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안내 : 약한 스포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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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조기를 집에 꽂아 두고 자식과도 교류하지 못하는, 참전용사이자 포드노동자였던 괴팍한 꼴통 보수 늙은이)
그랜토리노 Gran Torino, 2008. 미국. 116분.
우리나라 개봉 : 2009.03.19


* 미국도 실패했고, 이스트우드 자신도 실패했다.
[그랜토리노]는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하나는 미국은 실패했다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이스트우드 자신도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 실패를 이스트우드는 파괴적인 폭력성으로, 치열한 저항으로, 권위적인 응징으로 그려내지 않고, 놀랍게도, 관조로, 유머감각으로, 성찰적인 자기희생으로 그려낸다.

* 자기희생 혹은 유보된 희망
이스트우드의 자기희생이라는 '선택'은 그저 오리엔탈리즘적 휴머니즘이 아니라, 미국의 역사와 이스트우드 자신의 실존의 역사, 그리고 우리에게는 '황야의 무법자'나 '터티해리'로 상징되어온 자신의 영화적 페르소나의 '완전한 죽음'을 의미한다.  그 죽음은 종말이 아닌 새로운 희망으로 이어지는데([체인질링]의 마지막 이미지와도 묘하게 겹친다),  그 희생을 길삼아 좀더 멀리 멀리 달려가길 바라는 한 노인의 바람은 물론 쉽게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체인질링]에서처럼 유보된 희망일 뿐이긴 하다.

* 미국식 영웅의 좌절, 그 성숙한 진화
[그랜토리노]는 휴머니즘에 바탕한 영웅이야기의 변주가 아니라, 오히려 미국식 영웅의 좌절을 그리고 있는 영화다. '생존'이 최대의 미덕인 '마카로니(스파게티) 웨스턴'과 '터티해리'로 상징되는 미국식 인정사정 없는 폭력의 가장 대표적인 페르소나인 이스트우드는 스스로를 '처단'함으로써, [용서받지 못한 자]의 비전을 좀더 깊이있는 성찰로 밀어붙이고, 자신의 실존적인 표상을 영화 속 인물과 포개어 놓음으로써, 보수주의 미국의 패권주의, 즉 [퍼펙트 월드]에서 그려낸, 닿지 못한  희망의 안타까움과 '실패한 아버지' 세대의 좌절을 담담하고, 유머러스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진지하고, 무겁게 고백한다.

* 정치영화로서의 [그랜토리노], 성찰하는 보수주의로서의 [그랜토리노]
이 영화는 현대 패권적 미국정치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으며(미국 꼴통 보수의 베트남 트라우마의 연장에서), 그 비판의 좀더 구체적인 방식은 스스로에 대한 처단이자 희생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미국은 그 스스로 악이며, 이제 그 악을 처단하는 방식은 과거에 이미 실패한 폭력적인 응징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죽음이라는 그 아픈 성찰). 즉, 이 영화는 미국의 지난 과거에 대한 향수와 환멸을 동시에 드러내지만, 결국은 대단히 고결한 의미에서 보수주의적 전통에 서 있다.

그런 영화에서 여전히 약한 자들은 연대하지 못하고, 선은 스스로 악을 처단하지 못한 채로, 이스트우드라는 '대리인'을 불러온다. 그 늙고 괴팍하기 짝이 없는 늙은 꼴통은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그 선을 대행하지만, 여전히 그 선은 이스트우드라는 꼴통 마초의 유산을 통해 새로운 길을 달리는 그런 한계에 갇혀 있다. 이것은 보수주의적인 관점이면서, 선의 대행자로서의 미국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이스트우드의 자기 성찰 만으로도 끝간데 없는 감동을 주는 이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의 이중성에 대해서는 눈감고 있는 영화이고, 악은 여전히 이스트우드의 세계에서는 응징과 처단의 대상으로 남겨져 있으며, 다만 그 응징의 방식이 '희생'일 뿐이다. 그것이 보수주의자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는 자신이 닿을 수 있는 그 길의 끝, 그 현실의 끝, 그 성찰의 끝이었던 셈이다. 즉,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존재 조건에 대해, 자신이 이렇게 '괴팍한 꼴통 마초'가 될 수 밖에 없었던 미국의 조건에 대해서 진심으로 근심하고, 성찰하지만, 그 성찰은 내면으로 향할 뿐, 좀더 높은 차원에서, 아니 좀더 적극적인 차원에서 악의 근원성, 그 이중성에 투영되지는 않는다.

이 마지막 길을 선택한 이스트우드의 결단, 그 결단의 의미를 여러가지 또 다른 길로 달리 해석할 수는 있겠지만, 그 결단에 이르는 도저한 자기부정의 성찰은 그 어떤 해석을 통해서 이 영화를 비판하든, 이 영화의 감동까지 깨뜨리기는 힘들 것이다. 이 영화는 적어도 서부영화의 전통, 미국식 영웅담의 전통, 그리고 이스트우드라는 한 영화인의 실존적인 여정, 그 영화적인 연대기 전체를 포괄해서, 가장 가슴 아프고, 쓸쓸하며, 묵직한 감동을 전해준다.

