서 세미나를 열어보는게 좋다고 생각했으나, 그걸 실행하는데 1년 걸렸다는 이야기에서 폭소. 흐흐)

    참고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읽으면서 집어던졌었네요 ㅠ.ㅠ 프랑스 쪽인지 유럽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정서와는 전혀 안 맞아서...

    개인적으로 악마의 선물은 "내일 하지 뭐" 보다는 "5분 뒤에 일어날래" 가 더 가슴에 와닿고 있는 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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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10/27 20:32

      반갑고, 고마운 말씀이시네요.
      "실행하는데 1년.." ㅎㅎ 그래도 실행을 했다니 다행이네요.
      저도 그 책에 대해선 그다지 땡기지 않아서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대단히 유행했던 책이라는 기억은 아직도 어렴풋합니다.

      추.
      오분 뒤, 십분 뒤.. 이거 뭐 거의 죽음이죠. ㅋㅋ.
      제 경우엔 약속시간에 습관적으로 늦는 편인데, 이것도 참 안고쳐지더라고요.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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