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밤

2011/05/18 03:08
아버지 제사를 마치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판에서 나물이며 야채를 파는 초로의 아주머니께서 아주 늦은 밥, 맨밥에 김치 반찬, 드시는 모습을 봤다. 너무 쓸쓸해서 심장이 터져버리는 것 같은 순간들. 달려가서 손잡고 싶은. 그저 바라보고, 옆에 있어주고 싶은 순간들. 하지만 영원히 잡을 수 없을 저 갈라진 손, 아무리 용기내도 도저히 마주칠 수 없을 것 같은 저 눈동자. 거기엔 내 유년의 어미가 있다.

봄밤. 아이폰에 담긴 음악들. 레이디 가가가 좋을 때도 있고, 크렌베리스가 좋을 때도 있다. 오늘은 유키 구라모토가 참 좋다. 레이디가 나오면 짧게 두번 누른다. 다시 유키. 음악 속으로 들어가니 세상이 한없이 한없이 아름답게 부질없다. 황학동의 낡은 거리를 걸으면서 갈아진 것, 상처난 것, 해어지고, 낡아빠진 것들을 떠올렸다. 어떤 얼굴, 어떤 눈동자. 나와 같고, 나와 다른 사람들.. 그리고 한 번, 한 번만 부여 안고 휘이 돌고 싶은... 그 아이도 떠올랐다.

Almost Famous(2000.카메론 크로우)는 놀랄만한 걸작은 아니지만 사랑스러운 걸작이다. 조숙한 열 다섯 살 소년의 통과의례에 관한 이 영화는 문득 떠나는 소풍같은 들뜸의 판타지 속에서 그 환상의 껍질이 벗겨지는 순간의 아픔을 그린다. 마치 오래된 일기의 추억을 회상하듯 그 아픔은 따뜻하다. 그리고 어느새 소년은 남자가 된다.

#. 주인공 윌리엄 밀러와 그의 멘토 레스터 뱅스의 통화

레스터 : 우린 쿨하지 않으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여자가 늘 문제지만, 대부분의 위대한 예술은 바로 그 문제를 다루지. 잘생긴 사람들은 알맹이가 없고, 그들의 예술은 오래 가지 못해. 뭐, 결국 걔네들이 여자를 얻겠지만, 우린 더 똑똑하잖아!

윌리엄 : 네, 이제 분명히 알겠어요.

레스터 : 위대한 예술은 죄책감과 갈망, 섹스로 가장한 사랑, 사랑으로 가장한 섹스에 대한 거니까. 인정하자. 이제 실마리를 잡았지?

윌리엄 : 집에 계셔서 다행이예요

레스터 : 난 늘 집에 있어. 난 쿨하지 않으니까

윌리엄 : 저도요 ㅡ.ㅡ;

레스터 : 넌 잘하고 있어. 이 부도 맞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통용되는 통화는 니가 안 멋질 때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바로 그거야. 내가 너에게 조언하고 싶은건, 니가 그들을 친구로 생각하는 건 알겠지만, 니가 정말 진정한 친구가 되고 싶다면, 정직하고, 무자비해야 돼

블로깅은 가장 소박한 자기 위로다. 내가 너무 불쌍해서 못 살겠어. 내가 너무 잘난 사람이라서 쓰는게 아니라 내가 너무 쓸쓸하고, 외로운 사람이라서, 부족한 사람이라서, 따뜻하고 싶어서, 그걸 쓰는거다. 그 자기 위로는 나와 당신에 대한, 우리에 대한 연민에 다름 아니다. 그 연민이 공동체적인 상상력으로 확장할 수 있도록 서로의 징검다리가 되어주는 것, 그게 우리들의 블로그에 기대하는 내 작은 바람이다. 요즘은 너무 속도에 치여 거대하고, 복잡한 쳇바퀴의 작은 톱니가 되어가는 기분이랄까...

트위터에서 한시간 남짓 아주 쓸데없는 싸움의 공방들을 읽었다. 쓸데없다. 자주 있는 시간낭비이긴 하다. 그리고 나는 시간낭비에 대해선 전문가니까. 죽은 사람의 말들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니.. 어처구니 없다. 칸트건 헤겔이건 마르크스건 지라르건 지금 여기의 삶을 위해서 존재하는 거다. 사유 그 자체의 논리적 완결성을 위해 자족적으로 존재하는 건 아니다. 당신과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아야 하는, 당신이 바라보기엔 무지하고, 감정적이며, 어리숙한 그 사람들을 위해서 죽은 자의 말들은 존재한다.

