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Why] 소수 언어의 죽음
마지막 '에약語' 사용자 사망 (유석훈 교수·고려대 언어)


세계에서 단 1명뿐이던 알래스카 에약어 구사자가 89세로 사망했다고 영국 BBC 인터넷판이 25일 보도했다. 사망한 마리 스미스 존스(사진)의 생존 자녀 7명은 영어 이외의 다른 언어를 구사하면 잘못된 것으로 간주되던 시대에 성장했기 때문에 한 명도 에약어를 구사할 줄 모른다. ―연합뉴스 1월 25일 보도

문화적으로 다른 '포식 언어(killer language)'에 포위돼 있기도 한다.

에약어만큼 심각한 상황은 아니지만 하와이어도 사멸 위기를 겪었다. 하와이어의 포식 언어는 영어였다. 게다가 1898년에 미국에 합병되면서부터 인구는 증가하였으나 영어 공용어 교육정책의 시행으로 하와이어의 위상은 크게 위축되어 사용자가 더 줄었다.

다행히 1978년부터 하와이어 몰입식 공교육을 통한 복원이 시도되고 있으나, 여전히 영어라는 막강한 포식 언어에 포위된 상태에서 하와이어 모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원주민 수는 1000명 전후에 머무르는 위기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언어나 문화의 사멸 과정은 불과 몇 년 정도에 걸쳐서 신속히 진행되는 반면, 복원 과정은 훨씬 더 긴 시간과 노력의 투입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 위 글 중에서

아무리 거듭 읽어봐도, 이건 이명박과 인수위 영어정책에 대한 점잖은 비판으로 해석될 여지가 상당히 크기 때문이다. 이런 칼럼을 한겨레나, 경향, 혹은 한국일보에서 읽었다면, 음... 아주 점잖게 인수위의 뻘짓을 비판하고 있구나.. 이랬을텐데, 이건 조선일보다.

다만 위 글에 대해선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할 만한 부분이 없지 않은 듯 하다.
아거님께선 다음과 같이 위 글에 대해 논평하신다.

인수위 비판보다는 요즘 외신에 이런 뉴스가 있어서 하는 이야기같아요. 최근 미국 인기 영어강좌 파드캐스트인 ESLPOD에서도 endangered language 를 이야기할 정도로 화제가 된 것 같습니다.  

조선일보의 [오피니언] 영어를 배우지 않을 자유 주장이 상당히 신선하네요.
아거

그래서 아거님께서 신선하시다고 논평한 다른 칼럼을 읽어봤다.

거듭 난감하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그리고 훨씬 더 참신하다.
관점에 따라선 꽤 급진적인 주장이다.

[오피니언] 영어를 배우지 않을 자유
언어교육 효율성은 자율적일때 높아, 다른 외국어 습득 기회 놓쳐선 안돼
채서영 서강대 영미어문학과 교수

입력 : 2008.02.01 22:57

... 수업시간을 늘리고 평가방식을 바꾸는 동시에 과감히 영어를 배우지 않을 자유도 주었으면 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언어는 다른 교과목과는 달리 자율이 주어질 때 가장 효율성이 높아지기 때문이고, 영어만 강조하다가 세계와 다각도로 소통할 수단인 다른 외국어 습득의 기회를 놓쳐선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 영어 교육의 낮은 효율성은 분명 문제다. 그러나 한국인 모두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얘기는 이 문제와는 별개의 것이다.

우리에게 영어가 절실하다는 생각에 과장된 측면이 있다.

어째서 한국 사람이 한국서 대학을 가고, 판·검사가 되고, 취직을 하는데 이 점수가 필요한 것일까?

필요성을 절감하고 배우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교육을 제공하면 된다.

영어와 직접 관련이 없는 전공을 하려는 사람은 영어 좀 못해도 대학에 갈 수 있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대통령 당선자와 인수위에서 영어 교육에 관련된 결정을 모두 내리기보다 전담 부서를 설치해 신중을 기하면 어떨까? 영어 교육 개혁이 국어와 다른 외국어를 포함한 총체적 언어정책의 큰 틀에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 위 글 중에서

사소한 이견이 있음에 대해선 별론으로, 그 자체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합리적인 의견이다. 그런데 나는 이 글이 편하지 않다. 오히려 당혹스럽다. 채서영씨가 싫거나, 잘 알지도 못하는데 뭐, 채서영씨 의견에 반대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찬동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혹스러운거다. 왜냐하면, 이 글이 담겨진 곳이 조선일보니까.

이렇게 교양주의의 외피를 입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전체적인 틀짓기의 악랄함을 조율하거나, 혹은 위장하거나, 혹은 정말 이런 옳은 관점을 '수용'한다면 조선일보의 악질적 반저널리즘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라는 방법론은 좀더 복잡해질 수 밖에 없다.

나는 조선일보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일보가 보여주는 저널리즘이 반저널리즘이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말해왔지만... 때때로 밝힌 바 있듯이 조선일보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이 내 스스로 정당하다고 느낄만큼 견고하고, 굳어졌기 때문에... 이런 마음에 드는 칼럼을, 비록 외부기고이긴 하지만, 발견하는 순간에는 정말 난감해진다.

가령 최근에 내가 가장 존경하고, 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는 생각하는, 그토록 믿었던 황지우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심사위원을 하는 장면을 목도하는 순간.. 정말 뒷통수를 얻어 맞은 것처럼 한동안 멍했던 기억이 있다.

점점더 조선일보 기고자들은 기존의 노골적 뻘짓 유형들에서 벗어나, 세련되고, 합리적인 교양주의적 관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때때로 '진보적인 관점'도 눈에 띈다. 물론 기득권에 반하는, '(창조적) 파괴의 관점'을 보여주는 글은 읽어본 적 없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를 지배하는 그 악질적인 논조, 그 음습한 기운, 일견 세련된 글로벌 스탠다드를 떠들지만 그저 삐까번쩍한 외피 만을 자신의 이익과 틀짓기의 도구로 활용하는 그 위장된 관점들을 나는 인정하기 어렵다. 가령 최보식 기자 인터뷰가 보여주는 그 천박함라니... 그런 쓰레기 글을 읽는 곳이 조선일보라는 사실이 편안하면서, 또 동시에 이런 조선일보이니 비판하지 않을 수 없잖아, 이러는 거다. 그러면서 즐겁게 역겨움을 느끼는거다. 그건 정말 즐겁게 역겨워도 되는것일까....

조선일보는 정말 점점더 어려운 상대가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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