좀더 이야기하면 [그랜토리노]는 현실 속의 공화당 지지자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영화배우로서의 '무법자'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스스로 처단'함으로써, 자기 성찰과 희생의 메시지를 자신의 영화적인 유언으로, 자기 삶의 유언으로 남기는 영화다. 이 영화는 '작가로 평가되기 이후'(특히 [용서받지 못한 자] 이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적 성찰이 갖는 그 깊이의 정점을 보여준다. 그러니 이 영화가 물론 정치, 철학적 한계를 갖는 영화라는 점이 자명하다고 하더라도, 이 영화는 이전의 어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 보다 감동적이고, [용서받지 못한 자]나 [퍼펙트 월드]만큼이나, 이런 무식한 표현이 허락된다면, 그 모두 합친 것 만큼 걸작이다.

* 지금/여기, 우리의 아픈 결핍
우리에게는 이스트우드와 같은 인정할 수 있는 보수주의자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보수'를 '기획/판매'하는 집단들은 종교적인 광기와 정치적인 광기, 경제적인 광기가 담론적인 광기와 한 몸을 이루고, 철저한 '사익주의' '집단이기주의'로 자신을 무장한다. 그리고 그 공고히 무장된 갑옷 위로 보수라는 기만의 옷을 입을 뿐이다. 우리사회에서 진실은 "언어의 감옥" 속에서 끝없이 유린되고, 변질되고, 왜곡되며, 그 야만의 메카니즘은 빛나는 욕망의 모방심리와 강박적 경쟁심리 속에서 내내 안녕하시다. 이 전도된 가치의 시대에 이스트우드의 [그랜토리노]는 우리에게는 왜 저런 보수주의자가 없는가라고 한탄하게 만들기 충분한, 그래서 우리의 아픈 결핍이 영화에 더 커다란 감동을 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 성찰과 영원
이제 더 이상 영화를 찍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나이를 지나버린 이스트우드는 [그랜토리노]를 통해 스스로의 영화를, 자신의 삶을, 그리고 자신이 존재를 규정짓는 세계를 적극적으로 사유함으로써, 비록 자신의 비극적 영웅의  꼰대 철학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그 꼰대 철학에서 나아갈 수 있는 궁극의 지점으로까지, 아니 그 너머에 까지 도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점에서 이스트우드는 영화사상 자신의 존재 근거를 가장 깊은 차원에서 성찰한 위대한 영화인 가운데 한 명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그 비전은 마치 타르코프스키적 세계관의 깊이에 도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리고 [그랜토리노]는 그 대답을 당신에게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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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 잠머으 지맙대로 '그랜토리노' 보기 ^^;;;

    Tracked from FairDream.net 2009/08/07 00:43 del.

    퍼플림이 예전에 이거 봤냐 어떻드냐고 물어보신 담에 궁금햇던건데, 드뎌 수퍼에 생긴 1불짜리 임대자판기에서 빌려서 봤다. 글서 우선 쪼갈쪼갈 소감이나마 떠오르는대로...ㅎ ^^;;;; 글고 본까 ㅋ물어보신 이유를 대충 짐작할 수 잇을것도 같더라능...ㅋ ;) more.. 우선 크린트 이스트우드으 예전 영화와 거진 동일선상에 잇는거 갓다. 더티하리부터 페일라이더나 용서받지몬한자, 권투코치를 거쳐 이 월트 코왈스키에 이르는 그 트랙은, 기본적으로 '영웅..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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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eachol 2009/05/12 14:25

    성조기여 영원하라 ?
    God Bless America ?
    그런 한인들 +
    쥐박스럼에 대한
    뭐 그런 것들
    둘러 보시면
    볼만 할 것들이 좀 있을끼요

    perm. |  mod/del. |  reply.
  2. 리뷰 잘 2009/05/12 23:44

    읽었습니다. ^^ 저 역시 비슷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는 데,
    제 의구심도 함께 데리고 좀 더 깊은 곳으로 잘 이끌어 가 주셨군요.

    근데 문득, 글에 농과 가벼움을 좀더 섞어주시면, 사람들도
    더 쉽게 덩실덩실 댓글을 달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뭐랄까, 저도 여기에 윗글을 쓰기 전까지는, 뭔가 저 역시 꽤나
    구체화된 리뷰평과 의견을 적어놓아야 되지 않을 까 하는
    무언의 압박을 느끼게 되더군요. 물론 그냥 제 생각일 뿐이니..
    넓게 해량하여 주시길..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9/05/12 23:53

      글이 너무 딱딱했나 봅니다.
      말씀처럼 힘 좀 빼고 썼어야 했는데 괜히 좀 너무 진지해진 것 같네요.

      그저 가볍게 의견 주시면 되고요.
      이 글도 제 입장에선 그저 가볍게 읽어주시면 족합니다. ^ ^;
      무언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솔직담백한 의견 주셔서 정말 고맙고요.

      앞으로도 종종 가벼운 마음으로 의견 주시길 기대해봅니다.
      조언에 깊은 고마움을 전합니다. : )

  3. 민노씨 2009/05/13 00:04

    * 사소한 추고 : 오타, 불필요한 수사 제거 등.

    perm. |  mod/del. |  reply.
  4. skyrunner★ 2009/05/13 00:38

    미국 영화중에 보고싶어도 가끔 타이밍 놓치는게 있지만
    이놈은 처음보는.....?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9/05/13 03:34

      이놈은 놓치지 마시길! : )

가벼운 마음으로 댓글 한방 날려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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