인간을 좀더 풍성하게 느끼고, 삶을 좀더 입체적으로 헤아릴 수 있도록 도와주지 못하는 글이라면, 말이라면, 사상이라면, 그건 도대체 뭘까. 반지성주의를 탓하기 전에 그 죽은 이의 말들이 여전히 살아 숨쉬게 한 그 정신이라는 것의 본체가 뭔지, 그것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했던 건 뭔지, 생각했으면 좋겠다. 만약에 마르크스가 한국어를 쓰는 블로거였다면, 그랬다면 네이버에서 블로깅하고 있었을까? 그것부터 생각해보는게 사회주의자 1만 서명을 위한 첫걸음일 것 같다. 자신이 블로거이면서, 자신이 발딛고 있는 블로깅의 토대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는 건 죽은 자의 위대한 말뿐이다. 그러면서 사회의 토대를, 제도와 문화를 이야기한다. 그 영민한 청년들의 독선이... 아쉽다.


*  
이 글은 주낙현 신부님 때문에 쓰는 글이다.
주신부님께서 블로그에 글 너무 안쓴다고 하셔서...
주신부님, 항상 고맙습니다... : )  

**
써머즈님 트윗 소개로 조용필 노래를 오랜만에 들었는데,
예전엔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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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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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은 2011/05/18 03:55

    너무 쓸쓸함이 묻어나 내 마음이 미어지게 슬퍼지려고 하네.
    우리동네 맛있는 감자탕집을 찾았는데
    놀러와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성수족발집을 함께 가자.
    보드람치킨도 가고.
    민노씨. 쓸쓸해하지마.
    민노씨 주변엔 민노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잖아.

    사람은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때
    어떠한 상황에서든 가장 절망적이라고 하지만
    민노씨처럼 사랑받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끊임없이 사람들은 민노씨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민노씨와 함께하길 원하고-

    민노씨, 힘내요. 화이팅. :)

    민노씨도 나도 모두모두 잘될거라고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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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1/05/19 07:33

      그래, 너도 기운내 : )

  2. viamedia 2011/05/18 09:04

    참 근사한 민노씨. 이런 아름다운 글로 대답해 줘서 고마워요. 사람살이는 쓸쓸한 기억에 기댈 때 더욱 따뜻한 것 같아요. 그 비슷한 경험과 그 기억의 결에 대한 공유는 시간이 흘러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공감과 신뢰, 연대의 굳은 바탕일 테고요.

    시인이신 제 선생님 한 분이 이런 공감과 연대를, 기억과 눈물이 만든 슬픈 우물들이 땅 밑에서 서로 손을 맞잡는 일이라고 표현하셨던 것이 생각나요. 측은지심과 연민이 공동체적 상상력으로 이어지길 바란다는 그 도저한 마음이 변화를 위한 모든 실천의 전략과 전술이었으면 해요. 외롭지만 이런 눈물 어린 연대라는 블로그에서 민노씨를 만나고 나누어서 기뻐요.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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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1/05/19 07:38

      저야말로 신부님과 인연은 과분한 축복이죠.
      제가 너무 부족해서 얻어가는 입장이라는게 스스로 아쉽지만요... ^ ^;

  3. 엔디 2011/05/18 09:05

    죽은 자의 말은 산 자의 것이군요. Vive le "viv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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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1/05/19 07:44

      정말 오랜만에 와주셨네요. : )
      이제 좀 자주 봐요, 우리.

  4. 이대팔 2011/05/18 13:26

    점점... 봄이라는 것에 걸맞는 날은 몇날 안되는 것 같습니다. 확실해요?! 봄에 꽃은 언제 다 피워 댈 것인지 그만큼 더 빨리 지겠네요.

    아~!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좋네요. 예전에 알았었고 몇번은 즐겨 들었을텐데...'나는 가수다' 박정현이 불러서, '위대한 탄생' 참가자 누가 불러서, 연어가 거슬러 올라가듯? 이것저것 따라가니 그동안 잊었었던 위대한 가수 조용필의 멋진 이 노래가 나오더라는...요즘의 음악에 얽힌 사연이나 스토리는 이런식이군요. ^^;;

    어떤 음악(노래)에 개인적인 (어쩌면 터무니 없는) 불화? 같은 것이 있는데... 예를 들면 조용필의 음악이라면 "기도하는~"..."악!!!"... 좋긴 좋은데 저 "악!!!"하는 부분에 어떤 이유로 함께 하지 못하거나 그냥(어떤 질투심에) 싫어서 조용필의 노래를 의식적으로 외면하거나...최근에 빅뱅이 가볍게 리메이크 하기도 했던 이문세의 '붉은노을'은... 이문세의 노래를 보거나 들으면 참 쉬워보여서 노래방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선택을 하게 되죠. 그러나 직접 불러보면 그게 아닙니다. '붉은노을' 반도 못가서 제 얼굴에 붉게 노을이 지게 되는 ㅠㅠ;; 매우 어려운 노래죠. 일행에게 취소당하거나 마이크를 뺏깁니다...

    그렇게 뭐라 설명할 방뻡이 읎을 만큼 좋은 음악(노래)라는 것을 알지만 개인적인 말도 안돼는 이유로 외면하거나 잊고 싶은 노래가 꽤 있는데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와 같은 좋은 곡을 다시 듣게(보게) 되는 것처럼 이젠 그런 음악들과 개인적으로 화해하고 싶군요. 새로운 좋은 음악을 찾아 듣는 것도 좋지만 그동안 즐겁게 듣고 어디에 따로 모아서 쳐박아둔 음악들도 다시한번 꺼내어 즐겨보는 시간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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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1/05/19 07:51

      아, 이 노래 나가수에서 불렸었나요?
      제가 나가수는 우연한 기회에 딱 두 번, 한번은 식당에서 절반쯤, 한번은 어떤 친목모임에서 참석자 한분이 휴대용 하드에 나가수 녹화본을 가져오셔서 한번, 본 적 밖에 없어서.. ㅎㅎ 그때는 못들은 것 같은데, 다른 편에서 불렀나 보네요.

      그 기분이 어떤건지 대충은 알 것 같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가수들(가령 이선희?)이 있죠. 붉은 노을은 노래방에서 가끔 부르는데 말이죠. 언제 이대팔님도 함께 블로거벗들과 합창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문득 대학시절 노래방의 극악스런 노래방 합창(?)이 떠오릅니다.

      옛 노래들은 엄청난 추억들과 함께 정말 쓰나미처럼(^^) 몰려오곤 하죠.
      그런 노래들이 많지는 않지만요.

  5. 비밀방문자 2011/05/19 16:34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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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1/05/19 07:55

      김명연 교수님(교협 공동대표) 통해서 가끔 듣는 정돈데
      다시 몸풀기(?)에 들어간 듯.
      대구대, 덕성여대 마저 사분위가 구재단에게 넘겨주는 형국이라서..

      정말 옛날 생각나는구나.
      나도 그 때가 참 좋았지... 싶은 생각들 가끔 하는데 말이지..
      그래 ㄱㅁ이랑 함께 맥주 한잔 하자.

      너도 건강 잘 챙기고..
      어머님, 아버님께 안부 전해주삼.

  6. 후니 2011/05/18 16:49

    저도 네이버에서 블로깅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종종합니다.(생각만) 배경음악을 넣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퍼뜩 이거사면 어떤 부류를 돕는걸까 하는... 그런 한편 요즘같이 자본가들이 서로 얽히고 섥혀 있는 상황에서 내가 이들이 아닌 다른 어떤 집단에 기여를 하게될때 과연 나의 이념적 소비가 충족될 수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고요.
    고민이 좀 됩니다. 후~(근데 쓰고보니 꼭 고해성사 해 놓은 거 같네요;)

    아참~ 민노씨님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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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1/05/19 07:57

      저는 네이버에서 블로깅하는게 나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아니고요. ^ ^;;
      다만 전략적으로 문제의식은 갖고 있어야 하지 않나...
      적어도 사회운동(?) 혁명(?) 이런 걸 이야기한다면 말이죠.
      그런 취지로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나저나 필로스님 블로그에서 댓글로 뵈었는데, 여기서도 뵙네요.
      반갑습니다. : )

가벼운 마음으로 댓글 한방 날려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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